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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금니를 깨물 때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03월15일 20시59분

작성자

  • 이달곤
  • 前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 前행정안전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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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국문학에서는 은근과 끈기를 우리 민족의 특질로 뽑았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을 보면 ‘빨리 빨리’가 우리의 특징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다 민주화 과정에서 역동성이라는 좋은 인상을 주고 있는가 싶었다. 그러나 최근 유행은  힐링(healing)과 소통이다. 상처와 대결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전제를 극복하고 전환기에 대비하여야 할 때이다.  

 

연속되는 전환기와 비관론

한국 사회는 전환기의 연속이었다. 압축 발전국가의 경험은 우리에게 자신감도 주었지만 동시에 불안감을 항상 수반하였다. 우리는 또 하나의 전환기 입구에 서 있다. 늘어나던 인구가 줄어들면서 노령화되는 현실은 근대 이후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전체인구는 물론이고 생산가능인구도 곧 준다. 노령인구는 계속 늘어 초고령사회(aged society)가 얼마 머지않았다. 경제활력만으로도 아시아의 용으로 불린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외환위기와 미국발 금융위기로 두 번이나 내려앉았다. 그래도 기본체력은 탄탄하다고도 하는 당국자도 있지만 불확실한 진단인지 불안해하는 얼굴들이다. 곧 경제 활력은 떨어져 평지에 도달할 것이다. 기술 경쟁력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지 않고 새로운 수요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 평지가 1-2% 대의 넓은 분지(盆地)일 것이 분명하다. 비관적이다.

 

정치에 국민이 분개하고 있다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고 하지만 정치가 경제를 살리고 시민사회의 성숙에 기여할 것으로 믿는 사람은 아예 없다. 개선될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백성은 없다. 80년대 권위주의를 밀어버렸듯이, 판을 ‘뒤엎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번 총선후보자들의 공약을 보라. 길거리 넓히고 다리 놓고 노인 용돈 주는 것이 전부다. 정치공학과 음모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와중에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리더십이 구성되고, 잘 못 뽑았다고 후회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난다. 분개하고 있다.


무력감에 빠졌다

사회 분위기는 어떤가? 근면과 의지로서 이룩한 산업화의 경험적 실체성은 꼰대들의 잔소리나 지적질로 여겨진다. 100개가 넘는 텔레비전 채널을 보면, 먹고 입고 바르는 것, 성형수술, 사랑타령, 연예와 코미디, 노래와 춤, 정치만담, 사건사고로 꽉 찼다. 청년을 동정하여야 식견 있는 인사가 되고, 이슈의 본질에 대한 논쟁보다는 수신형 소통을 최고 위치에 놓고 있다. 오락이 시대의 흐름이고 연약함에 대한 연민이 리더의 표상이다. 서점의 베스트셀러는 비판과 비관에 꼽혀있다. 일회성 관광객 털이 상술로 다시 찾을 관광객이 없어지는 것이 서울명동이나 제주의 길바닥 현실이다. 무력감이다.  


불안을 의지하여 잠재울 순 없다

남북관계는 대치를 넘어서 진격과 해방전쟁이라는 식의 불안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30년 전의 상태로 갔다. 다시 돌아오려면 그 단계와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릴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쓸 수 있는 상황을 수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문제는 안정균형(stable equilibrium)의 달성이 운명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다는 데 있다. 각오가 필요하다. 미국이나 중국에 의지하여 불안을 잠재우고 살 수는 없다. 적극 나서야 한다.  국제관계 리더들을 배출하고 이스라엘을 배우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지구적 경쟁은 경제를 중심으로 문화, 인재, 자원, 정보의 영역까지 확장되었다. 국제경쟁에 노출되지 않은 영역이 없다. 이미 먼저 간 국가들은 언행(言行)으로 세계시민이 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냉전의식과 소국행태로, 미국인가 중국인가 하면서 양자택일적 논쟁에 머물고 있다. 경쟁은 오직 실력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천천히 서두르자

얼마 전 오만(Oman)의 술탄 까부스 국립대학교를 방문하여 여학생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류 이야기가 나왔다. 한 여학생이 ‘우리는 한국이 좋아서 한류에 끌리는 것이지, 그저 K-팝이나 드라마에 입 벌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국제사회에서 공인(公人) 대우를 받은 지도 제법 되었는데 아직도 우물 안에서만 엄청 바쁘게 지낸다.

