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5 자만심으로 멸망한 틈새왕국, 남량(B) > News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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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8) 걸복건귀의 서성(감숙성 정원)천도(AD395)

 

천수지역을 장악하게 된 걸복건귀는 수도를 난주에서 북동쪽 100여 KM에 있는 서성(감숙성 정원) 옮겼다. 노골적으로 후량을 넘보는 행위였다. 여광은 배후를 노리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서진을 습격해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여광의 공격에 깜짝 놀란 걸복건귀는 신하 밀귀주와 막자고자의 권고를 받아들여 곧바로 아들 걸복칙발을 인질로 보내고 번국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여광은 즉시 군사를 물렸다. 여광의 군대가 군말없이 군사를 물리자 화가 난 걸복건귀는 속았다고 후회하면서 밀귀주와 막자고자의 목을 베어 버렸다.    

 

(9) 독발오고의 영토 확장과 서녕에서 염천보(청해성 해동) 천도(AD395)

 

서진의 걸복건귀가 후량을 건드렸다가 크게 치욕을 당한 AD395년 독발오고는 그 틈을 타서 을불, 절불 등의 이민족을 규합하면서 세력을 불려 나갔다. 후량이 내려 준 작위를 받음으로써 대어 들 의사가 없다는 것을 넌지시 보인 독발오고는 그러나 속으로는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리고 너무 서쪽에 치우친 서녕을 버리고 도읍지를 동쪽의 해동으로 옮겼다. 이 때 광무 사람 조생이 독발오고의 명성을 듣고 가족을 모두 버리고 달려 왔다. 어려서부터 기묘한 재주와 전략을 지녔던 천하의 영재 광무(난주 북서쪽 감숙성 영등) 사람조생이 스스로 휘하로 들어오자 독발오고가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조생을 얻었으니 큰일을 해결된 셈이오(吾得赵生,大事济矣).” 

 

곧바로 조생을 자신의 최측근인 좌사마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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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참합피 대전(AD395년 10월)

 

AD395년 겨울 황하 북쪽은 2대 강국, 즉 탁발규의 북위와 모용수의 후연이 참합피에서 건곤일척의 대전을 벌이고 있었다. 북위는 수도 성락(내몽고 자치구 화림격이)을 중심으로 지금의 내몽고와 산서성 북쪽, 그리고 하북성 서북쪽 일대의 광활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모용수의 후연은 중산(지금의 하북성 정주시)을 중심으로 하북성 전역과 산동성 일대를 장악한 대국이었다. 

 

부견의 전진이 멸망할 무렵(AD394-395) 북중국의 최강자는 모용수가 주도하는 정주의 후연과 요장이 이끄는 장안의 후진이었다. 서연은 끝내 후연에게 멸망당하고(AD394) 전진이 후진에게 흡수되었으니 장강 이북지역은 서쪽의 후진과 동쪽의 후연, 그리고 북쪽 지금의 내몽고지역의 북위가 삼국처럼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물론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북위는 후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조공을 바치는 형편이었으나 속으로는 서로 한 판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선제공격은 후연에서 먼저 일으켰다. AD385년 5월 후연의 산기상시 고호가 탁발규의 탁월한 능력을 지적하면서 전쟁에 반대했다.

  

  “ 북위는 오랫동안 우리 후연 조정과 연대를 해 왔습니다. 

    서로 은덕이 깊고 우호관계가 오래 지속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먼저 말을 요구하지만 거절하기에 

    탁발규의 동생 탁발고를 억류한 적이 있는데(AD391년) 

    잘못은 우리에게 있는데 어찌 먼저 저들을 공격하시려 합니까?

    탁발규는 절대 가볍게나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닙니다.

    태자(모용보)는 아직 젊고 가벼워서

    지금 임무를 맡기시면 분명히 북위를 가볍게 보실텐데

    만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 어떤 실수를 범할지, 

    어떻게 폐하의 위엄을 손상시킬지 예측이 불가능 합니다.

    이 점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후연 황제 모용수는 고호의 충심어린 고언에도 불구하고 격노하면서 그를 파직시키고 예정대로 출병했다. 황태자 모용보와 모용린 등에게 8만 군사를 붙이고 이어서 모용덕에게 2만 군사를 주어 북위가 장악하고 있는 포두지역을 공략하였다. 

 

북위에서는 장곤이 탁발규에게 이런 전략을 세우자고 했다.

 

  “ 후연이 AD392년 적위라는 나라의 수도 활대를 공략하고 AD394년에는 서연의 

    장자를 이기고 나서 매우 자만해졌습니다.

    연전연승의 기세를 몰아서 물자를 모으고 군사력을 증강시켜서

    우리를 가볍게 넘보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피폐한 척, 약한 척하여 저들의 경계심을 한껏 풀어 헤쳐 

    더욱 교만하게 한다면 이기는 것은 쉽습니다.“

     

탁발규는 장곤의 말이 옳다고 믿고 모든 부락과 가축을 서쪽으로 천리 가량 옮겼다. 그리고는 사신을 허겸을 요장의 후진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은밀히 군사들을 진군해 오고 있는 후연의 배후에 매복시켜 후연군대와 조정의 연락을 끊고 중간에서 연락병사들을 모조리 사로잡도록 시켰다. 

 

연락이 두절되자 조정에서는 전장에서의 정보가 끊겨 불안해졌고 전장에서는 병들고 늙은 황제 모용수의 건강상태를 몰라 전전긍긍하였다. 탁발규는 포로 몇 명을 모용수에게 보내 이렇게 물었다.

