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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10D:3대 인재에도 멸망한 후진(後秦)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5월03일 17시4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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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1) 석지가 후조를 계승(AD350)

 

양국의 신흥왕 석지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영녕이라고 하면서 여음왕 석곤을 상국으로 삼았다. 주변에 흩어져 웅거하는 모든 이민족은 석지에게 지지를 표명하엿다. 석지는 요익중에게 우승상, 친조왕이라고 칭하면서 특별히 우대하였다. 요익중의 아들 요양이 배포도 크고 용감하며 지략이 뛰어났으므로 주변 모두가 그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했지만 요익중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석지는 요양을 예주자사 신창공에 책봉했고 부건에게는 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에 봉하였다. 

 

AD350년 4월 석지는 10만 군사를 석곤에게 붙여서 왕랑과 장거 등과 함께 남쪽 염민의 위나라를 공격했다. 6월에 석곤의 군사는 한단을 점거하고 번양(하남성 내황현)에서 유국과 협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염위의 장군 왕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석곤의 군대는 크게 깨졌다. 유국은 군대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22) 부건의 관중 장악과 장안 입성(AD350)

 

석지의 거기장군 왕랑이 석곤과 함께 업을 공격하러 떠난 사이 왕랑의 사마 두홍은 장안을 점거하고서 스스로 동진의 정북장군 및 옹주자사라고 부르면서 장거를 자신의 사마로 삼았는EK. 부홍의 아들 부건은 두홍의 장안을 탐내어 뺏을 생각이었다. 따라서 두홍이 그 생각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겉으로는 석지가 내린 후조의 관작(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을 받는 척하면서 부하들을 하남 요지에 임명하여 서쪽(즉 장안)에 뜻이 전혀 없는 것 같이 위장했다. 이렇게 위장하여 두홍을 안심시킨 뒤 부홍은 스스로 동진이 내린 직책, 즉 정서대장군 및 도독관중제군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격적으로 군대를 몰아서 두홍을 쳐들어갔다. 동생 부웅은 5천 군사로 동관으로 들어가고, 부청은 7천 무리로 지관(하남성 제원)으로 들어갔다.

 

부웅이 동생 부청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 성공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북에서 죽을 것이고 

  나는 하남에서 죽을 것이다.“  

 

두홍은 장수 장선과 1만 3천의 군사를 보내 동관의 북쪽에서 부웅과 부청의 군사를 맞아 싸웠으나 장선은 참패하고 말았다. 두홍은 관중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부웅 부청의 군사를 대적했으나 두홍의 아우 두욱이 부건에게 항복함으로써 모든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주변 모든 성읍들은 부건에게 귀부하였지만 두홍은 장안성을 닫아걸고 대치하면서 항복하지 않고 버티었다.(AD350년8월)

부청은 위수 북쪽에서 장선의 나머지 군사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장선이 잡히자 삼보(장안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눈 지역)의 모든 성과 보루들이 부청에게 항복했다. 10월 부건이 장안으로 급히 들어오자 석 달간이나 버티던 두홍과 장거도 성을 버리고 서쪽의 사죽(섬서성 주지)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부건은 11월 27일 장안성에 입성했다. 당시 백성들은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살아있었으므로 부건은 참군 두산백을 동진 건강에 보내 형식적으로 장안이 진나라 소유의 땅이 된 것처럼 승리를 바쳤다. 다음해(AD351년 1월) 부건은 장안에서 대진(大秦:역사에서는 전진前秦)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천왕자리에 오른다. 

 

 

(23) 요익중의 석지 원조(AD351)

 

염위 주군 염민은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양국(하북성 형태)을 포위하고 100여일이나 공격하였다. 다급해진 석지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태위장거를 급히 전연의 모용준에게 보내 전국새를 주면서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하북성 조강에 있는 요익중에게도 손을 벌렸다. 요익중은 아들 요양에게 2만 8천 정예기병을 파견하면서 말했다.

 

“ 너의 재주가 염민의 열 배이니 

  잡아서 효수하지 못하면 날 볼 생각을 말아라.“

 

요익중은 동시에 전연의 모용준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군의 필요함을 역설했다. 모용준은 3만 군사를 열관과 함께 파병했다. 염민은 모용준이 석지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대사마부 종사중랑 상위를 전연에 사신으로 보냈다. 모용준은 길러준 석씨를 배반한 염씨를 극렬하게 힐난했다. 상위가 항변했지만 모용준은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염민은 양국을 포위한 채 석지의 지원군 요양, 여음왕 석곤 및 모용황이 보낸 열관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그러나 수십만 석지-요익중-모용황 연합군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염민은 수만의 군사를 잃은 채로 10명의 기병과 함께 겨우 숨어서 업성으로 돌아왔다.  염민의 군사 중에서 사로잡힌 대선우 염윤과 좌복야 유기는 물론 포로 약 10만을 모두 죽였다. 요익중은 염민을 생포해 오지 못한 요양을 곤장100대를 때려 질책했다.(AD351년 3월)

