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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4 북량(H)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4월18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4월18일 16시4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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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44] 서진 걸복치반과 북량 저거몽손의 무위전투(AD422년 9-10월)

 

북량 저거몽손은 전장군 저거성도와 1만 기병을 보내 영남(감숙성 천축현)지역을 침범하고서 오간(감숙성 무위)부근에 주둔했다. 서진 걸복치반은 정북장군 출련건과 기병 6천을 보내 북량의 침략군을 토벌하도록 시켰다. 다음 달 10월 저거성도와 출련건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저거성도가 패배하면서 포로로 잡혔다.

 

북량이 하와 유송과 연대하게 되자 난주에 도읍을 하고 있던 서진의 걸복치반은 남북으로 협공을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유송이나 북위 중에 한 나라와 연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하나라와 북량이 연합하고는 있는 유송보다는 유송을 정벌하기 위해 혈안이 된 북위와 연대하는 것이 훨씬 실익이 있었다. 유송에서는 창업자 유유가 병사한데다 북위의 영웅 탁발사가 대군을 이끌고 남정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송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걸복치반은 상서랑 막자아호 등을 파견하여 북위에 알현하도록 하고 황금 200근을 바치면서 충성을 맹세했다. 아울러 북위에게 유송을 치더라도 배후 하나라를 염려할 필요는 없으며 자신이 계획을 세워 혁련발발을 정벌하겠다고 약속했다.   

 

[45] 저거몽손의 서진 걸복치반 암살계획(AD423)

 

저거몽손의 영토 북쪽에는 유연이라는 흉노계열 유목 부족국가가 있었다. 지금의 AD300년 경 부터 몽고와 러시아 남부지역 광활한 땅을 차지하고서 중국의 영토를 노략질하던 무리였는데 이 유연이 AD423북량을 침략해 들어왔다. 저거몽손은 장자이면서 세자였던 저거정덕을 보내 유연무리를 방어하도록 했다. 그러나 저거정덕의 경기병 부대가 유연에게 패하여 전사하자 저거몽손은 둘째 아들 저거흥국을 세자로 세웠다.

 

저거몽손은 독살된 독발녹단의 아들 독발호대에게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 회유했다. 자기에 오면 두 현을 나누어 주어 통치하게도록 할 것이며 또 아버지를 죽게 한 서진의 걸복씨에게 복수를 할 수 있도록 군사를 빌려 주겠다고 유혹했다. 독발호대도 저거몽손의 계획에 동조하기로 했지만 그 계획이 탄로나 허사가 되었다. 독발호대가 반란음모를 꾀했지만 서진의 주군 걸복치반은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독발호대를 우대했다.  걸복치반의 왕비가 독발호대의 손아래 누이이기도 했지만 원래 걸복치반은 통이 크고 관대한 사람이었다.

 

독발호대의 누이가 은밀히 오빠 독발호대를 불러 말했다.

 

  “ 서진은 본래 나의 원수였다.        

    비록 혼인관계로 엮이고 또 환대를 받기는 했지만 

    상황과 형편이 그래서 그런 것이지

    자식이 되어서 어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모른 척하고 

    복수를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왕후의 격려에 힘입은 독발호대는 무위장군 월질낙성과 함께 걸복치반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왕후와 남매지간이었던 걸복치반의 또 다른 왕후가 그 음모를 알고 걸복치반에게 알려 줌으로써 암살계획은 실패했고 관련자 10여 명이 모두 처형되었다.

 

[46] 서진 걸복치반 사망과 걸복모말과의 화친(AD428)

 

용맹하고 관대하며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가던 서진 3대 왕 걸복치반이 병으로 죽었다.(AD428년 5월) 출생이 확실하지 않아 나이를 알 수도 없고 병명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가 통치한 AD412-AD428년 16년 동안 서진은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걸복치반이 죽고 그 자리는 아들 걸복모말이 이었다.

