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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의 ‘은행 CEO 선임 절차 혁파’ 천명에 거는 기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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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2월09일 14시11분
  • 최종수정 2023년02월10일 08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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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은행 CEO 선임 절차를 발본 개혁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이어서 금융 관련 정책 및 감독 책임자들도 나서서 ‘주인 없는’ 금융기업의 지배구조를 혁파하고 은행 산업의 선진화를 이루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는 우리 사회에 오랜 동안 쌓여온 고질적 병폐이자 주요 개혁 과제의 하나이지만, 좀처럼 행동에 옮기지 못했던(않았던?) 지난한 개혁 화두를 과감히 던진 것이다.

 

사실, 역대 정권은 취임할 때마다 은행 CEO 선임 절차를 개혁하겠다고 다짐했으나 시간이 좀 지나면 오히려 이 꿀단지들을 품어 안고 즐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지가 무디어지기 일쑤였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은행의 CEO 등 최고경영층 선임 절차를 개혁하고 글로벌 스탠다드의 선진 거버넌스를 확립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만시지탄이나 우리 금융 선진화를 위해 크게 환영해야 할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과거 선례를 보면 은행 등 금융기업의 ‘공정한’ 지배구조를 구축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어서 앞으로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그렇다 해도, 이는 많은 국민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이기도 하고, 은행들 스스로도 이번이야 말로 구래의 악습을 버리고 치욕적 평가를 받던 후진성을 벗어나 선진국 수준에 걸 맞는 금융 시스템 확립을 이룩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재삼, 대통령의 은행 거버넌스 혁신 선언을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아래에 몇 가지 간단한 소견을 피력한다. 

 

■ 정부 허가를 받은 독과점 기업에 ‘규제와 감독’은 옳고 필요하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친숙하게 이용하는 곳이 은행이지만 이들이 경제 내에서 수행하는 역할이나 업무 절차를 속속들이 살펴보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은행이라는 조직이 작동하는 일련의 절차나 체계가 대단히 복잡하고 까다롭기 그지없다. 그런 점에서도 이를 이용하는 일반 대중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은행들의 전반적인 경영 상황이나 영업 활동을 감시 감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별 은행들도 나름대로 각종 업무에 관한 내부 규정이나 지침을 웬만한 법전 몇 권을 합친 것만큼이나 방대하고 꼼꼼하게 정해 놓고 있다. 

 

이처럼 정부가 은행에 대해 엄정하게 규제 감독하는 것은 한 나라 경제에서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이 다른 영역에 비해 그만큼 중대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좋은 예로, 일반 고객들은 일상 경제 활동에서 별다른 의심없이 자기가 선택한 은행에 돈을 맡기고 있으나, 실은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거래 형태이다. 이들은 소중한 재산을 은행에 예금으로 맡기면서 해당 은행에 그 흔한 지급보증이나 담보를 요구하는 법이 없다. 일부, 공적 예금보험 기구의 지급보증이 있으나, 이는 은행이 파산할 경우에 일부 돌려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고객들이 은행을 믿고 거래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정부의 엄격한 인허가 및 감시 감독을 무한 신뢰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유 경쟁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어느 선진국이라고 해도 은행 산업의 시장 진입, 영업 활동 및 탈퇴를 자유로운 경쟁 하에 놓아두는 나라는 없다. 오히려 선진국일수록 각급 감독 기관의 감독 업무는 더욱 철저하고 엄격한 것이 특징이다.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면, 연준(FRB)의 통화정책 관련 법령 준수 여부에 대한 감독,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여신 등 형태의 자산 건전성 감독, 심지어 영업을 허가한 행정부 차원의 노동 법규 준수 여부에 이르기까지 상시 감독을 받는 게 상례다. 

 

