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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선고,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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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5월10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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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선고되었다. 여성계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더이상 낙태죄는 없다” 며 환호했다. 2012년 8월 23일 헌법재판소가 “자기낙태죄 조항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을 고려하면, 분명한 진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관건은 기존의 ‘낙태죄’가 어떻게 변경되느냐, 즉 개선입법에 있다.

 

개선입법이 중요한 이유, 단순위헌과 헌법불합치의 결정적인 차이

 

헌법불합치는 위헌, 혹은 합헌에 비해 생소한 개념이다. 표면적으로는 위헌결정과 큰 차이가 없어보일지 모르나 많은 것들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낙태죄사건 헌법재판소 보도자료>에 따르면, 단순위헌의견은 기존 형법 제269조 제1항(이하 ‘자기낙태죄 조항’)이 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명백히 침해한다고 밝힌다. 낙태가 허용될 수 있는 예외적 사유를 법률로써 구성하는 방식은, 요건을 충족하는 임산부에게 ‘낙태가 불가피한 사람’의 지위를 부여하여 법적 책임을 면제하는 것뿐이기에, 모자보건법 자체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임신 제1삼분기 이전의 낙태는 별다른 사유를 요구하지 않고 여성 본인의 판단 아래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힌다.

 

헌법불합치와의 가장 큰 차이는, 해당 형벌조항이 즉시 폐기될 것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사후입법으로 낙태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헌법불합치에 대해서도 “그 규율의 공백을 개인에게 부담한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자기낙태죄 조항, 의사낙태죄 조항은 헌법불합치가 선고되었기에 입법자의 개선입법이 이행되어야 하는, 최장 2020년 12월 31일까지 ‘낙태죄’는 적용된다.

이제 공은 입법부로 던져졌다.

 

낙태죄 폐지 1호법안, 비판과 의의

 

4월 15일 정의당의 이정미 대표는 형법상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확대하는 법률개정안을 발의하였다. 임신 14주까지는 임신한 여성의 요청만으로 다른 조건 없이 임공임신중절이 가능하도록 하고, 임신 중기인 14주에서 22주까지는 기존 사유에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추가된다는 내용이었다.

낙태죄 폐지 1호법안이며, 진보적인 성격을 띠는 정의당에서 발의된 법안임에도 반발에 부딪쳤다. 여성계는 법안이 여전히 임신중단을 형벌로써 제한하고 징벌한다며 비판했다. “헌재 결정문보다 후퇴한 법안”이라는 비판도 존재했다.

 

그러나 현 정부의 상황을 고려할 때, 정의당의 법안 발의는 분명한 의의를 가진다.

4월 28일 기사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낙태죄 폐지법안 발의를 서두르기보다 사회적 공론 형성에 주력하는 방안을 택했다.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최대 다수의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제도개선을 끌어내겠다는 취지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최선의 법안을 위해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하기엔, 정치인들은 종교계의 비난으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 끊임없이 ‘낙태죄’를 둘러싼 논란이 제기되고 국민담론이 형성되었음에도 당정은 법안 발의를 위해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 각종 요인들로 인해 당정의 법안 발의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까지 지연될 것으로 예측된다.

‘단순위헌’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관의 견해 그대로 미뤄지는 법안발의로 인한 규율의 공백은  결국 여성과 의료인 개인에게 부담된다.

 

‘낙태’라는 단어는 ‘태아를 떨어뜨린다’라는 의미를 갖기에, 이미 가치판단이 전제된 용어로서 사용을 지양하였다는 정의당의 입장 역시 주목할 만하다. 즉, 정의당의 법안 발의는 어떠한 불완전성을 가질지언정, 가장 신속히 발의하였고 본질적인 용어를 변화시키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낙태죄가 폐지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낙태죄’는 입법취지와 달리 태아의 생명 보호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했다.

관념적인 논의보다, 실제 이 법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야기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낙태죄’가 존재했기에 임신한 여성들은 임신 유지에 관해 필요한 사회적 논의나 소통이 부재한 상황에서, 안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낙태를 실행해야 했다. 음성적인 낙태 가운데 적절한 의료서비스, 돌봄 등을 제공받지 못했다.

실제로 루마니아의 경우 1966년 ‘낙태금지법’이 도입된 후 모성사망비가 7배 증가했다.

의사와 관계없이 출산된 아이들은 고아원에 버려졌고, 이는 유아 사망률 증가로 이어졌다.

1989년 12월 혁명으로 낙태금지법이 철페된 다음해, 루마니아의 모성사망비는 이전의 절반으로 감소했다.   

 

뿐만 아니다. 인식은 법을 만들었고, 법은 인식을 강화했다.

 

‘낙태죄’를 다룬 기사의 덧글을 통해 여론을 추정할 수 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의 덧글 한 편에는, 낙태는 살인이라는 덧글 또한 존재한다. 그들은 낙태를 한 여성은 문란한 여성이며, 낙태죄가 폐지된다면 의료기록을 남겨 낙태한 여성을 분간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무엇이, 누가 여성을 임신시켰는지 묻지 않는다. 또한 어떠한 환경이 여성들이 임신을 지속할 수 없게 하는지도 고려하지 않는다.

 

형벌은 재생산권에 대한 여성의 독립적인 의사를 배제하고 임신을 여성의 문란으로 연결시키도록 부추겼다. 2018년 5월 24일, 낙태하려는 여성을 “성교는 하되 책임지지 않는” 사람으로 서술한 법무부 변론요지가 이와 같은 인식을 대표한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언명은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헌법불합치 의견 中)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는 현행법의 논의를 넘어, 임산부가 모든 방면에서 건강하게 생활하고 출산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지하철 임산부배려석을 비워두는 기본적인 배려도 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에게 속해야 할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을 제한하며 처벌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에 대한 고찰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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