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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M: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3월29일 18시2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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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71) 모용홍의 서연(AD384)

 

모용수가 업 방향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북지(섬서성 빈현)장사 모용홍은 관동 쪽으로 도망가서 이민족 수 천 명을 규합한 다음 장안 동쪽 80KM 지점인 화음(섬서성 화음)에 진을 치고 스스로 도독섬서제군사 및 제북왕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삼촌 모용수를 승상으로 삼는다고 발표했다.(AD384년 3월) 부견은 부희와 부예, 그리고 두충과 요장에게 5만 군사를 배치하여 모용홍을 토벌하게 하였다. 요장은 부예에게 전투를 걸지 말고 그냥 모용홍이 도망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거칠고 난폭한 부예는 말을 듣지 않고 모용홍을 공격하다가 패사했다. 두충에게 공격을 받은 모용충은 군사 8천을 이끌고 화음의 친형 모용홍에게로 갔다. 모용홍의 군사는 10여만을 넘기게 되었다.

 

군사력이 강해지자 모용홍은 부견에게 전연의 황제였다가 AD370년 전진에게 망하여 포로 신세가 된 친형 모용위를 자신에게로 돌려보내 주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은 업으로 돌아가고 또 하북 중산에 웅거하고 있는 숙부인 모용수에게 잘 말하여 전진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겠다고 편지에 썼다.  

 

부견은 당장 모용위를 불러 동생과 숙부 모용수의배신 행위를 꾸짖었다. 모용위는 전혀 모르는 일이기도 하려니와 자칫하면 자신의 목이 날아갈 지도 몰라 피가 나도록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부견은 모용위의 잘못이 아님을 깨닫고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 모용위에게 편지를 써서 모용수, 모용홍, 모용충를 반성하고 깨우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모용위는 몰래 모용홍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신이 죽으면 즉각 황위에 올라 전연을 계승하라고 명을 내렸다. 모용홍이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진격했다. 이것이 서연의 개국이다. (AD384년 4월)  

 

요장은 부견에게 부예의 전사 소식을 보고하면서 패전에 대해 사과했다. 부견은 화가 나서 요장이 보낸 전갈을 모두 죽였다. 요장은 겁이 나서 북쪽 천수(감숙성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거주하던 강족 주민들은 요장을 열렬히 환영하며 동족을 규합했다. 순식간에 5만여 호가 요장 밑으로 들어왔다. 요장은 스스로 만년진왕 대장군 대선우라고 칭하면서 천수에서 후진을 건국했다.(AD384년 4월)   

  

 

(72) 부견의 장자 장락공 부비의 배회(AD385)

 

해를 넘겨 AD385년이 되어도 업성이 떨어지지 않자 모용수는 업을 수도로 삼을 생각을 접고 북쪽으로 갈 생각을 굳혔다. 모용수에게 호응하던 군사들도 모용수의 능력을 의심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모용농과 모용온이 흔들리는 이민족을 잘 설득하고 규합하여 모용수의 군대가 분열되는 것을 잘 막았다. 4월에는 동진 유뢰지의 지원군이 업성 부근에 당도했다. 업성을 두고 모용수의 포위군과 동진 유뢰지의 지원군과 전진 조정 부견이 보낸 지원군 간에 치열한 공방이 지루하게 지속되었다. 업성 안의 기근은 더욱 심해졌다. 부비는 곡식을 채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업성을 나와 주변을 경략하고 다시 들어왔다. 기근이 심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부비는 업성을 버릴 결단을 내렸다. 애초에는 장안으로 가려고 했으나 8월 호관(산서성 장치북쪽)에 와있던 전진의 유주자사 왕영이 초청하자 부비는 업의 주민 6만 명을 이끌고 성을 나와 서쪽으로 향해 태원쪽으로 나아갔다. 연왕 모용수는 그제야 모용화를 보내 업에 진수하게 하였다.(AD385년8월) 

 

 

(73) 요장과 모용충의 장안 진출 경쟁(AD384)

  

모용홍의 군대가 장안을 향해 진격하는 동안 모용홍의 부하 고개 등은 모용홍의 덕망과 지략이 동생 모용충에 못 미치는 데다 지나치게 가혹하고 준엄하였으므로 모용홍을 살해하고 모용충을 황태제로 옹립하였다. 고개는 상서령이 되었다. 부견의 공격을 받고 북지(섬서성 빈현)에서 대치하고 있던 요장은 즉각 아들 요숭을 인질로 보내와 화의를 요청했다.   

모용충의 대군이 장안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부견은 서둘러 북지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부방을 보내 여산(섬서성 임동)을 지키게 하고 부휘를 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아 5만 군사로 방어하게 하였다. 모용충은 부휘의 5만 군사를 정서(섬서성 화현)에서 대파했다.