그러니, 혹여 정부 당국이 자신들이 허가해 준 독과점 형태의 은행들에 대한 감시 감독을 게을리하거나 방임하는 날에는 그에 따른 위험은 고스란히 해당 고객들 부담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수시로 보도되는 대형 창구 사고나 경영층의 배임 행위 등은 은행의 신뢰를 떨어뜨려 예금 고객들의 자산을 위태롭게 할 것은 당연하다. 최악의 경우에 은행 경영이 파탄되는 경우에는 정부 혹은 중앙은행이 ‘최후의 대출자(Lender of last resort)’ 로서 손실을 부담하게 되고, 이는 궁극적으로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보전될 뿐이다. 따라서, 이런 ‘공공성’ 측면에서 각국 정부는 항시 엄격한 감독 시스템을 갖추고 은행의 일상 업무를 감시 감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자유시장 경제를 지향한다 해도 정부가 은행 시장 진입을 규제해서 사실상 ‘독과점’ 형태가 되는 은행 산업에 대해 철저하게 규제하고 감독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은 과연 정부가 왜, 무엇을 감독해야 하는가를 명확히 분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금융 서비스 소비자들의 이익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은행이란 기본적으로 개인 집단의 영리를 추구하는 사적 기업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부 당국은 은행 감독에 임해서는 당연히 규제할 곳은 엄정하게 규제하고, 개입하지 말아야 할 곳은 절대로 발을 디뎌 놓아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전제하고 싶다. 실제로는 이와는 정반대로, 해야 할 것은 게을리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열중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 “은행의 본령(本領)은 사람에 있고, 공고한 기반은 여기서 나온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IMF 위기’ 라고 부르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상황을 되돌아보면, 당시 우리나라 은행 산업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재편이 일어났다. 기업 금융을 전담하며 산업화 시대를 이끌어 왔던 ‘5대 시중은행’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은 끝에 대부분 줄줄이 도산하거나 타행에 합병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안타까운 일은, 이들 은행들이 내부에 축적했던 각종 무형의 영업 노하우 및 자산을 후발 은행들에 온전히 전수, 계승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려보낸 것이다. 

 

흔히, 은행 일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쉽게 치부하지만 이는 천만 부당하고 가벼운 인식일 뿐이다. 은행 업무는 단순히 겉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이 보이지 않는 후방 영역에서 시스템적으로 이뤄진다. 대출 등 자산 운용을 위한 의사결정 시스템이 그렇고, 서비스 마케팅 분야도 일반 제조, 판매 영업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과학적인 기술을 요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다름 아니라 은행이라는 거대 조직의 각 구성원들의 두뇌 속에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은행의 요소(要素)는 사람에 있고, 사람의 본령(本領)은 의지의 공고(鞏固)함에 있고, 의지의 공고함은 불발(不拔)의 신념에 있고, 건전한 경영의 반석(磐石)의 기초는 여기서 나온다.” 이는 이웃 일본의 경제 부흥 초기에 은행업에 종사했던 한 선각자가 남긴 ‘은행경영척어(隻語)’ 라는 저서 중에 나오는 한 경구(警句)이다. 이는 시대를 가릴 것 없이 은행 경영의 제일의(第一義)의 진수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늘날 은행 영업이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국경을 넘나들며 광범한 대중을 대상으로 영위되는 ‘중개’ 역할이라는 점에서 어느 산업 분야보다도 제공하는 서비스의 ‘수용’ 범위가 넓다. 한편, 유동성이 큰 ‘현금성 구매력’을 대상으로 삼아 수요/공급 측을 중개하는 점에서 영향력이 지극히 즉발적이다. 이런 특성에서 글로벌 금융시장을 지구 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시장으로 여긴다. 따라서, 은행 경영 책임을 위임받은 대리인(Agents)들이 상시, 얼마나 능동적으로 시대적 요구에 즉응하는 첨단 시스템을 창출하고, 미래지향적이고 탁월한 비전을 담은 경영 방침을 제시하는지가 은행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 바로미터가 된다. 한 외국 전문기관은 새로운 IT 혁명 시대에 은행 CEO들에 요구되는 기본요건을 재능(Talent), 혁신(Innovation), 리더십(Leadership), 투명성(Transparency) 등 4가지로 제시하기도 한다.  

 

■ 새로운 IT 혁명 시대에 가장 먼저 도전에 직면할 운명의 은행들


여기서, 잠시 현재 은행 영업 환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글로벌 규모의 첨단기술 혁신 경쟁을 돌아보면 실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가장 첨예하게 떠오르는 화두는 역시 ‘정보통신(IT),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을 누가 앞서서 효율적으로 도입하는가, 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ChatGPT’라는 새로운 브랜드의 출현 등으로 ‘생성형 증강현실(AR)’ 개념의 도입 논의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어, 일반 제조업 분야는 물론, 로지스틱스, 엔터테인먼트 등 서비스 비지니스 전반에 혁신과 변화의 바람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은행 경영에 바로 이런 첨단기술 진보의 결과를 어떻게 도입 적용해서 경영 혁신을 이룰 것인지가 최대의 과제로 부상하는 중이다.