 

서진의 주군 사망 소식을 접한 북량 저거몽손은 재빨리 서진의 서평(청해성 서녕)을 공격했다.(AD428) 서평을 지키고 있던 태수 국승이 저거몽손을 비꼬면서 말했다.

 

  “ 전하께서 먼저 수도 낙도를 점령하시면

    서평은 저절로 전하의 것이 될 것입니다(殿下若先取乐都,则西平必为殿下之有)

    서평은 진실로 풍문을 듣고 몰려와 항복하기를 바라지만

    영명한 주군이 그런 방법을 싫어하시나 봅니다.“

    (西平苟望风请服,亦明主之所疾也)

 

저거몽손은 즉시 국승을 풀어주고 서둘러 낙도를 공략했다. 그러나 걸복모말을 지원하기 위해 멀리서 응원온 걸복원기의 5천 기병이 혼신의 힘을 쏟아서 낙도를 방어했다.

 

애초 걸복치반이 병이 들었을 때 아들 걸복모말을 불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내가 죽은 뒤에 네가 영토를 잘 보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지금 우리한테 포로로 잡혀있는 저거성도(8년 전 포로로 잡힘)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고 또 저거몽손이 아끼는 사람이니

    호의를 베풀어 보내 주도록 하여라.“ 

 

걸복모말은 즉시 사신을 저거몽손에게 보내면서 화의를 요청했다. 저거몽손도 군사를 돌리고 조문 사절을 보냈다. 걸복모말은 많은 물자와 함께 포로 저거성도를 되돌려 보내면서 장군 왕벌로 하여금 저거성도를 호송하게 했다. 저거몽손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저거성도를 호위하는 서진의 군사를 사로잡았다. 저거성도가 무사히 돌아 온 뒤에야 저거몽손은 왕벌에게 말 천필과 갖은 보물을 갖추어 걸복모말에게 감사의 표시를 보냈다. 걸복모말 또한 다시 저거몽손에게 낭중이라는 사람을 보내 사례했다. 이로써 서진과 북량의 화의는 성립되었다.

 

[47] 이어지는 북량과 서진의 전투(AD429) 

 

그러나 이 화친은 오래가지 못했다. 걸복모말의 삼촌 걸복천년이 양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난폭하고 잔학하여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민심이 흉흉했다. 주군 걸복모말이 걸복천년을 꾸짖자 겁이 난 걸복천년이 북량 저거몽손에게로 도망갔다(AD428년 10월). 저거몽손은 이 틈을 타서 서진의 반이(청해성 서녕 서남)을 공격했다. 서진의 걸복원기가 기병 1만 5천으로 강력하게 방어하자 저거몽손은 군사를 돌려 서평을 공략했다. 서진은 2천 기병과 출련보정이라는 장군을 보내 성공적으로 서평을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발빠르게 진격한 북량의 군사는 출련보정이 당도하기 전에 이미 서평을 함락시키고 태수 국승을 사로잡았다(AD429년 1월)

 

서진 걸복모말은 친동생인 상국 걸복원귀에게 수도 부한(감숙성 임하)를 맡기고 스스로 대군을 북량에게 붙으려하는 남안태수 정승백을 공격하고 격파했다. 서안태수 막자유권 또한 서진에게 반기를 들자 걸복모말이 그를 공격하다가 막자유권에게 패배하여 군사를 되돌려 정련(감숙성 임하 서남)으로 물러갔다. 

 

저거몽손의 군대가 부한에 당도했다. 저거몽손은 세자 저거흥국을 정련으로 보내 서진을 공격했다. 걸복모말은 북량의 군대를 격파하고 세자 저거흥국을 사로잡았다. 이어 거칠게 북량의군대를 몰아세우자 저거몽손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토욕혼(서진의 서쪽에 거주하는 선비계통 부족국가)왕 모용모귀가 동생 모용몰리연과 5천 기병을 보내 북량을 도와주었지만 걸복모말의 보국대장군 단휘가 북량-토욕혼의 연합군을 대파했다.    

