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폭력을 사랑이라 불렀던 사람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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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4월1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8년04월13일 15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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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딸 같아서 그랬다”, “교육이었다”, “인정하지만 강압이나 폭력은 없없다”, “합의에 의한 관계다” 불처럼 번지는 미투의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같이 이런 식이었다. 피해자를 얕잡아보는 상투적인 변명을 내뱉으며 그들은 아뿔싸 이마를 짚었을까, 아니면 이 정도의 변명이라면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그들의 경우 후자라고 짐작한다. 자신의 권력이라면 응당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들의 선배가, 그 선배의 선배가 그러했듯이 폭력이 당연한 것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아뿔싸 이마를 짚으며 들통난 것을 분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누가”, 혹은 “내가 도대체 왜?” 따위의 생각을 했으리란 것이 도리어 어울리는 분위기다. 그러나 관료사회에서 권력을 잡은 자의 말은 법이고, 그 법이 곧 돈이 된다. 반기를 들면 토사구팽 당해 일과 꿈을 잃고, 밀고자는 색출하여 가시방석에 앉혀버린다.

 

 재작년의 국정농단이 그러했듯이 죄를 숨기려는 움직임은 그것을 밝히려는 움직임보다 더욱 체계적이고 명료한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가해자는 약자와 피해자의 심중을 헤아리고 그들의 행동범위를 파악한다. 그러나 선한 피해자는 그들의 머릿속을 헤아릴 방도가 없다. 정작 고개를 숙여야할 사람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애먼 피해자는 연일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인다. 악은 체계적으로 순환한다. 지난 수십 년의 경험치를 기반으로 더욱 견고한 철옹성이 된다. 그들이 세운 추악한 제국은 지금 미투 운동이라는 들불에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죄의식이 없는 죄인이었다. 몇 십 년을 방치해둔 죄가 파도처럼 밀려오자, 감당하는 법을 모르고 잘난 맛에 살던 그들은 사회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비는 순간을 상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권력의 맛을 누리며 살 줄 알았으나 결국 민낯이 드러난 가해자들은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은 에둘러 변명을 늘어놓거나, 조용히 직위를 내려놓거나, 자숙을 하겠다며 꽁무니를 빼거나, 혹은 죽어버리거나, 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겪는 순간의 무책임한 고통은 피해자가 평생을 달고 산 그것에 감히 비견할 수가 없다.  

 

 

◆변명과 암묵적 동의

 

 그리스 신화에서 미소년 아도니스를 죽인 멧돼지로 변신한 아레스는 엄니로 그를 애무하려고 했을 뿐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변명한다. 상호간의 호의와 존중 없는 일방적인 모든 관계는 엄연한 의미에서 상대와의 관계가 아닌 나 스스로의 재확인과 결속 혹은 합리화일 뿐이다. 상대가 좋으리라 착각하는 나와 마주하고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일방성은 그런 점에서 나르시시즘적이다. 상대는 나를 증명하는 도구나 거울이 된다. 상대로 하여금 나는 견고하고 아름다워진 나를 재확인한다. 그러나 그러한 식의 관계가 오만하고 이기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일은 아도니스가 죽고 나서야 그랬듯이 상대가 상처를 입을 데로 입은 후다. 

 

 암묵적 동의는 동의가 아니다. 암묵적 동의는 가해자의 언어이다. 어떤 피해자의 입에서도 암묵적인 동의라는 말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사랑을 정의하고,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변명이 고작 암묵적 동의라면, 즉 상대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믿는 망상이라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음에는 분명하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러한 종류의 일방성은 평범한 것이 된다. 희롱과 폭력이 만연해지고 그럴수록 사회에서 성적인 것, 에로스적인 모든 것들은 비속한 것, 쾌락적인 것으로 격하된다. 더군다나 유교사회의 강령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한국의 보수적 분위기가 맞물려 성은 사회에서 추방된다. 비밀스럽고 금지된 무언가가 된 섹스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곪아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들, 혹은 시선이 닿더라도 피해자의 입은 손쉽게 막을 수 있는 권력과 위계의 공간. 공연예술계나 법조계, 정치계를 불문하고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곳이 그렇다. 특히 폐쇄적인 집단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의 대부분은 갱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만큼 촘촘한 악의 구조를 구축해놓고 있다. 미투의 흐름은 그 구조 수뇌부의 정곡을 찔러 과감히 허물어버린다. 조직이 폐쇄적이고 불투명해질수록 섹스와 권력이 동일시된다.

 

◆번지르르한 사회

 

 한국의 거의 모든 공간에서 이러한 분위기의 공기를 호흡하며 우리가 솔직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에 대한 개방과 솔직함을 말하는 사람에게 언론과 대중은 저속하고 쉬워 보인다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주입한다. 숨이 막힐 때까지 집요하게 그렇다. 예술도 외설이 되고 생경한 모든 것들에 악담과 마녀사냥을 시작한다. 과거 홍상수 감독이나 배우 김민희를 향한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비난들, 배우 유아인의 생경한 어조에 퍼부은 원색적인 모욕들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또한 여성을 조명하는 사진작가나 SNS에 자신의 몸매를 게시하는 가수, 배우들을 향한 혐오는 도를 지나치고 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에게 향하는 공격성은 많은 전문의가 진단하듯 정신병의 일환이다. 인터넷 공간은 열등 무리의 축제가 되고, 그들은 키보드를 떠나 다시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삶을 이어간다. 그렇게 모두가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사회가 된다. 쟁점에서 벗어난 감정 배설은 우리가 낯선 것들을 조건반사적으로 거부하고 있음의 증거이다. 그리고 성적인 것, 섹슈얼한 것은 대중에게 너무나도 낯선 무언가가다.

 

 한편 문학계의 마광수와 고은은 그러한 의미에서 대조적인 삶이었다. ‘마’가 솔직하다는 이유로 온갖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어간 반면에 ‘고’는 말만 번지르르 이쁘장했을 뿐 뒤에서는 바지를 벗고 고간을 흔드는 추악한 늙은이였지 않은가. 정작 밝혀졌어야 할 추태는 문학계의 거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가 꺼려하고 회피하는 문제였다.

 

 방구석에 앉아 괜찮아, 행복해, 꽃 떨어져 따위의 멋들어진 말이나 굴리는 사람보다 거북하기 그지없는 ‘마’의 글이 위안이 되는 것은 감정의 솔직한 배설이 주는 카타르시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운 단어이든 거친 종류의 것이든지 여하 막론하여 위장된 행복을 구사하는 가짜 입이 뱉는 거짓말보다는 분명 많은 방면에서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로 확인할 수 있듯이 자기검열의 장막을 걷어 더 솔직하고, 꾸밈없는 삶을 구가하는 일은 비단 나를 위한 일만이 아닌 공동체 건강의 도모다.

 

 힐끗거림이 관음증이라면 사랑은 마주봄이다. 우리 사회의 가해자들은 일방적 시선을 마주봄이라 우겼다.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많은 동물들의 서열이 그러하듯이 권력과 정력으로 스스로를 재확인했을 뿐이다. 솔직하지 않은 사회에서 많은 것들이 속으로만 곪았고 여전히 많은 피해자가 남아있다. 우리는 그러므로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설령 그것이 부끄러운 것, 성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하여 오늘의 조건부 사랑이 흘깃거리는, 혼자 하는 수학이 아니라 비로소 솔직함과 진정성으로 나아간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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