 

지난 달 열렸던 2023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IT, AI 기술 진보로 글로벌 사회 각 분야에 엄청난 변혁이 예상된다는 것이 화제로 등장했다. 구체적으로 향후 2030년까지 전세계에서 8,500만명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추산도 내놓고 있다. 물론, 새로운 첨단기술 분야에서 상응하는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임은 당연하다. 한편, 이전부터 많은 전문가들은 새로운 IT 혁명 시대에 ‘가장 먼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분야의 하나가 바로 은행 산업이라고 예견한다. 이는 앞으로 은행 경영에 첨단기술 중심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수라는 경고인 것이다.  

 

주요 은행 가운데, AI 기술 도입을 통한 경영 혁신에 가장 앞서간다고 알려지는 JP Morgan & Chase 은행은 일찌감치 고객 서비스 혁신과 경영 체제 변환을 선도하기 위해 AI, AR 등 첨단기술 도입에 주력해 왔다. 최근에는 그룹 내 모든 기업들에 일관하는 맞춤형 AI 중심의 서비스 제공 체제 구축을 위해 매년 140억달러라는 엄청난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단순한 일회성 투자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꾸준히 이어온 경영 혁신 과정의 연장으로 이를 더욱 가속한다는 방향 설정이다.

 

이처럼, 선진 은행들은 모바일 및 인터넷 뱅킹을 비롯한 전 업무 영역에 첨단기술을 적용하는 방식의 솔루션을 추구한다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창조적(파괴적) 혁신’을 추진 중이다. 결국, 이런 글로벌 선발 은행들은 동종 분야의 타행들과 경쟁을 넘어서, 향후 먼 장래에 나타날 고객 수요 변화에 대비해서 실리콘 밸리 Big Tech 기업들과 경쟁하며 첨단 기술을 ‘산업화’ 하는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이에 더해, 최근 ‘생성형 AI(generative AI)’을 적용한 상호 대화형 AI 기술 등, 첨단 기술을 실제로 은행 업무 혁신에 도입하려는 플랜을 앞다투어 추진하는 중이다. 

 

이러한 ‘대변혁’의 시대에는 어느 분야에서나 대체로 두 가지 부류가 나타나게 된다. 하나는 빠르게 흘러가는 대세에 맞추어 담대한 자기혁신을 선도하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대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낙후되어 사라지고 마는 그룹이다. 이런 거대한 기술 변화의 흐름 속에서 선진 은행들은 지금 조직의 생잔 여부를 걸고 첨단기술 기반의 ‘창조적 혁신’에 혈안이 되어 있고, 실제로 우량 Fintech 스타트업 기업들과 긴밀한 협업 체계 구축을 위해 불꽃튀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 은행들도 마찬가지로, 첨단기술 시대에 맞추어 조직의 명운을 건 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할 절체절명의 시기에 당도한 것이다.

 

또 하나, 최근 떠오르는 글로벌 경영과 관련한 주요 화두 중 하나가 기후 변화 대응 필요성을 배경으로 대두되는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변환 과제이다. 이런 추세는 실제로 관련 투자액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글로벌 지속가능 투자액은 30억달러에 이르고 있고, 이는 2014년에 비해 68%가 늘어난 것이고, 2004년에 비하면 무려 1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보면 이제 은행 산업을 포함한 글로벌 기업 경영 관점에서 ESG 변환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 흐름이자 제일의 모토가 되고 있다. 한편, McKenzie사는 향후 기업들의 ESG 경영 변환을 실제로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할 주체가 바로 은행들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금융 지원 채널을 통해 기업들에게는 고통스러울 수 있는 ESG 변환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제안이다. 이 또한 은행 경영 책임자들 및 투자자들이 은행 조직의 중장기적 성공을 위해 각별히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될 필수적 명제이다.

