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2 : 정통의 길을 걸어간 전량 (C)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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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2) 영균대 축조와 염증의 반대(AD321)

  

장무가 영균대를 축조하려고 했다. 높이가 9인이었는데 4-8척을 1인이라고 했으므로 36척에서 72척에 해당하는 높은 궁궐인 셈이다. 그 소식을 들은 염증이 한 밤중에 장무가 사는 양왕부의 대문을 두드렸다.

 

  “ 무공(장궤)이 사람을 내게 보내어서 말했습니다.

    ‘어떤 연고로 백성을 수고시키면서 영균대를 쌓는가?’ “ 

 

유사들이 죽은 장궤의 말을 하는 것이 요사스럽다고 하여 염증을 죽이자고 했다. 장무가 그런 신하들을 물리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백성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염증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받들어서 

    나를 고치도록 권유하는 것이니 

    너희들이 어찌 요사하다고 말하는가?“

   

장무는 사람을 급히 보내 영균데 축조를 그만두게 했다.(AD321) 그 다음해에 장무는 장수 한박을 보내 농서와 남안(모두 감숙성 농서현 부근)을 빼앗고 거기에다가 진주(秦州)를 설치했다. 이 진주는 지금의 농서 땅으로써 진안이 다스리고 있는 전조의 진주(천수)와는 다른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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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진안의 멸망(AD322)

 

진주자사 진안이 유요에게 알현을 요청했으나 유요는 지난 번의출정 때 얻은 풍토병으로 만나주지 않았다. 화가 난 진안은 유요의 후미를 공격했다. 일종의 반란인 셈이다. 농상지역 저족, 강족 10만 여명이 모두 진안에 귀부했다. 이런 호응을 받게 되자 진안은 스스로를 대도독 가황월 대장군 등이라 칭하였다. 노빙이 진안에게 큰 소리로 울면서 탄원했다.

 

  “ 나는 차마 당신이 죽는 것을 못 보겠습니다.”

진안이 반란했으므로 곧 죽을 것이라는 예기였다. 진안이 화가 나서 목을 치라고 명령했다. 노빙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꾸했다.

 

  “ 죽는 것은 내 스스로의 몫이요.

    죽거들랑 내 머리를 상규 저자에 걸어두어 

    전조와 유요가 당신의 목을 베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진안이 화가 치밀어 올라 그를 드디어 죽였다. 유요는 그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 노빙은 현명하며 천하 백성들이 기대는 사람이다.

    진안이 현인을 찾아야 할 시기에 죽였으니 

    나는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사람임을 알았다.“     

 

진안은 내분에 빠진 서진 조정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양왕이라 일컫고는 군사를 모아 유공이 주둔하고 있던 남안(감숙 농서현 동북)을 포위공격했다. 그러나 전조의 휴도왕 석무가 감숙성 임조에서 군사를 이끌고 상규(감숙성 천수)로 와서 유공을 지원하면서 진안은 크게 패했다. 진안은 7천 잔당을 모아 빠져나와 감숙성 장가천으로 달아났고 석무는 상규를 접수했다. 그 해 7월 유요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나와 진안이 있는 장가천을 포위했고 따로 군사를 보내 석무가 장악하고 있는 상규도 포위해 버렸다. 석무는 얼마 전 유요에게 귀부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에 무력으로 봉쇄해 버린 셈이다. 유요의 대군이 들이닥치자 장가천은 물론 상규의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진안은 정예기병을 대동하고 포위망을 빠져 나갔으나 결국 전조의 보위장군 호연청인에게 사로 잡혀 목이 베어졌다. 진안은 장군과 병사를 아주 잘 어루만지고 다루어 고락을 함께 했으므로 그의 죽음을 매우 애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장사의 노래(壯士之歌)’를 지어 불렀다.          

  

“ 농상(감숙성 동부 일대)에는 진안이라는 장사가 있었소,

  체구는 비록 작았어도

  배짱은 그 누구보다도 더 컸었소,

  장사를 아끼기를 자신의 심장처럼 아꼈고

  멋진 말을 타고 철 안장에 앉아

  일곱 척 큰 칼을 폭포처럼 휘둘렀고

  장팔사모(길이 1장 8척의 뱀 치장을 한 긴 창)를 좌우로 휘두르면서 싸웠는데

  열 번 전투에도 허물어지지 않았으나

  마침내 세 번째 싸움에서 장팔사모를 놓치자 멋진 말을 버리고

  수풀 속 바위틈으로 피신했소.

  밖에서 원군이 오기를 목 빼고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으니

  서쪽으로 흐르는 물,

  동쪽으로 흐르는 강,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니 어찌할꼬, 어찌할꼬“ 

    

진안이 죽자 그 부하들은 모두 유요에게 항복했다. 농지역(감숙성 동남부 지금의 천수지역 일대)의 여러 부락들도 모두 유요에게 항복하고 들어왔다. 

