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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변 경제학자’의 정책 체험기<15> 에티오피아와 한국 개발경험 공유하다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9-03-13 17:00:00 최종수정 2019-03-12 19:57:42
      이경태 | 前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前 OECD 대사

본문

‘관변 경제학자의 정책체험기’는 공직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해외유학과 산업연구원 부원장,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국제무역연구원 원장, 그리고 주OECD대사를 역임한 이경태 박사가 겪은 주요 경제정책 결정과 집행과정의 뒷얘기들을 담은 연재물이다. 주로 정부 경제정책의 수단과 방법을 연구해 제공한 탓에 본인 스스로 ‘관변 경제학자’라는 수식어를 사용했지만, 그만큼 정책 이면사(裏面史)를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정책당국자들에게도 많은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앞으로 20여회에 걸쳐 우리 경제발전의 주요 분수령이 된 정책과 사건의 자초지종은 물론 시사하는 바를 엮어나가고자 한다.<편집자>

 

KOICA가 발주한 용역사업 2012년에 참여

 

2012년에 한국국제협력재단(KOICA)에서 에티오피아와 한국의 개발경험을 공유하는 용역사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민간 용역회사에서 수탁을 하였는데 용역수행팀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산업연구원에서 같이 일하던 후배교수가 나보고 팀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무역연구원을 그만 두고 백수로 놀던 때라 시간여유도 있었고 또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승낙하였다.

여러 기관에서 한국의 개발경험을 개발도상국들과 공유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많은 경우에 한국이 실제로 경험한 것과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었다. 나는 한국의 고도성장을 견인한 양대 축은 수출진흥정책과 중화학공업화 산업정책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정책의 수립과 실천과정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었다. 

 

그런데 지식공유사업을 수행하는 여러 젊은 경제학자들이 한국의 산업화과정에 대한 정확한 현실인식이 미흡한 상태에서 정부역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피력하고 민간과 시장중심의 경제발전전략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극단적으로 정부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물론 자유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학문발전의 요체이지만 한국의 경제발전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은 연구의 객관성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무언가 도움이 되는 조언을 듣고 싶어 하는 개도국 공무원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에티오피아 공무원들에게 한국의 수출진흥정책과 산업정책을 소상하게 전해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용역참여자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하였다.  

 

에티오피아에 한국의 수출진흥정책과 중화학공업 육성 산업정책을 소개

 

보고서가 어느 정도 골격이 잡혔을 때 용역팀은 에티오피아로 현지 실사 및 설명회를 하러 갔다. 에티오피아는 나도 처음 가 보는 나라이어서 기대가 되었다. 그때까지 내가 에티오피아에 대해서 가졌던 정보는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병을 해서 용감하게 싸웠고 또 아베베 비킬라라는 마라톤선수가 맨발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해서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 정도이었다. 내가 춘천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 북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공지천가에 에티오피아 참전기념비가 서 있었던 기억도 있었다. 

 

출장을 떠나기 전에 나는 에티오피아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우선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왕에게서 얻은 자손의 후손들이 에티오피아국민들이고 지리적으로는 아프리카에 속해 있지만 인종적으로는 아프리카 흑인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에티오피아는 나치독일에게 잠깐 점령된 시기를 제외하고는 독립을 유지했다. 인종이나 종교 갈등이 야기하는 내전의 비극을 겪은 적도 없었다. 산유국은 아니었으나 여러 가지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자원이 풍부해서 농업의 잠재력도 컸다.  

인종, 종교 갈등이 별로 없고 자연자원과 기후자원이 양호함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는 빈곤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의 중심가를 걸으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가난의 참상은 충격적이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도로를 달리는 낡은 차량들이 뿜어내는 매연이 어찌나 독한지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길가에는 젊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구걸을 하고 있었다. 같이 걷던 KOICA의 젊은 직원도 적지않이 놀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어릴 적의 한국이 이러했노라고. 그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좀 더 자세히 1950년대, 60년대 초에 내가 살던 부산의 쇠락한 정경과 내 고향 양산의 돼지움막 같았던 초가집에서의 생활을 묘사해 주었다. 그는 그런 이야기를 여태까지 들어 본 적이 없다면서 자기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얼마나 풍족한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우리가 에티오피아를 방문하기 얼마 전에 멜라스 제나위 총리가 서거하였다. 그는 에티오피아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뜨거운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정열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한강의 기적을 본받고 싶어 했다. 박대통령에 대해 자신이 공부하고 전파하려고 노력했으며,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자료를 번역해서 공무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후임 대통령도 전임자의 유지를 계승하여 이명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경제발전경험을 전해 달라고 요청하여 용역사업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그런 배경을 알고 나니 제대로 전해 주어야 하겠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에티오피아도 수출주도 성장정책 필요하다” 건의…수출진흥확대 회의 소개