천천히 서둘러야(Festina Lente) 하겠다. 의지가 중요하다.  말만하지 말고 이제 어금니를 깨물고 행동으로 나가야 한다. 이번에 오는 전환기는 논리적으로는 비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국민의 땀과 인내, 그리고 정부와 언론의 각오와 의지로 낙관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정의롭고 창조적인 시스템으로 글로벌 한국을 만드는 공공의식(public minds)과 공공가치(public value)를 뿌리가 되어야 한다. 산업화의 박정희와 정주영, 민주화의 김영삼과 김대중이 논리로 산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비관의 논리를 끈기와 의지로 낙관의 역사를 두개나 만든 인물들이다. 

 

언론의 시관(時觀)을 미래로

5년짜리 정권이 놓치고 있는 과제가 얼마나 많은가? 정치권과 정부는 포풀리즘(populism)과 단기 과제에 파묻혀 전환기의 절벽이 다가오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정치를 만사의 우위에 놓고 있는 사회구조와 분위기가 먼저 전환되어야 한다. 1960-70년대 발전공화국시대를 완전히 탈바꿈하고 성숙한 세계시민국가로 나갈 수 있는 의지의 시관(時觀: time perspective)을 갖도록 언론이 국민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잠자는 용감한 소영웅들을 깨워주어야 한다. 언론은 막연한 정보전달자로서는 전환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의지의 한국인을 길러야 한다. 언론 리더십이 비관을 낙관으로 바꾸는 장을 만드는데 시민과 함께 나서야 한다. 토론과 논쟁의 장을 활짝 열고 전환기의 주도자로 변신해주어야 한다.

 

분야마다 국적을 불문한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실제로 정치가 좌지우지하는 영역은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줄어들어 있다. 정보혁명으로 정의롭지 못한 사인적(私人的) 행위는 바로 질타를 받았다. 남몰래 꼼 수 부리다 넘어진 구식 리더의 무덤이 넘쳐난다. 언론이 공권력 행세를 하지 말고, 진정으로 시민사회의 품으로 오게 되면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다. 연예에 빠지고 허영에 빠진 화면과 지면을 바꾸어야 한다. 구태 권력과 유산 받은 거대자본을 제대로 감시해야 한다. 기술창조하고 첨단기업 경영하는 주체들과 시민사회가 사회의 추동력을 뿜으며 앞장서고, 언론이 이들을 유기체적으로 묶어 영웅을 만들어 낸다면, 위기를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방향을 틀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이 전환기의 영웅으로 올라설 수 있다. 

 

시계(視界)를 세계로

보통 시민이라도 그 활동무대를 세계 운동장으로 할 수 있게 시계(time horizon)를 확장하여야 한다. 언론부터 자질구레한 사건사고와 의식주에 몰입된 보도를 먼저 바꾸어야 한다. 세계적 이슈도 더 많이 보도되어야 하고, 관광상품이 보다는 정의롭고 창의적인 나라 이야기가 더 많이 분석.보도되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인체와 경제가 어떻게 상호관계에 있는지도 상식의 수준이 될 정도로 알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세계화는 20년 전에 화두로 삼았지만 별로 변한 것이 없다. 현수막만 요란했다. 세계적 수준의 첨두(尖頭) 활동에 써야할 에너지가 국내에서 지연, 학연, 인맥 카르텔을 만드는데 너무나 허망하게 허비되고 있다. 밖으로 나가자. 서울대학교수의 그 높은 학벌도 답습과 반복, 그리고  연구비 경쟁의 도구가 되고 있다면 다른 분야는 어떨까? 전환은 플라카드(placard)로 되지 않는다. 어금니로 하여야 한다. 언론은 앞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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