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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연료를 지옥의 연료라고 함부로 탓하지 말아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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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5년12월15일 21시06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17시46분

작성자

  • 이덕환
  •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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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연료를 지옥의 연료라고 함부로 탓하지 말아야

 

  석탄·석유·천연가스와 같은 화석연료가 내뿜는 이산화탄소에 의한 전 지구적 온난화가 기후를 변화시키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대량의 화석연료를 생산·운반·저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파괴와 사고도 감당하기 어렵다. 화석연료 때문에 국제 경제와 정치가 엉망으로 뒤엉키기도 한다. 화석연료의 생산이 줄어들어도 문제가 되고, 넘쳐도 문제가 된다. 그래서 화석연료를 ‘지옥의 연료’라고 부르는 전문가도 있다.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도 지옥의 연료에 의한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화석연료는 대략 3억 년 전 지구상에 살던 생물이 한꺼번에 땅 속에 묻혀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석연료가 지구환경을 망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산화탄소를 내뿜었던 적도 없었고, 심각한 사고를 일으켰던 적도 없었다. 물론 화석연료가 스스로 나서서 국제 정치와 경제를 뒤흔들어놓았던 적도 없었다. 대부분의 화석연료는 지하 깊은 곳에 평온한 상태로 조용히 묻혀 있었을 뿐이다. 그런 화석연료에 관심을 가진 인간도 많지 않았다. 적어도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기 후반까지는 대체로 그랬다.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의 핵심은 석탄을 기반으로 하는 연료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일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채취·운반·저장도 어려웠고, 연료를 연소시키는 일도 쉽지 않았다. 더욱이 석탄을 잘못 사용하면 맹독성의 일산화탄소가 쏟아져 나와서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석유와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일은 석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석유의 경우에는 대규모 정제 시설도 필요했다.

  화석연료가 처음부터 골칫거리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원동력이었다. 석탄을 사용하는 증기기관 덕분에 교통과 생산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인력이나 가축의 힘에 의존하던 농경 사회에 산업화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삶의 질이 몰라보게 향상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발전의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오늘날 70억의 인구가 인류 역사상 가능 풍요롭고, 편리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고, 평등한 삶을 살게 된 것은 온전하게 화석연료의 덕분이었다.

  그런 화석연료가 골칫덩어리로 변해버린 것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 1952년 ‘런던 대(大)스모그’가 최초의 사건이었다. 사실 런던은 14세기부터 석탄 검댕에 의한 스모그로 몸살을 앓아왔다. 석탄 연료의 사용을 금지하려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 연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500년 이상 석탄을 연료로 사용한 탓에 런던의 건물은 대부분 시커먼 석탄 먼지로 뒤덮여 버렸다. 석탄 검댕으로 누렇게 오염된 런던의 공기를 '완두콩 수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1952년에는 나흘 동안에 무려 4000여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화석연료에 대한 비난이 도를 넘어서기도 한다.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려버린 중동발 테러도 화석연료 때문이라는 어느 언론학자의 지적이 대표적이다. 복면으로 자신의 정체를 가린 이슬람국가(IS)가 전 세계를 무대로 복면을 쓰고 무차별 학살, 인질 참수, 인신매매 등의 참혹한 반(反)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이 석유 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적은 중동의 불안한 정세를 극도로 왜곡하는 것이다. 중동의 불안정한 정세와 IS의 악행이 모두 석유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동의 모든 이슬람 국가를 무작정 폄하해서도 안 된다. 2천 년 이상 묵은 중동의 종교적·인종적·정치적 갈등은 석유와 무관한 것이다. 석유가 사라진다고 중동의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유럽 빈민가의 이슬람계 청년들을 위한 사회통합 정책과 중동의 빈곤 청소년에 대한 교육훈련 지원을 강화해서 잠재적 IS 전사를 줄이도록 해야 한다는 유럽 지식인들의 인도주의적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화석연료에 의한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을 포함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글로벌 이슈는 사실 화석연료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공연히 화석연료를 의인화시켜서 책임을 떠넘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무거운 책임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환경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어야 했고, 화석연료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했어야만 했다. 화석연료의 무절제한 남용이 환경과 우리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진작 깨닫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무지를 탓해야 한다.

  태양광·풍력·수소·바이오매스와 같은 대체 연료에 대한 인식도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신재생 에너지가 ‘천국의 연료’라는 환상은 경계해야 한다. 환경에 아무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영원히 지속가능한 연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천국의 연료는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처럼 허황한 꿈이다. 우주의 어디에도 공짜가 없다. 친환경으로 알려진 신재생 에너지도 사실 환경에 적지 않은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태양광 패널을 제작하고, 설치해서 발전을 하는 과정에 필요한 에너지와 자원의 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수소는 전기와 같은 수준의 에너지 전달 수단이지 진정한 의미의 연료가 될 수 없다. 심지어 어렵게 개발한 원자력도 안심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친환경의 착각에 빠져 불필요한 낭비를 계속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화석연료를 쉽게 포기할 수는 있는 것도 아니다. 친환경적이고 안전한 대체 연료를 개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합성섬유·합성수지·합성고무와 같은 화학제품 생산에 필요한 대체 소재도 개발해야 한다. 대체 연료의 개발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물론 포기할 수는 없다. 대체 연료와 대체 소재를 개발하는 일에 훨씬 더 많은 노력과 투자가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에는 화석연료의 소비의 절약과 효율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다. 무작정 화석연료를 비난하면서 실현가능성이 분명하지 않은 대체 연료에 대한 장밋빛 환상에 빠져들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지구촌에서 인류의 생존은 절대 보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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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17시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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