 

일정 중에 에티오피아의 산업부 직원들에게 용역중간결과를 설명하는 자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장관을 비롯하여 간부급 30명 정도와 민간의 수출기업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니 그들의 관심과 기대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의 수출진흥확대회의의 구성과 기능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내가 직접 경험했던 사실들을 포함해서 최대한 실감나는 스토리를 들려주려고 노력하였다. 에티오피아도 한국처럼 수출주도 성장전략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 용역팀의 건의였고 에티오피아정부도 이점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박정희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였다. 수출진흥 관련부처의 장관을 비롯한 공무원, 금융기관, 수출지원단체, 그리고 수출업체에서 직접 참석해서 수출을 늘리기 위한 방안을 토의, 결정하였다. 수출이 곧 살길이라는 구호는 대통령을 위시해서 수출기업의 실무 직원에 이르기 까지 전 국민이 공유하는 가치, 행동수칙, 평가기준이었다. 공무원들은 수출실적에 따라서 승진이 결정되었고 기업들은 수출실적에 따라서 회사의 명운과 직원들의 봉급이 좌우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수출업계의 애로사항을 청취해서 해결하는 자리였다. 논의만 하고 헤어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업계가 쏟아 내는 애로사항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바로 해결될 수 없었고 제도개선을 위한 검토와 관련부처 협의가 필요한 사항이 대부분이었다. 회의를 주재하는 박 대통령은 관계 장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시오!” 하고 지시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한 제도개선을 마련해서 다음 회의에서 보고 하세요”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장관은 제도개선책을 마련해서 관련부처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관련부처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상태로 다음 회의에 보고하고 결국 최종결정은 대통령이 내렸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수출업체를 도와주는 방향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1960-70년대에 걸쳐서 수출기업이 당면했던 최대의 난관중의 하나는 금융이었다. 바이어로부터 주문을 받은 후부터 원자재를 조달하는 등 금융수요는 발생하는데 바이어로 부터의 대금결제는 물품을 선적하고 난 후에야 이루어 졌고 더욱이 과연 바이어가 물품대금을 제대로 지급할 지도 불확실한 상태에서 생산자금을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만성적인 자금수요초과상태에 놓여 있던 당시에 은행으로부터 소요자금을 적기에 대출받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수출기업들의 호소를 듣고 상공부와 재무부가 머리를 맞대고 고안해 낸 제도가 신용장(Letter of Credit, L/C) 할인제도이었다. 수출기업들은 상대방 은행으로부터 받은 신용장을 우리나라 은행에 가서 제시하고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상공부는 수출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자는 입장이었고 재무부는 금융원칙과 관행을 내세워서 견제하는 입장이었다. 만약에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주지 않았으면 수출기업들은 자금애로 때문에 수출주문에 맞추어서 생산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13년에 수출진흥확대회의의 녹취록을 발간하였다. 참석자들이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들이 그대로 실려 있어서 회의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자료이다. 녹취록 중에서 흥미 있는 내용을 두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돈 찍어서라도 지원하라”…대통령의 확고하고 일관된 정책 방향 제시가 성공 바탕

 

<사례 1>

1971년 1월 회의에서 박대통령은 전년도 수출 10억불 달성을 축하한 후에 금년도 13억 5천만불 수출목표를 달성하려면 실제로는 15억불 목표를 세워 놓고 밀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속해서 박 대통령은 이렇게 강조했다.

 “일부 경제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가 10억불 하겠다는 것도 무리한 것을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비난했는데, 그 사람들이 상식에 벗어나는 소리하고 있다. 10억불을 달성하려고 무리하다 보니까 산업기반이 갖추어 져서 이제부터 쑥쑥 자라나는 바탕이 되어 있다”. 

