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11:바람처럼 사라진 혁련발발 하나라(E)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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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24) 요흥의 무리한 독발녹단 공략(AD408)

 

요흥은 안팎으로 어려운 독발녹단의 남량을 흡수할 생각을 품고서 상서령 위종(韋宗)을 무위에 보내 염탐을 시켰다. 무위에서 독발녹단과 오랫동안 예기를 나누었던 위종이 나오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 기이한 영재와 영특한 인물이 

    화하(華夏,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밝은 지혜와 명석한 지식이 

    반드시 책을 읽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구주(구주) 바깥과 오경 밖에도

    또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독발녹단의 재주에 놀란 위종이 돌아와 요흥에게 이렇게 간단하게 보고했다. 

 

  “ 남량왕국이 비록 피폐하긴 했어도 아직 도모할 수 없겠습니다.”

  

요흥이 이렇게 되물었다.

 

  “ 아니 유발발은 그 까마귀 떼 같은 무리들로도 

    독발녹단을 궁지에 몰수 있었는데

    나와 같은 천하 대군을 가진 사람이 그를 처단하지 못한단 말인가?“

 

위종이 말했다.

 

   “ 형세가 변하고 뒤집어지는 경우는

     천만가지가 넘습니다.

     남을 깔보는 자는 반드시 패하고

     남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공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독발녹단이 유발발에게 패한 것은 

     그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독발녹단이 그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주군의 천만대군을 가지고도 이기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요흥은 위종의 충간을 듣지 않았다. 아들 요필과 염성 걸복건귀 등의 장수와 함께 3만 군사를 보내 독발녹단을 공격하고 동시에 좌복야 제난을 시켜 2만 기병으로 유발발을 공격했다. 

이부상서 윤소가 요흥을 막아섰다.

 

  “ 차라리 북량의 저거몽손과 서량의 이고에게 명하여 남량의 배후를 공격함만 못합니다.”

 

요흥은 이 또한 듣지 않고 독발녹단에게 기만하는 편지를 썼다.

 

   “ 제난을 보내 유발발을 토벌시켰다.

     유발발이 서쪽으로 달아날 것을 대비하여 

     요필에게 군사를 붙여서 하서회랑(난주-무위-장액-주천을 잇는 길)

     그쪽으로 보내니 그대는 그렇게 알아라.“

 

독발녹단은 요흥의 편지를 곧이곧대로 믿고서 대비하지 않았다. 요필의 부하 강기가 군사 5천을 요구하면서 급습하자고 건의했지만 요필은 듣지 않고 정상 속도로 무위로 다가갔다. 요필의 군대가 무위로 들이닥치자 독발녹단은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전투가 지루하게 계속되자 무위 성안에서 내부반란의 기미가 있었으나 독발녹단은 반란무리 5천명을 전원 매몰시켜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독발녹단은 성안에 있는 양과 소를 모두 성 밖으로 풀어 내 보냈다. 후진 장군 염성이 병사를 풀어 양소무리를 잡게 했는데 이 틈을 타고 독발녹단의 군사들이 뒤를 공격하여 요필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7천명의 후진 병사의 목이 이 때 달아났다. 요흥은 요현에게 2만 기병을 붙여서 패전한 요필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나 요현 또한 독발녹단에게 패했다. 요현은 패전의 책임을 염성에게 묻고 독발녹단에게 사과하고 철군했다. 독발녹단 또한 사자를 종주국 후진에 보내 사죄했다. 후진과 남량이 다시 화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해 AD409년에 독발녹단은 독립을 선언한다. 

 

 

(25) 후진 요흥의 하나라 유발발 공격실패(AD409-AD411)

 

서쪽으로 독발녹단, 그리고 남쪽으로 동진 유유와 화친한 요흥은 이제 마음 놓고 북쪽의 유발발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동생 요충과 장수 적백지에게 4만 기병을 주어 유발발 공격을 지시했다. 하루 길을 북쪽으로 가다가 영북(섬서성 예천)에 도착한 요충은 거꾸로 장안의 형 요흥을 공격할 생각을 부하 장수들과의 논했다. 적백지가 반대하자 그 자리에서 독을 먹여 죽였다. 요충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요흥은 요충에게 죽음을 내렸다.

 

하의 유발발은 기병 2만으로 후진의 평양(감숙성 화정)을 공격하고 주민 7천을 약탈한 뒤 의역천(감숙성 화정현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후진 요흥은 유발발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쪽 이성(섬서성 황릉)으로 나아갔다. 유발발은 기병을 거느리고 요흥을 먼저 공격했다. 요흥의 군사가 대패하여 장안으로 급히 후퇴하였다. 요흥이 유유의 공격을 받는 남연의 모용초를 돕기 위해 보낸 한범과 요소도 유유에게 패하였다. 요흥의 후진군은 북쪽, 서쪽 그리고 동쪽에서 모두 패한 셈이다. 끝까지 항전하던 모용초의 남연은 그 다음해(AD410)에 유유에게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요흥이 패퇴하자 유발발은 강력한 기병을 바탕으로 줄기차게 후진의 북쪽 변경인 평량(감숙성 화정)과 정양(섬서성 의천현)을 노략질해 들어왔다. 요흥은 군사를 이끌고 직접 유발발을 맞아 싸웠지만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유발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을 감당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관중 북부 지역에서 후진의 요흥 세력을 격파한 유발발은 거침없이 군사를 몰아 지배영역을 넓혀 나갔다. 황릉을 관할하던 후진의 왕매덕은 유발발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유발발이 후진을 어떻게 토벌해야 하냐고 왕매덕에게 묻자 기다리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후진의 영역이 장안부근으로 쪼그라든 반면 유발발의 하나라 영역은 감숙성 동남부와 섬서성 중부와 남부는 물론 산서성 서부까지 세력을 넓혔다.(AD411) 그러나 유발발의 군대는 한 지역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유목민족의 특성상 옮겨 다니는 군대였으므로 세력영역이라고 해서 정착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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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진 걸복씨 조정의 내분(AD412)

