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0> 철학자 황제는 왜 후계자 양성에 실패했을까?(서기 180~192)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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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황제와 가장 악랄한 황제.”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와 아들 콤모두스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다.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훌륭한 아들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화려한 5현제 시대는 마지막 왕인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에 의해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아우렐리우스는 전임 황제들과는 달리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아들을 망치고 로마를 쇠락의 길로 이끄는 실수를 저질렀다. 아들 콤모두스는 아버지의 금욕주의적인 성격과는 달리 무능하고 잔인하고 과대망상적이었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18세에 불과해서, 대제국의 황제 자리를 맡기에는 너무 어렸을 뿐만 아니라 자질도, 역량도 없었다. 

 

그가 황제가 되자마자 아버지가 벌여놓은 정복 사업을 포기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면서 음행과 기행의 길을 걸었다. 그는 여첩과 남첩을 300여 명씩 거느리고 갖가지 음행을 즐겼다고 한다. 또한 검투 경기에 빠져서 스스로 검투사 복장을 하고 검투사들이나 맹수들과 결투를 벌이기까지 했다. 황제가 점점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자 애첩 마르키아가 시종들과 음모를 꾸며 살해하고 만다. 

 

로마 멸망의 단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후계자 지명에 실패함으로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아우렐리우스가 실패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5현제시대에 전임 황제 4명은 아들이 없었고, 오히려 훌륭한 인재를 선택하여 양자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친아들이 있었다.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했다. 그토록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도 자식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인간적인 욕망을 거스릴 수 없었던 것이다. 

 

도널드 R. 더들리는 『로마문명사』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인간적인 결정이 가져온 결과를 냉정하게 설명했다. “마르쿠스는 2세기의 황제들 중 자신의 아들을 낳은 최초의 황제로서, 양자 상속제를 파기하고 싶은 유혹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루키우스 베루스와 공동 통치를 실험했다가 쓴맛을 보고서도, 아들 콤모두스를 177년에 아우구스투스로 만들고는 다시 그와 공동 통치에 들어갔다. 콤모두스는 역사에서 선한 사람에게 악한 아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콤모두스의 재위기간은 모든 면에서 제국에 재앙이었다. 그 재앙은 마르쿠스가 벌여놓은 정복 사업을 포기하고(그의 아버지는 이 점을 우려했다) 로마에서 방탕하게 소일했다. 번갈아 기용된 쓸모없는 측근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중 가장 유력한 자가 친위대의 지휘관이 되어 관직을 매매하는 부끄러운 짓을 마다하지 않았다.”

 

콤모두스가 걸었던 길은 칼리굴라나 네로와 흡사하다. 핏줄 덕에 칼리굴라는 25세, 네로는 16세, 콤모두스는 18세의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인기 영합주의에 편승하여 인기를 모았지만, 이는 오래갈 수 없었다. 무모한 재정 집행이 경제적인 압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재정 파탄으로 재정을 압박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시민의 인기를 잃으면서 공포정치로 돌변한다. 공포정치의 결과, 측근들의 신뢰마저 잃고 결국에는 암살당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불행한 황제들은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비극적인 종말을 맛보았다. 도널드 R. 더들리는 콤모두스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로마의 군중에 관한 한 콤모두스는 그들의 저급한 취향을 같이 누리는 자로서 일정한 인기를 누렸다. 그는 192년에 가서야 비로소 암살당했는데, 그해 첫날을 한 번은 집정관으로, 그리고 다시 검투사로서 공개 석상에 나서는 것으로 장식했다. 상황이 69년과 비슷했고, 거기다가 연속된 내전이라는 또 다른 재앙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계에 선정을 회복시켜줄 베스파시아누스(네로 황제 이후의 혼란을 극복했던 황제) 같은 인물이 없었다.”

 

여기서 영화 〈글래디에이터〉로 유명한 콤모두스의 검투사 활동과 관련하여 ‘빵과 서커스’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빵과 서커스’는 2세기 로마제국의 시인 유베날리스의 풍자시에 등장하는 말이다. 그는 민중들이 먹는 것과 오락에 매몰되어 본질적인 문제에 눈을 감는 현상을 안타까워하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빵의 제공은 그라쿠스 형제의 곡물법이 제정된 후 저소득자에게 싼값으로 밀을 공급하면서 시작되었다. 제정시대에는 황제가 빈민들에게 매월 일정량의 곡물을 무료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서커스는 권력자가 검투 시합, 전차 경기 등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검투 시합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검투사 시합은 원래 장례 의식의 일부로 시작됐다. 지도층 인사들이 돌아가신 부모나 집안 어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검투사 시합을 열었으나 인기가 높아지면서 오락으로 발전했다. 

 

검투사는 주로 사형수, 노예, 포로 등으로 구성되었다. 검투사 시합은 공화정 때부터 인기를 누렸으나, 스파르타쿠스는 반란까지 일으켰다. 제정시대에도 시민들에게 더욱 인기를 누렸다. 아우구스투스도 검투사 시합을 제공했는데, 제한을 두고 국고로 지원하도록 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검투사 시합을 금지했지만, 후임 황제들은 시민들의 인기에 영합하여 검투사 시합에 적극적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을 착공하도록 하고 검투사 시합과 각종 오락 행사를 지원했다. 

 

검투사는 목숨을 내놓고 경기에 나서지만, 이기면 엄청난 명예와 돈 그리고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유인 중에서 자진하여 검투사로 경기에 나서는 사람도 생겨났다. 검투사를 자청한 사람 중에는 콤모두스 황제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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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19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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