 

■ ‘사외이사’ 선임과 관련한 원초적 모순을 혁파하는 게 개혁의 요체 


이런 엄정한 상황 속에서, 이번에 윤 대통령이 ‘은행 거버넌스 혁파’ 라는 담대한 기치를 내건 것이다. 사실 정부는 오래 전부터 금융위원회 소관으로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업 CEO를 포함한 임원 선임에 관한 절차를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을 상위법으로 해서 관련 시행령, 규정 등에 꼼꼼히 정해 놓고 있다. 친절하게도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 규준’도 만들어 은행 등 금융기업들이 이를 따르도록 권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CEO는 물론 최고경영층 후보자의 자격 요건을 조목조목 정해 놓은 것은 물론, 구체적인 선임 절차까지도 명시하는 등, 은행 거버넌스와 관련한 상세한 부분들을 꼼꼼히 정해 놓았다. 당연히, 은행 CEO를 포함한 임원추천회의에도 관여하고, 일상의 업무 관련 의사결정에도 참여하는 사외이사들을 ‘공정하고 공개된 절차를 통해 주주총회에서 선임되도록’ 정해 놓고 있다. 

 

이렇게 은행 거버넌스 구축에 필수적인 사항들에 대해 이미 상세한 법규정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이제 와서 새삼 은행 CEO 선임 절차를 혁파하고 새로운 제도 정립을 서두르겠다고 나서야 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이에 대한 진솔한 반성이 앞서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나라 금융기업들의 최고경영층 구성에 현직 CEO 혹은 일부 외부 세력이 아무 거리낌없이 셀프 추천, 셀프 선임이 이루어질 수 있는 풍토가 만연되어 있는 점이 만병의 근원이 아닐까 한다. 은행 최고경영층 구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사외이사 선임에 현임 CEO가 자기 이해 관계에 따라서, 때로는 정치 권력의 영향력 하에, 선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문제의 원천이라고 본다. 이런 풍토에서 선임된 사외이사들은 자연스레 현직 CEO의 친위 조직이 되기 십상이고 결국은 ‘너 좋고 나도 좋은’ 짬짬이 인사에 더해, 일상의 업무 관련 의사결정에서도 ‘이너 서클’ 내부에서 암묵적 결탁이 횡행하게 되는 법이다. 이것이 자고로 방치되어 온 것이다. 

 

이와 연관된 사안이지만, 지금 또 다른 문제로 떠오른 이사회의 CEO에 대한 ‘견제와 감시’ 기능 부전(不全) 상황의 실마리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좋은 참고가 될 만하다는 생각이나, 최근 어느 금융지주 사외이사 한 분이 임기를 앞두고 사임했다는 뉴스가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의 사임 배경을 들어보면 지금 우리 은행들의 사외이사 제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잘 간파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사외이사에 주어진 견제, 감시라는 본연의 역할이 벽에 부딪쳤던 것으로 보인다. 실은 이 사외이사가 최근 모종 안건 심의 과정에서 반대 의견을 냈다는데, 어이없게도 이것이 이 회사가 최근 개최한 8차례 이사회에서 나온 유일한 반대 의견이라는 전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더 이상 무얼 알아볼 필요도 없다. 그러니 지금 은행, 금융기업 사외이사들이 ‘거수기’, ‘고무도장’ 평을 듣는 것이다.  

 

이런 악습이 누대로 이어져 오고 있으나, 우리 감독 당국은 짐짓 눈을 감고 방치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져도 지울 수가 없다. 자신들이 적발한 부정, 불법 행위에 연루된 인사들이 엄연히 공지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이들이 연임도 하고 3연임도 하는 한심한 과정을 목도하면서 아무런 제재나 저지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이런 악습이 고착된 조직 내에서는 1인 황제 경영이 굳어져서 조직 내부에는 이에 저항하려는 용기를 내기도 어려운 공포 분위기가 형성되어 도무지 말로 옮기기도 어려운 만행이 서슴없이 저질러 지기도 하는 것이다.   

 

■ 이사회가 은행 ‘이해당사자들’을 고루 대표하게 하는 것이 첫걸음  

 

