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3>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서기 284~305)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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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로마제국의 무정부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제국을 위기에서 구출한 인물이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다. 그는 하층민 출신으로 군인이 되어 입신출세의 길을 걸었다. 황제의 기병 근위대장을 거쳐 서기 284년에 군대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다. 황제 앞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해결 과제를 이렇게 제시한다. 

“중앙정부의 권한과 권위를 강화하고, 국경 지대를 방어하고,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 나간 속주들을 되찾고, 권좌를 찬탈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에 유리한 발판이 되는 상황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군대는 언제고 다시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황제를 옹립할 소지가 있었다.” 

 

그가 취한 우선적인 조치는 서방과 동방의 국경 지대를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군대의 오랜 동료인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통치자로 세워 갈리아에 파견하여 서방을 책임지게 했다. 처음에는 부제(카이사르)의 칭호를 주고, 다음에는 정제(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부여했다. 공동 통치자가 된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에서 바가우다이족의 반란을 진압했다. 또 신속한 육상 원정을 통해 게르만족을 갈리아에서 라인 강 동쪽으로 몰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이어서 막시미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승진시켜 황제에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의 국경이 무척 길고 몰려드는 적도 많아서 황제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로마를 동서로 나눌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동쪽에 관심이 많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현재 터키의 이즈미트)에 궁전을 짓고 동방 황제가 되었다. 반면에 막시미아누스를 서방 황제에 임명하여 밀라노를 중심으로 제국을 다스리게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서로 나뉜 대권을 다시 분할하여 두 사람의 유능한 장군을 부제로 임명하여 각각에게 동일한 권한을 주었다. 서기 293년, 네 사람이 분할하여 통치하는 ‘4분 체제’가 시작되었다. 두 황제는 각각 한 사람씩 부황제를 지명하고, 입양과 혼인을 통해 정치적인 결속을 강화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갈레리우스를,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우스를 양자로 삼고, 지금까지 함께 살았던 아내를 이혼시키고 자신들의 딸과 결혼시켰다. 

 

광대한 영토는 4명이 분할하여 통치했다.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폰투스, 이집트, 소아시아를 맡았고,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는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 모이시아(불가리아), 트라키아를 위탁받았다.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담당했고,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 에스파냐, 브리타니아를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제국은 사실상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뉘었다.

4분 체제라고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선임 황제의 위치를 갖고 있었다. 이는 제국을 넷으로 분할한 것이 아니라, 방위 책임 구역을 4곳으로 분리하여 담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사람 사이에는 서열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시니어 아우구스투스로 최상위였고, 막시미아누스는 주니어 아우구스투스로서 두 번째 순위이며, 그다음으로 부제인 카이사르의 순위가 결정되었다. 

 

4분 체제는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인격과 권위가 있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두 부황제는 두 분 정제를 지고의 권위자로 삼아 경의를 표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대해 젊은 세 동료 황제들은 공통의 은인으로서 감사와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권력을 둘러싼 질시와 의심이 털끝만큼도 없었으므로 그들의 결속은 세상에서 희한할 정도로 튼튼하였는 바, 그것을 음악으로 비유한다면 지휘자의 능숙한 리드에 의하여 오묘한 화음을 내는 4중창 바로 그것이었다.”

4분 체제가 신뢰와 조화를 이루면서 각종 개혁 조치도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조세 제도와 화폐 제도를 개선했다. 또한 동양의 전제국가의 의례를 도입하여 군주의 존엄성을 높이면서 황제 숭배를 강조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동양의 전제국가의 의례인 환관이 등장했다. 이는 황제와 신하 간의 거리 두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둘 사이의 거리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바로 환관이 맡게 된 것이다. 환관은 처음에는 관저의 집사 같은 사소한 위치에서 점점 역할이 중요해졌다. 3세기의 황제들은 병사들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않으면 살해당했다. 이제 환관의 역할은 환관정치로까지 발전하여 소위 ‘문고리 권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0년을 통치한 후 서기 305년에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하여 제국을 부제에게 물려주었다.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로마 멸망사』에서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권력 기반이 한창 탄탄하던 시점에 자발적으로 은퇴했다. 역사상 어떤 황제도 죽기 전에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온 적은 없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라는 인물이 남달랐고, 그의 통치 방식도 남달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4분 체제는 10여 년 동안 효율적으로 작동하여 로마제국에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왔다. 갈리아와 이집트의 대반란이 평정되고 페르시아에게도 승리하여 아르메니아를 되찾았다. 국방을 재정비하고 자원을 동원하는 시스템을 갖춤으로써 서방에서 200년을 더 버티는 자양분이 되었다. 또한 동방에서 비잔티움제국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로마제국의 통치 시스템이 아우구스투스가 창안한 ‘원수정’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전제정(the Dominate)’으로 변화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전제정은 주와 주인(lord and master)이란 뜻의 도미누스(dominus)에서 유래한 것으로 절대 군주정이나 독재정과 같은 의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는 전제정이란 말이 공문서에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원로원의 입법 기능은 상실되었다.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 황제가 집정관을 직접 임명하고, 법안을 원로원 의결이 아닌 황제의 칙령으로 바꾸었다. 이를 보좌할 전문 관료 제도를 도입하여 행정업무는 전문화되고, 문관과 무관의 분리는 더욱 심해졌으며, 관료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취한 조치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군사 및 행정 개혁은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군대 규모의 확대와 속주의 총독수의 증가, 4분 체제에 따른 4개의 제국 수도의 등장 등은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했다. 이를 위한 화폐 개혁과 세제 개혁을 단행했으나 부분적인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력한 조치에 힘입어 제국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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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08 17: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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