  

(14) 유요의 장무 양주 공격(AD323)

 

유요가 직접 28만 대군으로 서쪽 양주를 공격해 들어왔다. 유함은 기성(감숙성 감곡)에서 전량의 한박를 공격했고 호연안은 상벽(감숙성 농서)에서 음감을 공격했다. 유요의 군영 길이는 100리에 뻗었고 쇠북치는 소리에 땅이 흔들리고 황하 물이 끓어올랐다고 기록될 정도로 광대한 규모의 침입군이었다.

   

장무의 방위군들은 유요군의 풍문만 듣고도 흔들리고 무너졌다. 참군 마급이 장무가 직접 항전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 그래야만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갈 것이라는 말이었다. 장사 범위는 이런 위급한 상황으로 주군을 몰아넣는 마급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위의 한심한 대꾸에 대해 마급이 이렇게 내뱉었다.

 

  “ 역시 범공은 조박한 서생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만 들추어내는 소인배일 뿐

    국가의 계책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밝으신 공의 부자는 역도 유요를 베지 못하여 한이 된 것이 여러 해 였습니다.

    지금 유요가 직접 가까이 왔으니

    멀고 가까운 모든 사람들이 명공의 거동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마땅히 용기가 있음을 보이셔서 

    진주와 농산의 희망에 부응하셔야 합니다.

    비록 세력으로는 대적하지 못할 지라도

    형세를 보면 출전 못할 것도 없습니다.“ 

 

장무가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마침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석두(고장성 동쪽)에 주둔했다. 장무가 참군 진진에게 물었다.

 

  “ 유요가 삼진(三秦,관중지역을 일컫는 말)의 무리를 이끌고 

    이긴 기세를 타고 돗자리 말 듯 쳐들어오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소?“

 

진진이 이렇게 말했다.

 

  “ 유요의 병사는 수효는 많지만 정예병은 매우 적습니다.

    대개 강족과 저족의 까마귀 떼와 같습니다.

    은혜를 베풀고 믿음을 주는 일이 거의 없었고 

    또 고향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니 뱃속 고질병을 잊고 어찌 몇 날 몇 달을 싸움에 몰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20일이 지나도 물러나지 않으면  

        저 진진이 지친 병졸 수 천 명을 청해서 그들을 잡아오겠습니다.“

           

진진의 말에 크게 위안이 된 장무가 군사를 주어 기성(감숙성 감곡)의 한박을 구원하게 했다. 전조의 장수들이 서둘러 황하를 건너려고 하자 유요가 이렇게 말하며 말렸다.

 

  “ 우리 군사가 비록 왕성하기는 하지만 

    위엄이 두려워서 온 사람이 2/3이고 

    중군 또한 피곤하니 실제로 써먹을 군대는 별로 없소.

    다만 갑병을 관장하여 움직이지 말고

    나의 권위와 위엄으로 저들을 굴복시켜야 할 것이니

    만일 중순을 넘어도 장무의 표문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내가 경들에게 진 것이오.“ 

  

장무는 얼마 후 사자를 파견하여 번속을 자칭하면서 말, 소, 양 및 진기한 보물을 보내왔다.

유요도 답례로 장무에게 시중, 도독양남북진약익파한농우서역잡이흉노제군사, 태사 및 양주목으로 삼고 구석을 덧붙여 주었다. 이만하면 전조 조정이 장무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영예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번 출병으로 유요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량의 무릎을 꿇릴 수 있었고 장무 또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영토를 지켜냄과 동시에 전조 조정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성공했다. 

  

(15) 영균대를 수리한 장무(AD323)

 

유요의 군대가 물러가자 장무는 수도 고장의 성을 크게 쌓고 이 틈에 영균대를 대대적으로  수리하는 공사를 일으켰다. 별가 오소가 반대 상소를 올렸다.

 

  “ 공께서 성을 수리하고 대를 축조하시는 것은 

    대개 과거 환란(유요침공)을 경계 삼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저는 진실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 부족하면 

    아무리 높은 대를 쌓아도 적을 방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사람들의 충성을 의심하고

    병사와 백성들이 의탁할 곳을 잃으며

    겁 없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시어 

    이웃 적들이 시시때때로 쳐들어 올 모의를 한다면

    장차 어떻게 천자를 보좌하며 

    어떻게 제후의 패자가 되시겠습니까?

    바라건대 이 공역을 파기하시고 

    백성들의 노역과 경비를 줄여 쉬게 하십시오.“

 

장무가 조용히 오소를 설득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 돌아가신 형님(장식)이 어느 날 적에게 몸을 잃게 되었을 때

    어찌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병사가 절개를 다 바칠 생각을 하지 않았겠소?

    돌아보면 화란이란 생각지 않은 곳에서 생각지 않은 때에 일어나는 법이요.

    비록 용기와지혜가 있다고 한 들 사용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소.

    왕공들이 험한 곳을 만들어놓고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라도 거듭하여 문을 닫아걸었던 것이 옛날의 도리였소.

    지금은 국가가 태평하지 않으니    

    태평시대의 이치로 진퇴양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소.“  

 

장무는 끝내 성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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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27 17:43:00 최종수정 2018-09-30 16: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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