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 읽기] <49> 로마의 영향은 계속되고 있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9월26일 17시26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메타정보

  • 17

본문

 

“로마는 3번 제민족을 통일했다. 첫째는 백성이 시민 정신에 충실할 때 무력에 의해 국가를 통일하고, 둘째는 로마가 이미 몰락한 후 정신의 힘으로 교회를 통일하고, 셋째는 중세에서 로마법의 계승에 의해 법을 통일했다.”


19세기 독일의 법학자인 예링이 한 말이다. 오늘날의 서유럽은 로마를 바탕으로 각자 독립국을 건설했다. 미국은 유럽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이룩한 나라로, 미국의 건국자들은 로마 공화정을 모델로 미국의 정치체제를 구상했다.

로마의 개방성은 미국의 시민권 제도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의 시민권은 속지주의에 따라 미국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부모의 국적에 상관없이 미국 시민권을 얻는다. 로마 황제가 속주에서도 탄생했듯이, 오바마 대통령은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미국인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칼 리처드는 『왜 우리는 로마인의 후예인가?』에서 오늘날 서구와 미국에서 로마의 유산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다각도로 제시하여 오늘도 로마의 영향력이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첫째,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했다.
19세기 영국 시인 셸리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의 후예”라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정치, 철학, 법률, 수학, 과학,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기초를 세웠다. 그리스의 기초 위에서 현대의 각 분야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의 유산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로마인들이 담당한 것이다.
중세 이후 대부분의 서구인들이 그리스 미술을 알게 된 것은 원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로마인들의 모조품을 통해서였다. 그리스의 신화도 원작자인 헤시오도스가 아니라 로마인 오비디우스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주권재민, 자연법, 혼합정체 등에 관한 그리스인들의 이론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직접 읽어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키케로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둘째, 행정과 법률 체계를 물려주었다.
로마인들은 행정의 천재였다. 제정시대에 행정 조직은 작았지만 로마의 속주 행정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1세기에 제국을 관할하는 로마의 행정 부서는 관리가 150~350명에 불과했다. 이집트처럼 중요한 속주에도 파견된 관리는 인구 1만 명당 1명이 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과거 공화정시대와는 달리 제국시기에 관리들은 급여를 받았고, 1년 넘게 현지 근무를 하면서 전문성을 높였다. 또한 로마법은 세계 각국의 법체계에 영향을 주었고, 우리나라의 법도 로마법의 영향을 받았다.

 

셋째, 시와 산문 등 로마 문명은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로마 고전 문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키케로다. 키케로가 남긴 106편의 연설문 중 현재 56편이 전해지고 있으며, 900여 편의 편지와 수많은 정치·철학 에세이를 남겼다.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는 “연설과 편지글, 품행 수련을 위해서는 키케로를 연구하라”고 권했다. 미국의 18세기와 19세기 정치인들은 키케로의 연설을 벤치마킹했다. 존 애덤스는 2대 미국 대통령이 된 후 말년에도 키케로에 대한 예찬을 멈추지 않았고 키케로의 가치를 극찬했다.

 

넷째, 로마 공화정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역사가들의 영향이다.
많은 역사가와 정치가들은 로마 공화정을 이상시하지만 로마 제정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이는 로마 역사가인 리비우스와 타키투스의 영향이다. 리비우스(기원전 59~서기 17)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을 극찬하면서도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타키투스(서기 56~120)는 가장 위대한 로마 역사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라이벌이 될 만한 사람은 모조리 제거해버린 잔혹한 인물이라고 혹평했다. 반면 네르바 황제와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며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연대기』와 『역사』라는 걸작을 남겼는데, 두 작품에서 로마의 도덕성의 타락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도덕의 타락은 공화정 말기에 시작하여 제정기의 황제들 치하에서 가속화되었다. 즉, 로마의 윤리도덕의 쇠퇴가 황제들을 낳았고, 황제들이 다시 도덕의 쇠퇴를 촉진했다는 것이다.


타키투스는 “심정적으로는 공화정을 지지했지만, 이성적으로 당시의 제정 체제는 피할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황제들에 대해서는 거친 비판을 쏟아놓았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타키투스를 어떤 작가보다도 많이 인용하면서 “타키투스는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는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타키투스는 가장 철학적인 역사가”라며 『로마제국 쇠망사』를 타키투스가 서술을 멈춘 시점에서 시작하여 역사가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시했다.

 

미국의 건국자들이 로마식 공화정을 높이 평가하고 전제정치를 비판한 것은 로마 역사가들에게 배운 것이다. 미국은 국회의사당을 로마식으로 건설했다. 국회의사당을 U.S. Capital이라고 하는데 Capital은 바로 로마의 중심지인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미국의 상원의원도 로마의 원로원을 뜻하는 Senatus에서 유래했다.


또한 달력에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이 남아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그 밖에도 토목과 건축, 철학, 희극과 풍자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몽테스키외는 “아무도 로마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17
  • 기사입력 2018년09월26일 17시26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