또 하나, 은행 거버넌스 혁신과 관련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은행들의 주주 구성 문제이다. 지금처럼 외국인 지분이 평균 50%를 넘나들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70% 전후에 달하는 상황에서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현임 CEO의 ‘1인 전횡’이 자행될 좋은 여건을 마련해 주는 꼴이 되고 만다는 점이다. 외국인 주주들은 대체로 은행의 중장기적 성장을 위한 플랜이나 투자에는 별반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그저, 단기 주가 상승이나 고율 배당을 누릴 욕심으로 단기간 주식 매입에 열중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의 외국인 주주 비중이 높을수록 현직 CEO는 이들 입맛에 맞춰 배당률을 높여주는 대신 이들의 동의 하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외이사들을 어렵지 않게 선임할 수 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최근 은행 등의 투명한 거버넌스 구축과 관련해서 ‘공공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윤 대통령도 ‘은행들이 공공재(公共財) 측면이 있어 투명한 거버넌스를 구성하는데 정부가 관심을 갖는 것은 관치(官治) 문제가 아니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는 어디 하나 틀림이 없는 올바른 판단이다. 그러나, 제도를 마련하는 것과 실제로 그 제도에 입각해서 조직을 만들어 내고 사람을 선임하는 것은 전혀 별개 문제이다. 여기서 엄격한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혹여, 정부가 제도를 마련했으니 그 제도 하에 있는 사기업 경영층도 우리가 꽂아 넣겠다는 발상이 있다면, 그게 바로 정부가 지금 혁파하고자 하는 대상일 뿐이다. 쉬운 말로 이게 바로​ ‘도로아미타불’이란 것이다. 정부는 은행들이 따라 걸어갈 물길을 그어 놓으면 그만이고, 거기서 각 은행들이 어떻게 독창성을 가지고 경영해 나갈 것인가는 오롯이 은행이란 조직 고유의 몫일 뿐이다.

 

정부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일부 국책은행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우리나라 은행들은 지분 소유가 꽤 잘 분산되어 있는 편이다. 따라서, 은행 경영의 주체는 이들 주주들(shareholders)을 포함해서 은행이라는 조직의 운영에 실제로 종사하는 구성원들, 거래 고객들, 투자자 등 많은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s)의 이익을 고루 대변하는 구조가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이들이 주주총회라는 상법 상 정해진 최고 의결 기구의 운영 절차에 따라 CEO를 포함한 최고경영층을 선임하게 하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하등 지분도 없는 정부가 은행 최고경영층 선임에 관여하면 그야말로 부당한 처사일 뿐 아니라 다른 이해당사자들의 이익을 공연히 침탈하는 결과가 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우리는 자주 ‘주인 없는’ 기업이라고 말하나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식이다. 길가에 서있는 돌덩이도 다 주인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거대 자본의 은행에 어찌 주인이 없을 수 있을까? 다만 흩어져 있어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이들 이해관계자 그룹들이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상호 세력 균형을 이루도록 보장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아무런 지분도 없고, 권한의 위임도 받지 않은 정부 혹은 권력자가 은행 CEO 선임 절차에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이는 단순히 위법한 행위이자 ‘공정과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지금, 정부는 이런 악습을 폐절하자고 천명하고 있으니 오롯이 자기모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은행들에 쌓여온 적폐의 근원이 바로 이런 부당한 인사 개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스스로 엄중히 근신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런 관행이 계속되는 한 은행에 한 자리 차지하려는 인사들은 여전히 권력 주변을 서성일 것이고, 필시 경영 혁신이라는 화두는 일찌감치 멀어지고, 타락한 권력과 유착돼 경영을 망치기 일쑤다. 이들의 뇌리에는 자신의 자리 보전을 위해 계속 권력에 줄을 대고 있으면 그만이지, 구태여 어렵고 엄청난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는 ‘파괴적 혁신’ 노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은행 스스로 강인한 독보(獨步) 정신을 갖추고 독립 노력을 해야”


우리 은행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정부 주도의 산업화 시대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신고의 부침을 거듭한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정부가 경제 운용의 한 방편으로 은행들을 활용하기 위해 국가가 직접 소유하고 은행장 등 최고경영층을 임명하는 등 형태로 전담해서 경영한 적도 있었다. 이런 습성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많은 은행들이 민간 기업으로 변환한 이후에도 여전히 은행 최고 경영층 선임에 정부 또는 권력층의 입김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게 현실이다. 

 

여기서 일본의 어느 지방은행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한 선대 회장의 일화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일본 정계를 주름잡아 금권 정치의 대부라고 불리던 다나카(田中角榮) 총리가 대장성(大藏省) 대신이던 시절에 시즈오카현의 지방은행인 시즈오카은행(靜岡銀行)의 히라노(平野繁太郞) 회장을 집무실로 불러, 지금 우리네 ‘모피아 낙하산’ 격으로, 대장성 관료 한 사람을 채용해 줄 것을 부탁하자, 히라노 회장은 즉석에서 ‘아무리 대신의 부탁이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나왔다. 그 뒤에 다나카 대신은 히라노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전의 결정을 재고해 달라며 다시 한번 똑같은 ‘낙하산 인사’ 청탁을 했으나 히라노 회장은 이를 끝내 거절했다. 