 

  “ 네 아버지가 이미 죽었으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어찌 돌아가지 않고 패륜을 범하는 것이냐?“

 

후연의 술사 근안도 모용수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 하늘의 때가 불리한 것 같습니다.

    크게 패할 것 같으니 빨리 재난을 피하는 것이 상책인 것 같습니다.“

 

모용수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근안이 이렇게 외쳤다.

 

  “ 우리 모두 들판에 버려진 시체가 될 것이다.

    시체마저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

 

조왕 모용린은 태자 모용보의 친동생이지만 모용린의 부장들은 모용보를 제거하고 모용린을 세우는 반란을 획책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자 태자 모용보는 모용린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모용린의 반란 계획이 사실대로 드러났고 반란의 주동자 모여숭이 주살되었다. 관련된 증거가 부족하여 동생 모용린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의심은 이 때부터 싹텄다. 모용보는 즉각 군사를 포두 동쪽의 참합피(양고, 산서성 대동 북동쪽)로 물렸다. 

 

이 때 큰 삭풍이 불어 닥쳐 군막을 덮쳤다. 지담맹이라는 사람이 모용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북위 군사가 들이 닥칠 징조 같습니다.

    서둘러 군사를 보내 방어대책을 강구해야 하겠습니다.“

 

모용보는 북위 군사가 가까이 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담맹이 재촉하자 곁에 있던 조왕 모용린이 그를 이렇게 꾸짖었다.

 

  “ 전하께서는 귀신같은 무력과 군사로 

    사막을 족히 가로질러 갈 수 있는데

    저런 새카만 색로들이 어찌 우리를 따라 오겠는가.

    지담맹이 자꾸 망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목을 베어 서울로 돌려보내야 겠구나.“

지담맹도 지지 않고 이렇게 대꾸했다.

 

  “ 전진의 부견이 백만의 대군을 가지고도 

    회남에서 패배한 것은 

    무리가 많음을 믿고 철저히 적을 가볍게 보면서 

    하늘의 천도를 믿지 않은 때문입니다(正由 恃众轻敌,不信天道故也)“

  

모용보의 사도이자 모용보의 삼촌인 모용덕도 모용보에게 지담맹의 말을 듣기를 권유하자  모용보는 마지못해 군사 3만을 나누어 모용린에게 부어 후방으로 보내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탁발규는 2만 기병을 보내 두 배나 빨리 모용보의 군대를 추격했다. 탁발규의 기병대는 세 갈래로 나누어 참합피의 모용보 군사를 포위하였다. 후연의 군사는 대패했으며 태자 모용보만 겨우 빠져나갔다. 참합피 대전이다.(AD395년 10월) 전쟁에 패한 황제 모용수는 격노했고 그 다음해 토벌군을 이끌고 직접 참합피까지 다시 출병했다가 산처럼 쌓인 아군의 해골을 보고 충격을 받아 결국 피를 토하고 병사했다.(AD396) 이 때 모용수 나이가 71세 였다. 태자 모용보가 42세 나이로 황제가 되었으나 그는 아둔하였고 또 무능하였다. 그의 아들 모용책 또한 무능하였으므로 죽기 전에 모용수는 모용책 대신 모용회를 황태제로 봉택하기를 원했으나 모용보는 자신의 아들 모용책을 태자로 결정했다.(AD396) 태자책봉에서 밀린 모용회는 나중에 모반을 꾀하게 된다. 참합피 대전 이후 후연의 국력은 급격하게 쇠락하고 반면 북위는 중심 세력을 성락(화림격이)에서 남쪽 산서성 태원과 하북성 정주까지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1) 여광이 대량 천왕에 즉위(AD396)

 

AD396년 삼하왕 후량의 여광은 천왕에 즉위하면서 국호를 대량이라고 불렀으며 백관을 설치했다. 다음해 (AD397년)에는 여연과 여찬을 보내 수시로 배반하는 서진의 걸복건귀를 토벌했다. 걸복건귀의 무리들이 지난 번 빼앗은 동쪽지역을 포기하고 성기로 돌아가자고 권했다. 걸복건귀가 말했다.

 

  “ 군대에서 승패는 얼마만큼 교묘하냐에 있지

    군대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광의 군대가 크기는 하지만 무법천지일 뿐이며

    그 동생 여연은 용맹하기는 하나 모략이 없으니 겁먹을 것이 없다.

    또 그의 정병이라는 것이 모두 여연 휘하에 있으니 

    여연이 패하면 여광도 결국 스스로 도망가고 말 것이다.“    

   

여광의 군대는 여찬의 기병 3만과 함께 합류하여 서진의 수도 금성(난주)를 공략했다. 걸복건귀가 2만 군사르 보내 구언했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여찬에 의해 금성은 함락되었다. 여연은 기세를 몰아 임조, 무시, 하관을 모두 뽑았다. 걸복건귀가 사람을 보내 자신의 무리가 궤멸되어 성기를 포기한다고 말하게 했다. 여연은 걸복건귀를 사로잡고 싶어서 즉시시 경기병과 함께 걸복건귀를 추격했다. 사마 경치가 걸복건귀의 간계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으나 듣지 않고 추격하다가 매복에 걸려 여연은 전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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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09 17:00:00 최종수정 2019-05-09 10: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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