 

저거몽손은 서진 걸복모말에게 곡식 30만곡(1곡은 10말)을 보낼테니 세자 저거흥국을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걸복모말은 거절했다. 저거몽손은 저거흥국을 포기하고 그의 친동생 저거보제를 세자로 삼았다. 걸복모말은 저거흥국을 산기상시로 임명하고 걸복모말의 여동생 평창공주를 그의 처로 삼게 하였다.  

 

[48] 북위가 장안탈취 관중 장악(AD430)

 

북량의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서진 걸복모말은 신하 왕개와 오눌전을 북위에 파견하여 조공과 칭번을 약속했다. 북위에서는 걸복모말을 평량(감숙성 평량)과 안정(감숙성 경천) 지역을 다스리도록 책봉했다. 걸복모말은 도읍 임하를 모두 불태우고 1만 5천호를 이끌고 동쪽 상규(감숙성 천수)로 옮겨갔다. 그의 옛 영토는 모두 토욕혼으로 귀속되었다. 걸복모말과 서진 주민이 대거 동쪽 상규로 옮겨 온다는 소식을 들은 하나라 3대 주군 혁련정은 전력을 다해 걸복모말의 군사를 막았다.   

 

이런 혼란한 틈을 타고 서진의 급사황문시랑 곽항이 포로로 잡혀있던 저거흥국을 모시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태가 발각나서 곽항과 저거흥국은 죽임을 당했다. 

 

북위 탁발도 대군이 하나라 수도 평량에 접근했다. 혁련사간이 평량성을 지키고 있었다. 탁발도는 포로로 데리고 있던 혁련창을 시켜 항복을 권유하게 했다. 성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탁발도는 안서장군 고필을 시켜 안정으로 나아가게 했다. 혁련정은 부성(섬서성 낙천현)에서 안정(섬서성 진원)으로 돌아와 2만 군사로 평량을 구원할 계획이었다. 가는 길에 북위의 고필부대를 만났다. 고필은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했다. 그런 줄 모르는 혁련정은 추격을 계속하다가 탁발도의 습격을 받고 크게 패했다. 혁련정은 순고원(감숙성 영대현)으로 도망가 방진을 치고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탁발도는 혁련정을 포위했다. 하나라 군마의 물과 마초가 고갈되었다. 혁련정은 몰래 순고원을 빠져나왔지만 북위군대가 곧바로 추격해왔다. 하의 군사 만여 명은 피살되었고 혁련정도 부상을 입고 도주하여 상규로 들어갔다.  

 

안정을 지키고 있던 혁련을두도 성을 버리고 장안으로 갔다가 다시 상규로 도망왔다. 북위 탁발도는 평량을 다시 포위하는 한편 주변 주민들에게 조세부역을 감면해 주었다. AD431년 12월15일 마침내 하의 혁련사간과 혁련도락고가 평량성을 버리고 항복해 왔다. 그리고 북위장수 두대전이 포로로 잡혀있던 북위 장수 해근과 아청 등 구출해냈다.

 

탁발도가 하의 황후를 두대전에게 하사하면서 해근에게 무릎을 꿇리고 두장군에게 술잔을 올리게 하며 말했다.

 

  “ 너의 목숨을 온전하게 한 사람이 이 분이다.”   

 

북위 수도 평성으로 돌아 간 다음 탁발도는 해근을 술 음식 시중드는 직책으로 강등시켰다.하나라 장안 인근 지역 장수들이 모두 도망가거나 북위에게 투항해 왔다. 마침내 관중지역이 완전히 북위에게 떨어진 것이다. 