 

무언가 되는 나라의 기막힌 사정은 그 뒤에 일어났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철권을 휘두르던 다나카 대신은 얼마 후 히라노 회장을 만나서 “한결같은 정신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라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은행에는 낙하산 인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전통이 사시(社是)처럼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지방은행의 독립독보(獨立獨步)의 정신을 지켰던 히라노 회장의 강골의 경영 철학이 그대로 은행 경영의 공고한 기반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은행은 1990년대 후반에 불어 닥친 아시아 금융위기 때 모든 일본 은행들이 부동산 버블 붕괴로 부실 채권이 산처럼 쌓여 신용 등급이 급전직하하고 파탄에 직면했을 당시 Moody’s社로부터 일본 유일의 최고 ‘B’ 등급을 받았던 은행이다.만일,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 결과가 어찌됐을지는 구태여 여기에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윤 대통령이 은행 CEO 선임 과정을 발본 개혁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 보인 것은 ‘공정과 상식’을 표방한 정권으로서는 당연히 서둘러야 할 중대 과제이기도 하다. 한편, IT, AI 첨단기술 진보에 따른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에 걸 맞는 선진 은행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도저히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과제라고 할 것이다. 과거 누대 정권들이 은행 거버넌스 개혁에 이처럼 공공연한 의지를 드러낸 적이 없던 것으로 기억된다. 만시지탄이나 다시 한번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이제 3월 말이 가까워 오니 은행들의 주총 시즌 개막에 맞춰서 벌써부터 은행 CEO 등 최고경영층 선임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 소문들이 무성하게 흘러나온다. 그리고, 은행 CEO 선임 때마다 내부 승진이냐 외부 영입이냐 하며, 일종의 부질없는 영역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에 권력 주변을 기웃거리던 전직들을 포함한 많은 ‘유력’ 인사들이 가세하며 점입가경을 이룬다. 경천동지할 개벽이 열리지 않는 한 올해에도 그리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지난 수 십년을 그렇게 되풀이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은행 CEO 선임 절차 혁파를 천명한 윤 대통령 입장에서 지금 우리 은행들이 처한 격변하는 국내외 경영 환경 및 시대적 요구를 깊이 성찰한다면 감히 그런 나태하고 타락한 관습을 답습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으로 본다.  

 

한 마디 첨언하자면, 은행들이 아무리 ‘공공재적’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이고, 그래서 정부의 규제와 감독을 받는 것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 은행 조직에는 직접 이익을 기대하는 주주들을 비롯한 다양한 ‘이해당사자’ 집단들이 결집해 있다. 따라서, 이들 다중의 집단들이 자기들 이익을 충실하게 지켜줄 경영 체제를 형성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 또한 정부가 해야 할 책무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유능한 감독자라도 코트 밖에서 선수들을 지휘하는 것이지 자신이 코트에 뛰어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옛적에 들판에 나선 어느 현자가 제자들에게 “왜 여기 풀들은 모두 누워있는가?” 하고 물었다. 옆에 있던 제자가 이르기를 “바람이 잦아들면 누워있는 풀잎은 저절로 일어설 것입니다”. 

 

과거 누대에 걸쳐 누적돼 온 불온 부당한 은행 산업 내의 악습을 어느 정권도 시도하지 못했던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불식한 뒤에 조금이라도 자기 입맛에 맞는 인사들을 밀어 넣을 속셈으로 비쳐진다면 이는 당초에 개혁 얘기를 아예 꺼내지 않았던 것 만도 못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더 큰 후과(後果)를 불러올 것은 자명하다. “개혁은 스스로 개혁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는” 법이다. 이는 지금 은행 CEO 선임 절차를 발본 개혁하려고 나서는 모든 이들은 한 치도 흔들림 없이 가슴에 새겨야 할 명제이다. 내친 김에, 지금 착수하고 있는 은행 CEO 선임 절차 혁파라는 국부적 개혁을 성사한 뒤에는, 보다 광범한 시야에서 은행 시스템 전반을 전면 재구축하는 수준의 총체적 개혁도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큰 틀의 개혁은 다음으로 미루더라도 이번에는 CEO 선임 절차만이라도 ‘완선(完善)의 개혁’을 이루길 학수고대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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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2월09일 14시11분
  • 최종수정 2023년02월10일 08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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