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의 솔개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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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1월13일 17시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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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개가 있다. 마흔이 된 솔개는 뭉툭해진 자신의 부리와 발톱에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부리와 발톱이 이 모양이니 사냥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솔개는 결연한 심정으로 산의 정상을 오른다. 경치에 빠지기도 전에 자신의 부리를 사정없이 바위에 부딪친다. 정상 등반도 어려웠을 터인데 멀쩡한 부리까지 깨버리는 고통을 감수한다. 새로운 부리와 발톱을 얻기 위한 희생은 필요하니까.

 

깨진 자리에 돋은 새 부리로 헌 발톱까지 모조리 뽑은 완벽주의자 솔개는 그렇게 자기혁신에 성공한다. 새롭게 돋은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30년을 더 살아 일흔까지 꽉 찬 삶을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결단력 있는 솔개의 이야기에 감동을 하곤 한다. 솔개는 실로 자기계발의 달인이자 결단력의 화신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우등생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솔개는 진정 교훈을 주는 생명체다. 직원들에게 훈화하는 사장님이 유난히 솔개의 이야기를 애용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자기반성은 어디서 오는가

대다수의 한국인이 잘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내가 못나서”라는 불편한 자기연민이다. 여기에는 ‘자존’, ‘자립’, ‘자활’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며 ‘스스로’ 힘껏 살아보라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존재한다. 아마 좌파 솔개라면 부리가 싱싱한 다른 솔개를 향해 공동 사냥을 하자거나 잡은 먹이를 함께 나누자는 의견을 제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왼쪽의 솔개는 “남 탓 하지 말라”는 비난과 함께 사회의 ‘루저’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기계발을 완벽하게 수행한 솔개를 본받아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자기계발’이 한국을, 나아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몇 주간 베스트셀러에는 자기계발 서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너나나나 이를 읽고 실천하며 끝없는 자기평가를 한다. 자기계발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반성하며 ‘인재’가 되기 위한 규칙들을 지키는데 급급하다. 다만 우리는 ‘자기계발’의 등장과 이를 이끄는 원동력 뒤에 숨겨진 본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너를 위해 일하는 거야!”, 계속되는 최면

지난 20년간 한국 자본주의를 지배한 헤게모니적인 경제적 담론은 바로 지식기반경제, 지식정보사회, 무한경쟁 시대, 디지털 경제와 같은 것들이다. 담론의 변화에 발맞춰 노동주체의 주체성의 담론이 변화했으며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이 형성됐다. 기업을 위해 일하는 것은 ‘노동자’가 아닌 ‘인재’이며, 새로운 경제적 주체성의 재현은 동시에 민주주의, 시민권, 문화적 이상 등의 정치적 담론과 결합한다.

 

언제부터인가 국내 기업은 신입사원 채용과정에서 ‘인재상’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학력이나 자격증과 같은 기술적이고 일반적인 언급보다 인성에 관한 언급이 우위를 차지한다. 창의성, 주도성, 커뮤니케이션 능력, 대인관계 능력, 리더십 등이 평가의 지표가 된다. 인재로 채용 되는 사람도, 인재를 채용하는 사람도 모두 단순한 노동직을 뽑는 자리가 아님에 안심한다. 신입사원은 ‘기업의 노예’가 아닌, ‘기업을 돕는 구성원’으로 고용되었다는 사실에, 면접관은 ‘인간중심적’인 자신들의 모습에 만족한다. 그러나 이는 노동주체를 가리키는 새로운 명칭이 아니다. 노동주체를 지배 가능한 대상으로 재구성하려는 담론적 계획의 일부에 불과하다. 

 

오늘날 기업의 경영은 보다 구체적이고 노동자 중심적으로 보인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이 바로, ‘자기 경영’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관리’와 함께 자기계발의 담론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 모든 생활자들은 경영자로 대통령은 국가를 경영, 시장과 도지사는 도시를 경영, 병원장은 병원을 경영, 주부는 가정을 경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직장인 또한 피고용자나 관리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일을 책임지는 개인 사업가이며 기업의 파트너라는 맥락이다. 