 

 

(24) 유현의 석지 살해와 후조 멸망(AD351)

  

양국을 무난히 방어한 조왕 석지는 장수 유현과 7만 군사를 일으켜 업성의 염민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석지의 군대가 업성 부근까지 도달하자 겁이 난 염민은 위장군 왕태와 상의하려고 했지만 왕태는 병을 핑계로 의논하기를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염민은 홀로 전쟁에 나섰고 유현을 대파하고 3만여 명을 참살했다. 유현은 염민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이 돌아가서 석지를 암살하여 보답하겠다고 하자 염민은 그를 믿고 회군하여 돌아갔다. 

 

양국으로 돌아온 유현은 석지와 승상 석병, 그리고 태재 조서 등 10여명을 시해하고 그 머리를 업으로 보냈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후조의 뿌리가 완전히 절멸된 셈이다. AD319년 석륵이 후조를 세운지 꼭 32년 만에 망한 것이다. 염민은 석지의 머리를 사거리에서 태워버리고 유현에게 상대장군 및 대선우 기주목의 직책을 내렸다.(AD351년3-4월) 그러나  몇 달 뒤 유현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염민의 업을 공격했으나 패해서 돌아온 뒤 스스로 양국에서 황제를 칭다. 유현은 그 다음해(AD352년) 염민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죽었고 염민 또한 그 해 전연 모용준의 장수 모용각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계성(북경) 처형되었다(AD352년 5월3일). 염민의 아들 염지가 업성에서 버티었으나 7월 명위의 장수 마원이 성문을 열고 항복함으로써 염위는 건국 2년 만에 멸망했다. 모용준은 염지를 죽이지 않고 해빈후라는 작위를 주어 생계를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2년 뒤 반역을 모의했다는 무고로 결국 모용준에게 죽었다.    

 

후조가 멸망하자 요익중은 사신을 동진의 수도 건강으로 보내 항복을 받아 달라고 해왔다. 동진에서는 AD351년 5월 사지절 육이대도독, 독강북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대선우 고릉군공으로 봉하고 그의아들 요양에게도 지절, 평북대장군 및 도독병주제군사,병주자사, 평양현공라는 직책을 내렸다.  

 

 

(25) 요익중의 사망과 요양(AD330-AD357)의 계승(AD352)

 

요익중은 AD352년 깊은 병에 들었다. 이 때 나이가 72세였으니 병이라기보다 노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2명의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  석씨(석륵과 석호의 후조 왕조)가 나를 매우 후하게 대해 줬으니

   나는 평생 그들을 위해 힘을 다하려고 애썼다.

   지금 석씨가 없어졌으니 중원에 주인이 없어진 셈이다.

   내가 죽거든 너희들은 서둘러 진(동진)으로 가서

   마땅히 신하로써의 절개를 지키며 

   옳지 않은 일(반란)은 도모하지 말아라.“

   

요익중이 죽자 요양은 죽음을 비밀에 부친 다음 6만호를 인솔하고 남쪽으로 가서 양평(산동성 관도), 원성(하북성 대명), 발간( 산동성 당읍) 등을 함락시킨 다음 확오(산동성 사평)에 주둔하였다.  

 

요양은 그 전 해 장안에서 건국한 전진의 군사와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고 남쪽 형양(하남성 형양)으로 옮겨가고 나서야 요익중의 장례를 선포하였다. 얼마 후 요양이 군사를 일으켜 낙양부근을 공격하다가 자신의 말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한 살 아래 동생 요장이 자신의 말을 주었다. 요양이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참이냐?“   

 

요장이 말했다.

 

“ 다만 형님이 사시면 되는 것입니다.

  저들은 저 요장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침 구원병이 도착하여 요양과 요장 형제는 모두 구출되었다. 요양은 다섯 동생을 동진에 인질로 보내 귀부하였다. 동진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요양에게 초성(안휘성 박현)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요양은 혼자 말을 타고 회하를 건너 수현으로 가 수현주둔장군 사상(謝尙)을 만나 보았다. 사상은 주변을 모두 물리고 예를 다하여 요양을 만나 보았는데 처음 만났으나 마치 평생의 친구처럼 반가이 맞았다. 요양은 박학하고 담론을 잘하였으므로 강동사람들이 그를 매우 중요시 하였다.   