박대통령은 무리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다 보니 능력이 생겨서 더 잘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발상이라고나 할까? 현재의 한계에 절망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진취적인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회의에서 박대통령은 돈타령하지 말고 꼭 돈이 필요하다면 조폐공사에서 찍어서라도 주겠다고 했다. 이 말은 가용재원을 수출지원에 집중하라는 뜻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소비자금융, 내수금융은 억제하고 수출금융을 최우선으로 지원하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는 수출을 “종합예술”이라고 표현했다. 정부와 민간의 협력, 정부 부처 간의 협력이 긴밀하게 이루어 져야만 정책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대통령의 의중이 분명하게 인식이 되면 공무원들은 협의과정에서 수출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대통령 앞에서 딴 소리 해 보아야 어차피 대통령이 수출우선으로 결정할 테니까 아예 미리 합의해 버리는 것이 모양새가 좋았던 것이다. 지금도 부처 간 이견 때문에 정책이 표류하면 대통령이 사령탑이 되어서 교통정리를 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다른 편에서는 대통령이 일일이 직접 나서는 것은 부작용이 더욱 크기 때문에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소에 대통령이 국정방향에 대해서 확고한 방향을 정하고 일관성 있게 최종결정을 해 주면 공무원들은 그걸 인식하고 미리 알아서 대통령의 국정방향과 일치하는 합의를 한다는 것이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우는 교훈이다. 

 

매년 1월 ‘수출진흥세부계획’ 작성…내수(內需) 많은 기업에 수출목표 부여하기도

 

<사례2>

1972년 1월 회의에서 상공부 상역차관보가 그해의 수출진흥 세부계획을 보고했다. 그 주요내용을 보면 

-수출자금 1억 3,300만불을 지원할 예정인데 정부보유외환의 지원이 없지만 융자조건과 절차가 정부보유외환보다도 불리하지 않도록 재무부와 공동작업을 하고 있다. 

-수입과 수출을 링크시켜서 수입업체가 수출에 적극 나서도록 한다. 내수치중 17    개 기업으로 하여금 9,540만불을 수출할 의무를 부여한다.

-외화가득률을 높이기 위해서 수출용원자재 국산화목표를 1억 8천만 불로 정하고 경쟁력있는 국산화가 이루어지면 그 품목의 수입을 제한하겠다. 의류, 가발, 가눈썹등의 부자재 3천만불을 국산화하고 전자부품 국산화목표는 1,300만불인데 그달성을 위해서 24개 공장의 건설자금 3억 9,500만원을 지원한다.

-마산수출자유지역, 구미전자공업단지, 완구산업공업단지를 완성하고 기업입주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섬유산업구조개선을 위해서 노후시설교체, 기업합병과 표준화, 원료와 제품산업간    의 계열화를 추진하고 160억 원을 지원한다.

-기능공의 질적 고도화를 위해서 스웨터, 가발등 분야의 2,400명의 재직자에게 재    훈련을 실시하고 1인당 기계 1대가 되도록 시설을 보강한다.

-인쇄, 염색, 도금, 가공등 취약부문의 50개 연구과제를 선정한다.

 

수출진흥 세부계획은 미시적이고 구체적이다. 개별기업의 수요를 상향식으로 파악하고 전체적으로 종합, 조정과정을 거쳐서 작성된 것이다. 이 세부계획은 답당부처에서 그 이행상황을 계속해서 점검하며 다음해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종합적인 평가보고를 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에티오피아 공무원들에게 한국의 수출진흥확대회의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회의의 성공을 위해서는 국가최고지도자가 직접 참석해서 정부 부처들이 업계의 애로를 해결해 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며 공무원이 최선을 다 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에티오피아의 수출기업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일화가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여러 가지 과일들을 풍부하게 생산하고 있어서 쥬스 등의 가공식품은 수출유망품목이었다. 그런데 쥬스를 담는 포장용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실제 수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의 해법을 모색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경제발전에 있어서 ‘정부와 시장의 역할이 무엇인가?’의 질문을 하게 된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에티오피아에서는 쥬스포장 용기를 생산하는 공장이 건설되었을 것이다. 포장용기에 대한 시장수요를 발견한 기업가가 투자결정을 할 것이고, 은행에서는 사업의 타당성을 인정해서 설비금융을 제공할 것이다. 용기생산업자는 중간소재인 알루미늄을 구입해야 하는데 초기에는 수입을 하다가 나중에는 역시 같은 경로로 알루미늄공장을 세운 국내기업으로부터 구입할 것이다. 이러한 연쇄과정을 거치면서 포장용기 산업의 전후방연관산업들이 갖추어 지게 된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서는 세월이 흘러도 포장용기공장이 세워지지 않았다. 공장을 세워서 돈을 벌어 보겠다는 기업가가 없었거나, 은행에 가도 대출을 못 받았거나, 알루미늄수입이 금지되어 있었거나 등등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을 것이다. 시장실패와 정부실패가 혼재하여 포장용기산업은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의 수출진흥확대회의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범국가적 협의체결정기구이었다.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 정부가 나서고 정부의 규제 등 제도적 문제점들을 기업이 지적하면 정부가 스스로 해결하는 ‘문제해결의 기구’였다. 포장용기의 경우에 한국에서도 1960년대에 수출상품의 포장과 용기가 조잡하여 제값을 받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제기되고 해법을 논의한 결과 1970년에 한국디자인포장센터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수출진흥확대회의 설치권고’ 받아들였으나 ‘총리’가 아닌 ‘장관’이 주재 “아쉬움”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무역정책의 범위를 넘어서서 산업정책까지도 포괄하였다는 것이다. 수출을 늘리기 위한 시발점은 국제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러한 상품들이 시장에서 저절로 생산되지 않을 때는 공장을 세워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정부와 민간이 각각 제 할 일을 찾아서 해야만 했던 것이다. 