 

[49] 하가 서진을 멸망시키고 하는 북위에게 멸망하다(AD431)

 

서쪽으로 몰리던 혁련정은 서진장수 요헌을 공격하여 이겼다. 그리고 1만 군사로 남안(감숙성 농서)을 포위하며 공격했다. 성안의 부하들은 모두 서진을 배반하고 하나라로 쪽으로 도망왔다. 서진왕 걸복모말도 수레에 관을 싣고 혁련정에게 투항했다. 혁련정은 투항한 저거흥국과 걸복모말을 상규로 압송했다. 혁련정은 걸복모말 등 종족 500여 명을 죽였고 이로써 서진(AD385-AD431)이 건국 46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혁련정은 서진 백성 10만여 명 압송하여 치성(임하)에서 황하를 건넜다. 이주민을 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중에 강력하게 세력을 키워오던 토욕혼 모용모귀에게 습격을 받고 혁련정이 사로잡혔다.(AD432) 토욕혼 모용모귀는 혁련정을 북위 평성으로 압송했다. 모용모귀가 혁련정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북위는 거절했고 결국 혁련정은 평성에서 살해되었다. 이로써 AD407년 세웠던 혁련발발 하나라는 25년 만에 멸망한 셈이다.

 

[50] 저거몽손의 무례함(AD432)

 

서진과 하나라가 멸망하고 나자 이제 남은 나라를 북량밖에 없었다. AD431년 9월 북위 황제 탁발도는 사신 이순을 저거몽손에게 보내 이렇게 호령했다.

 

  “ 흥하느냐 쇠퇴하느냐 살아남느냐 망해버리느냐는

    너희가 우리 북위와 어떻게 지내느냐에 달려있다.  

    서쪽 사방 지역을 잘 다스려 나에게 충성심있게 복속하도록 하라.

    여러 공격백관을 세우는 것은

    모두 승제(황실의 재가를 나중에 받도록 하는 것)하여 임시로 할 것이며

    깃발이나 모든 제례의 행식은

    한나라 제후의 전례를 따르도록 하라.“

   

저거몽손이 북위에게 받은 직함은 도독양주서역강융제군사,태부,대장군,양주목,양왕이었고 관할지역은 무위, 장액, 돈황, 주천, 서해, 금성, 서평의 일곱 군이었다.(AD431)

 

북위의 사신 이순이 저거몽손에게 갔다. 저거몽손은 병을 핑계로 직접 만나지 않고 대신 중병교랑 양정권을 보냈다. 이순이 질책했다

 

  “ 양왕이 아픈 것은 조정도 알고 있는 바인데

   어찌 황제의 조서를 받든 사신을 만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

 

다음 날 저거몽손이 이순을 궁궐로 초빙하여 대면했다. 저거몽손은 탁자의 뒤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아 일어날 기색도 없었다. 이순이 격노하며 말했다.

 

  “ 이 영감탱이 무례함이 이 지경일지 생각도 할 수 없었소.

    언제 멸망할지도 모르는 것을 근심하기는커녕

    감히 천자를 능멸하는 태도를 의도적으로 보이다니

    혼백이 떠나버려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이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하자 양왕 저거몽손이 놀라서 이순을 붙잡게 하면서 말했다.

 

 “ 태상(이순을 말함)께서 평소에 노쇠하고 병든 것을 관대히 봐 주셨고

  또 듣기로는 조정에서는 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가 내려졌다고 하기에 그런 것이었소.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몸이 좀 불편해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하시오.“

 

이순이 말했다.

 

  “ 제나라 환공은 아홉 차례 제후를 규합하고

    한 차례 천하를 제패하였소,

    주나라 천자가 조서를 내려서 굽혀서 절하지 말라고 했지만

    환공은 신하의 예를 어기지 않으려고 스스로 내려가 굽혀서 절을 하고 받들었소.

    지금 왕의 공이 높다고는 하나 제나라 환공에는 미치지 못할 바요.

    게다가 조정에서 서로 존경하라는 조서를 내리기는 했으나      

    아직은 절을 하지 말라는 조서는 없었소.

    반 쯤 누워서 절룩거리며 황명을 받고자 하니

    이러고서야 어찌 사직의 복이라고 하겠소“ 

 

저거몽손이 마침내 일어나서 절을 하고 북위가 내린 조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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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9년04월18일 16시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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