 

AD412년 6월 걸복공부가 감숙성 무위를 근거로 하는 서진의 주군 걸복건귀와 그 아들 10여명 살해하고 대하(감숙성 광하)로 도망갔다. 걸복공부는 주군 걸복건귀의 조카이고 서진 창업자 걸복국인의 아들이다. 아마 삼촌 걸복건귀가 병사한 아버지의 자리를 꿰찬 것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은 기병 3천을 보내 걸복공부를 추격했다. 걸복치반이 보낸 추격군은 감숙성 유중 부근에서 걸복공부 무리를 생포한 다음 그의 네 아들과 함께 환열형에 처했다.  

 

후진 요흥의 부장들은 이 호기를 살려서 서진의 땅을 공격하자고 간청했다. 도량이 넓고 인자한 주군 요흥은 이렇게 말했다.

 

  “남의 상사를 이용하여 공격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오.”

 

하나라 유발발도 걸복치반을 공격할 생각을 가졌다. 군사중랑장 왕매덕이 이렇게 조언했다. 

 

   “ 걸복치반은 우리의 동맹국 수장입니다. 

     지금 상란을 당하여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무력으로 친다면 필부들도 부끄러워 할 일인데

     하물며 만승의 군주가 할 일이겠습니까?“

 

머쓱해진 유발발은 서진 경략계획을 중지시켰다. 

 

 

(27) 후진 양불숭의 패전(AD412)

 

구지(감숙성 서화)공 양성이 요흥을 배반하여 후진의 땅을 침범하였다. 요흥은 조곤을 선봉으로 삼고 요백수가 그 뒤를 잇게 하여 반격에 나섰다. 전장군 요회는 감숙성 성현 북쪽, 요숭은 천수, 그리고 호익도는 견성(섬서성 농현)에서 출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요흥 스스로도 섬서성 봉상에서 출병하여 농구(감숙성 청수)에서 도착하였다. 

 

천수태수 왕송충이 요숭에게 말했다.

 

“ 먼저 돌아가신 황제(요장)의 신묘한 전략은 예측할 수가 없었고

  서락생이 뛰어난 무용으로 왕명을 보좌하여 다시 구지로 진입했으나

  공로를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양씨의 지혜와 용맹이 아니라 험한 지세 때문에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조곤의 무리와 여러 장수들의 재주를 보면  

  지난 요장 황제에 비해 매우 뒤떨어지는데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어찌 표문을 올려서 그렇다고 보고를 하지 않으십니까?“

 

양성군과 조곤군이 싸웠으나 조곤이 크게 패하였다. 요흥은 패전한 요백수의 목을 베어버리고 돌아왔다.

 

요흥은 양불숭을 옹주(감숙성 진원)자사로 삼고 여러 주변 군사를 몰아서 유발발을 치도록 했다. 요흥이 이렇게 말했다.

 

“ 양불숭은 적을 볼 때마다 

  용맹함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흥분하므로

  내가 군사를 조절하여 5천이 넘지 못하도록 하였소.

  지금 그가 거느리는 너무 군사가 많은데

  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할 것을 어떡하면 좋겠소?“ 

  

요흥의 말대로 양불숭은 유발발과 맞붙어 크게 패하였다. 유발발에게 사로잡히자 양불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8) 유발발의 통만성 축성(AD413)

 

유발발은 AD413년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봉상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영북(섬서 예천)의 이민족인 이족과 하족 10만 명을 징발하여 삭방수(황하 지류 무정하) 북쪽과 흑수(세하)의 남쪽에 거대한 도성을 쌓도록 했다. 기본적으로 유목민 특성을 지닌 흉노족 세력인 유발발이 도성을 쌓고 한 곳에 정착한 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문화와 전쟁의 성격을 송두리 째로 바꾸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발발은 이렇게 말했다.,

 

  “ 짐은 바야흐로 천하를 통일하여 만방에 군림할 것이므로

    이 성의 이름을 통만이라고 부를 것이다.“

 

통만이란 오르도스남쪽 지금의 산서성 유림 정변의 사막지역이다. 유발발이 축성을 질간아리에게 맡겼다. 질간아리는 매우 꼼꼼하면서 잔인한 사람이었다. 구운 벽돌 벽을 찔러서 1촌이라도 패이면 담당자를 죽여 성곽에 함께 묻었다. 병기를 만들 때에도 화살이 갑옷을 못 뚫으면 화살장이를 죽였고 갑옷이 뚤리면 갑옷 만든 사람을 죽였다. 그렇게 축성된 것이 통만 성이므로 견고함에 있어서는 따라 올 성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성이었다고 전해진다.    

 

(29) 유발발이 성을 바꾸어 혁련발발이 되다(AD413)

 

유발발의 유씨 성은 난제묵돌이 옛 한나라 시절 유방에게 내려 받은 성이었다. 유발발을 그렇게 내려 받은 유씨 성을 수치로 여겨 혁련으로 바꾸었다. 흉노어로 그 뜻은 ‘영광과 권력’을 상징하고 또 한자로는 ‘아름답고 성대한 모양이 하늘과 닮았다’라는 뜻이다. 그 외의 다른 흉노 부족들도 성을 모두 ‘철벌’씨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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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09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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