 

 

(26) 동진에 대한 믿음 상실(AD352)

 

수춘에 주둔한 동진 장군 사상과 귀순한 요양은 함께 전진의 장수 장우가 주둔한 허창을 공격하였다(AD352). 동진의 군대가 허창을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부건은 동생 부웅, 부청 등을 보내 장우를 지원했다. 사상은 전진에 대패하고 모든 것을 요양에게 부탁했다. 요양은 이 때 동진의 무능력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부건은 장우를 대신해서 양군을 예주자사로 임명하여 허창르 맡겼다.

 

북진정책을 주창하던 은호는 이번 수춘의 패전으로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북벌에 대한 생각을 접지는 않았다. 왕희지가 음호에게 편지를 보내 북벌전쟁을 포기해야 한다고 간곡히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은호는 학교마저 폐지하고 학생들을 군대에 동원하였다. 지난번 패전했던 사상이 다시 허창에서 이겨 전진의 예주자사 양군을 물리쳤다.    

 

 

 

 

(27) 요양과 은호의 갈등(AD353)과 전연에 투항(AD354)

 

요양은 이 즈음 역양(안휘성 화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북쪽의 전진과 전연의 세력이 너무 강하여 북벌의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군대를 동원해 농사와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수춘에 주둔하던 은호는 그런 요양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요양의 동생들을 가두고 또 자객을 보내 여런 번 요양을 암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객들은 모두 요양을 존경하였으므로 자객을 보낸 사실을 요양에게 알려주고 말았다. 전진에서 투항한 안북장군 위통이 죽고 그의 동생 위경이 우두머리가 되자 은호는 그를 이용하여 요양을 습격하게 했다. 요양은 5천명이나 되는 위통-은호의 무리를 격파하고 군대를 모두 자신의휘하로 흡수해버렸다. (AD353) 은호는 화가 나서 요양을 역양에서 여대(하남의 수양현)로 옮기도록 명령을 내렸다. 두려움을 느낀 요양은 참군 권익을 은호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은호는 권익에게 이렇게 투덜거렸다.

 

“ 요평북 장군(요양)께서 

  매번 거동하시는 것이 제멋대로라서

  보필하는 도리를 잃은 것 같습니다.“

  

권익이 이렇게 은호를 설득했다.

 

“ 평북장군께서는 영웅의 자태를 가지고 뛰어난 군사력을 지녔지만

  동진황실에 귀부한 것은 바로 조정에 법칙이 서 있고

  훌륭한 재보들이 조정을 떠받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참소하는 가벼운 말에 흔들려 

  평북장군을 의심하고 계시니 문제의 발단은 평북장군이 아니라 

  이 쪽에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은호가 이렇게 되물었다.

 

“ 그렇다면 어찌 평북장군이 

  내 부하들을 죽이고 

  내 말까지 빼앗을 생각까지 하였단 말이오?”    

 

권익이 답했다.

 

“ 성스러운 동진 조정에 귀부한

  평북장군이 어찌 죄없는 사람을 죽였겠습니까?

  당연히 죽을죄를 지었으니 죽인 것입니다.“

  

은호가 다시 물었다.

 

“ 말을 약탈한 것은 무어라 대답하겠소?”

 

권익이 답변했다.

 

“ 이유 없이 평북장군을 죽이려는 

  장군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니

  진정으로 장군께서 평북장군을 해할 생각이 없다면

  그까짓 말 몇 필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권익의 설득에 은호는 혀를 내둘렀다.

 

“ 어찌하여 오해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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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와 요양의 오해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여기서부터 가라앉았다. 은호는 전진의 중신 양안과 뇌약아에게 사람을 몰래 보내 주군 부건을 암살할 계획을 실행에 옮겼었다. 뇌약아 또한 그리하기로 거짓 약속하였으므로 은호는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마침 장우가 부건에 대해 여러 불만이 쌓이자 장안에서 반란을 일으켰고(AD353년 7월) 은호는 자신의 암살계획도 성공했으리라고 믿고 수춘에서 북벌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요양을 선봉으로 삼았다.(AD353년10월) 요양은 은호의 군대가 뒤를 따를 것을 알고 거짓으로 군사를 도망가게 한 다음 매복시켜 두었다. 은호는 요양의 군사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뒤쫓아 왔다가 매복된 요양군에게 대패하였다. 포로 또는 사상자만 1만 명이 넘었다. 요양은 모든 물자를 수거한 뒤 형 요익에게 산상(안휘성 몽성현)을 지키게 했다. 은호는 초성(안휘성 박현)까지 물러나 주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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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5월03일 17시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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