 

부견은 3만 군사와 함께 강우와 어린 아들 부림을 보내 막았으나 모용충은 그들을 모두 패사시키고 마침내 장안 아방궁에 입성했다.(AD384년7월) 어리 적부터 남색으로 총애를 받아왔던 모용충이 장안성을 압박해오자 부견은 당을 치고 통곡하며 말했다.

 

“ 내가 일찍이 왕경락(왕맹)의 말을 듣지 않고

  저 하얀 선비족놈(白虜, 백노)을 살려 뒀다가 이 수난을 당하는구나! “ 

 

당시 신통력으로 소문이 난 농서성의 처사 왕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이한 술법으로미래의 일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서 사람들에게 큰 숭앙을 받았다. 요장과 모용충이 모두 영입하고자 했는데 왕가는 장안의 부견에게로 왔다. 부견은 하늘이 자신을 돕는 것이라고 여기고 승려 도안과 함께 외전에 모시고 모든 일을 자문했다.(AD38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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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모용위의 부견 암살 모의(AD384년11월)

 

당시 장안에는 선비족이 약 천여명 살고 있었다. 모용숙이라는 사람은 모용위와 모의하여 부견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모용위의 아들 결혼식이 있었으므로 부견을 집으로 초대하여 그 때 죽이자는 계획이었다. 부견도 아무 의심없이 갈 생각이었으나 큰 비와 벼락이 치면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모용위의 암살 계획이 드러나 부견이 그들을 꾸짖었다. 모용숙과 모용위는 부견의 개인적인 은혜는 고마우나 연나라의 문제를 눈감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답변했다. 부견은 모용위와 모용숙과 성안의 모든 선비족들을 몰살시켰다.(AD384년11월) 모용충은 아방궁에서 공식적으로 서연 창건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용렬했다. 상벌에 기준이 없이 제멋대로였다. 모용충의 사촌 모용유가 이렇게 내뱉었다.    

 

“ 열 명 중의 우두머리는 나머지 아홉보다 재주가 뛰어나야 안정될 것인데

  중산왕 모용충은 재주도 못 미치고 공적도 없으면서    

  교만과 사치가 극심하니

  거의 일을 풀어나가기 어려울 것 같구나.“

 

(75) 부견과 모용충의 격돌(AD385)

 

 

AD385년 정초 아침에 부견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 향응을 베풀었다. 당시 기근이 심하고 또 세금을 걷기가 어려웠으므로 성안의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음식을 본 장수들은 입안에 음식을 넣고 집으로 돌아가 식구를 먹일 정도로 사정이 악화되었다.

 

아방궁에서 황제자리에 오른 모용충은 수시로 전진의 부견 군사와 전투를 벌여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모용충은 상서령 고개를 보내 야밤에 장안성 남쪽을 습격했으나 태자 부굉이 훌륭하게 고개의 군사를 격퇴했다.(AD385년1월) 이어서 부견은 아방궁을 공격하여 모용충을 크게 격파하였으나 후방습격이 두려워 아방궁으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부견이 모용충과 각축하는 동안 부견의 아들 부휘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예주(낙양)에서 자주 모용충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부견이 그런 부휘를 몹시 꾸짖었다. 

 

“ 너느 나의 재주있는 아들이 아니냐.

  큰 군대를 가지고도 백로(선비족)에게 

  자주 패배하니 살아도 어디에 쓰겠느냐?“ 

 

부휘는 분개하여 자살하고 말았다.(AD385년 3월) 두 달 뒤 5월 모용충은 장안을 습격했다. 부견은 전쟁을 독려하는 중에 온 몸에 화살을 맞았다. 장안성은 모용충 군대의 폭행과 약탈로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도망가고 없었다. 도로가 끊어지고 집에는 연기가 없었다.  

 

모용충의 군영에 속했던 사람이 부견에게 와서 몰래 군사를 파견해주면 모용충의 군문을 열어 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말하자면 결사대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부견은 자신의 군사를 죽을 것이 확실한 적지로 차마 보낼 수가 없어서 망설였다. 계속해서 결사대 요청이 오자 부견은 700명 기병을 골라 보내 모용충 군영내로 들어가 불을 놓았는데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슬픔에 잠긴 부견은 도참서의 말에 “황제가 오장산(섬서성 기산 동쪽)으로 나오면 오래 간다.”는 말을 믿고 부인과 기병 수 백 명을 거느리고 장안을 빠져 나갔다. 아들 부굉에게 장안 수비를 맡겼다. 부굉은 장안을 수비할 능력이 없었다. 장안을 나와 서쪽 하변(감숙성 성현)으로 달아났다. 전진의 백관은 뿔뿔이 흩어지고 사예교위 권익 등 수 백 명은 요장의 후진에게로 갔다. 부굉이 하변에 도착했지만 남진주자사 양벽은 부굉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양벽은 부굉의 누나 순양공주의 남편이니까 매형인 셈이다. 순양공주는 남편을 버리고 부굉을 따라 나섰다. 