포장용기를 예로 들어서 한국의 수출진흥확대회의의 기능에 대한 설명을 하니까 참석한 에티오피아공무원들과 수출기업인들은 더욱 쉽게 이해가 되는 모양이었다. 용역팀의 최종보고서에서도 수출진흥확대회의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그 채택필요성을 에티오피아정부에 건의하였다. 나중에 들으니까 그 건의는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그러나 총리가 주재하는 것이 아니고 장관이 주재하며 수출기업인들의 참석이 제도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아쉬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용역을 수행하는데 에티오피아의 산업현장을 실사하고 유망산업을 선택하는 일은 미국의 Dalberg라고 하는 용역회사가 맡았다. 그 용역회사가 받는 용역비는 전체 용역예산의 70%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컸다. 그 회사는 세계의 개발원조자금으로 수행되는 용역을 따 내어서 일감을 마련하고 있었다. 우리 용역에서는 에티오피아의 산업시설을 현장조사하여 장단점을 밝혀내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유망산업을 선정하고 또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는 일을 맡았다. 5명 정도의 인력이 우리 용역에 투입되었는데 하바드의 케네디스쿨 졸업생이 여러 명 있었다. 본부는 미국에 있고 남미, 동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 지점을 두고 있었으며 전체 고용인력이 200명에 달했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한국의 원조자금이 미국의 일자리를 만드는데 쓰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한국의 용역회사들이 우리의 원조자금을 쓰면서 우리 청년들을 고용하면 좋은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 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KOICA에서 최종보고회를 할 때 특별히 이 점을 건의하였다. 몇 개의  용역기관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KOICA 원조자금을 집중 배정해서 일을 시키면 점차 역량이 함양될 것이고 나중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다자개발원조기관과 선진국들의 개발원조자금도 수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후에 내 건의가 어떻게 반영이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계속>  

 

  <시리즈 순서>

1. 관치금융과 금융자율화

2. 중화학공업의 돈줄, 국민투자기금

3. 급진적 대외개방이냐?, 점진적 대외개방이냐?

4. 반도체산업은 민간주도로 꽃피었다

5. 개혁-개방초기의 중국을 가다 

6. 대우조선을 파산시킬 것인가? 구제할 것인가?

7. 재벌의 업종전문화: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가 되었다 

8. 삼성에게 상용차생산을 허용할 것인가?

9. 첨단산업발전법 제정의 무산

10. 한국의 에너지과소비의 원인을 규명하다

11. IMF 외환위기 이야기

    ➀ 위기를 예측하지 못하다

    ➁ 대미설득과 금융정책

    ➂ 구조조정에 얽힌 일화들

12. OECD대사 시절의 한국논의

    ➀ 한국은 개도국이 아니다

    ➁ 좌절로 끝난 김대중정부-OECD 대북협력 시도 

    ➂ 한국은 노동탄압국인가?

13. 한국을 둘로 쪼갠 한미 FTA 협상

    ➀ 통계조작소동으로 날밤을 지새우다

   ➁ 미국경제식민지 괴담의 실체를 파헤친다

   ➂ 광우병파동과 촛불데모

14. 동아시아 경제통합, 그 머나먼 길 

15. 한국의 개발경험 전수 : 에티오피아

16. 연재를 끝내며

 

※이 시리즈의 목차는 사정에 따라 가감될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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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3-13 17:00:00 최종수정 2019-03-12 19: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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