 

이러한 담론은 ‘목표관리제(MBO: Management By Objectives)’와 같은 경영 체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표관리제는 조직구성원이 자율적으로 상사와 협의해 자신의 업무 목표를 정해 업무를 수행하고 그 수행결과를 스스로 평가하는 경영관리기법이다. 진보적이고 ‘좋은 기업’이 되고자 하는 대기업들이 너나나나 달려들어 채택하는 관리체제이기도 하다. 단편적으로 이는 노동자를 존중하며 전문성을 살려 개인이 하고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좋은 관리제’다. 우리는 여기서 ‘개인’에게 무게를 넘기는 문제점을 발견해야한다. 

 

위와 같은 경영 체제는 일하는 주체를 더욱 구체적으로 자본에 종속시킨다. “‘너’가 설정한 업무 목표이니 ‘너’가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하며, 성공하기 위해선 ‘너’가 열심히 해야겠지?”라는 숨겨진 의도와 함께. 노동자는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다.(더 이상 ‘인재’라는 표현을 쓰는데서 느끼는 이중화법을 감수할 수가 없다). 자기계발을 한다는 믿음으로 자본에 대해 자신을 개별화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자본을 위해 자신을 극대화한다.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나’를 위해 야근을 하고 ‘나의 업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다루기 더욱 쉬운, ‘인재’가 탄생하는 시점이다. 

 

이처럼 자기계발을 내세우며 ‘솔개’가 되라고 압박 하는 사회는 다른 중요한 것의 책임 또한 회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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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없는 빈곤 

각종 미디어나 사람들 사이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되는 단어다. ‘희망’이란 나의 내밀한 삶의 세계에서 비롯되는 영역이다. 즉 내부성에 기인한다. 반면 ‘빈곤’이란 삶의 밖, 즉 외부적 요인으로부터 오는 ‘사회적 현실’이다. 경제적인 생존을 규제하는 바깥 세계의 원리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희망 없는 빈곤’이란 표현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사회적 현실을 개인적인 영역에 귀결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희망 없는 빈곤’이란 표현은 빈곤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자율의 세계로 전이해버린다. 

 

자기계발의 경전으로 각광을 받던 솔개 이야기는 한날 우화에 불과하다. 동물학자는 우상시 되는 솔개에 대해 “각질화 돼 만들어진 기관이 부리를 다쳤을 경우 재생이 될 수 없다”고 밝힌다. 

 

솔개의 이야기는 지극히 목적의식적으로 지어낸 우화일 뿐이다. 기초적인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이런 우화가 자기계발의 진리로 통용되었던 것은 자본과 그 응원단 때문이다. 그들은 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 정부와 채벌, 체제에 불만을 갖지 말고 솔개처럼 너 스스로를 바꾸고 노력하라. 뼈를 깎는 혁신을 통해 신자유주의 경쟁에 철저히 적응하라는 것이다. 

 

가짜 우화는 현대판 주술이다. 경쟁을 신성시 하는 사회적 구조가 이러한 우화를 만들었다. 사회는 그 신성한 경쟁에서 승리할 것을 독려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화의 교훈대로 경쟁에서 이긴다 할지라도 사회적 생존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온갖 형태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는 경쟁에 참여한 자가 아닌, 경쟁을 만든 자다. 자본주의의 경쟁은 본래 경쟁 참여자들의 자아성장이 아니라 자본의 효율과 비용절감을 위해 만들어졌다. 경쟁을 통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최적자를 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의도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도 목적을 관철한다. 경쟁에 뛰어들기 전, 우리는 경쟁이 구조적으로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물어야 한다. 자기계발을 위해 토익 점수를 높이고, 대외활동을 하며 성적 관리를 하는 대다수 대학생들에게 어쩌면 허탈함을 안겨줄 지도 모르는 질문이다. 그러나 무언가 바꾸고자 한다면, 자신을 성장시키고자 한다면 어쩌면 꼭 필요한 질문일 것이다.

 

“뼈를 깎는 고행, 환골탈태!”을 외치는 기업들에게 솔개는 대답한다. “세상에! 그러면 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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