  

 

(76) 요장의 부견 체포와 부견 죽음(AD385)

 

약 두 달 뒤인 7월 부견은 오장산에 도착했다. 끝까지 따라온 호위기병은 10여기였다. 후진 요장은 오충을 보내 부견을 체포했다. 요장은 부견에게 전국새를 요구했다. 그렇게 하면 은혜를 베풀 수도 있다고 회유했다. 부견은 눈을 부릅뜨고 요장에게 욕했다.

 

“ 어린 강족 놈이 감치 천자를 핍박하느냐?

  옥새는 이미 동진으로 보냈으니 내게는 없다.“  

 

요장은 다시 윤위를 보내 양위하라고 유세했다. 부견이 요장을 꾸짖었다.

 

“ 선양이란 성현의 일이다.

  너 같은 반란 도적에게 어찌 선양할 수가 있겠느냐!“

 

부견은 윤위에게 전에 직책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윤위는 상서령사로 있었다고 대답했다. 부견이 탄식했다.

 

“ 경은 왕경락의 무리이고 재상의 자질을 지녔는데 

  내가 그동안 그것을 몰라 봤으니 망해도 마땅하구나! “

 

평소 부견은 요장을 매우 아끼고 후대한 까닭에 자신의 처지에 더욱 화가 났다. 자신의 딸들이 욕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보와 부금을 죽였다. 그리고 요장에게 빨리 죽여 주기를 간청했다. 요장은 사람을 보내 부견을 신평(섬서성 빈현)의 절로 옮겼다. 부견은 절 안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AD385년7월26) 부견의 나이 48세 였다. 부인 장씨와 어린 아들 부선은 자살을 택했다.      

 

 

(77) 사마광의 평(AD385)

 

부견의 죽음에 대하여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은 이렇게 평가를 내렸다.

 

“ 사람들은 부견이 죽은 것이 

  모용수나 요장을 미리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은 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한의 허소는 위무제(조조)를 평가하면서 

  평화기에는 능력 있는 신하에 불과하고

  난세에는 간교한 영웅이라고 했습니다.

  부견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올바른 길을 잃지 않도록 했다면 

  모용수와 요장은 전진의 능력있는 신하였지 어찌 난을 일으켰겠습니까.  

  부견이 망한 이유는 많이 승리한 데 따른 교만이 원인이었습니다.

  위문후가 오나라가 망한 이유를 

  재상 이극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자주 싸우고 자주 이겼기 때문입니다. ’

  문후가 다시 물었습니다.

  ‘ 그것은 나라의 복일 텐데 어찌 나라가 망하는 길인가?

  이극이 대답했습니다.

  ‘ 자주 싸우면 백성이 고달프고

   자주 이기면 군주가 교만해 집니다.

   교만한 군주가 피곤한 백성을 부리면서

   아직 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전진왕 부견이 이것을 꼭 빼닮았습니다.“   

 

부견의 죽음을 알게 된 진양(산서성 태원)에 있던 부비는 정중히 장례를 치른 뒤 황위에 올랐다. 9월에는 장자를 시중으로 삼고 조정인사를 마무리 하였다.  

 

 

(78) 모용충의 피살(AD386)

 

서연의 황제가 된 모용충은 업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후연의 모용수의 힘이 강력하고 또 장안지역을 통치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여 그곳에 눌러 앉을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모용충의 군대는 거의 모두 동쪽 하북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므로 장안의 관중지역에 정착하고 싶지낳았다. 좌장군 한연이 그런 불만을 이용하여 모용충을 죽이고 장수 단수를 연왕으로 삼고 연호를 창평으로 고쳤다.(AD386년1월) 그러나 서연의 복야 모용항과 모용영은 단수를 습격하여 죽이고 묘용의를 세우고는 40만 여명을 이끌고 장안을 떠나 동쪽 고향으로 향했다. 모용항의 동생 모용도는 모용의를 죽였다. 모용항은 동생의 패역한 짓거리에 화가 나 무리를 거느리고 떠나 버렸다. 모용영은 고립된 모용도를 습격했고 모용도는 형 모용항에게로 달아났다.  

 

모용항은 모용의의 후계자로 모용요를 세우고자 했지만 모용영은 모용충(忠: 죽은 모용衷과 한자가 다름)을 세웠다. 그러나 부족들의 모용영에 대한 평판이 더 좋았으므로 부족들은 모용요를 버리고 모용충에게로 갔다. 문희(산서성 문희현)에 이르러 모용수의 반응이 두려워 더 나아가지 못하고 거기서 성을 쌓고 머물렀다. 그러나 곧 조운이 모용충을 죽이고 모용영을 추대하면서 후연에 번속하겠다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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