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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5 자만심으로 멸망한 틈새왕국, 남량(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5월02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5월01일 16시4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3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 독발수기능(禿髮樹機能, ? - AD279)과 독발사복건(禿髮思复鞬, ? - AD394)  

 

청해성 서녕을 중심으로 독발오고(-AD399)가 세운 남량(AD397-AD414)은 흉노족 일파인 선비 계통의 나라다. 선비족인 세운 나라로는 탁발씨의 북위 외에도 걸복씨의 서진, 모용씨의 연나라들(전연,후연,남연,북연,서연)과 토욕혼 등이 있다. 독발 씨는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진 북위의 탁발씨와 혈통이 거의 같다. 독발 씨는 원래 성이 탁발씨였으나 독발로 바꾸었다고 알려졌다. 

 

독발씨의 가계는 AD270 진(晉) 무제 사마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발수기능(禿髮樹機能)이라는 사람이 양주(涼州,현재 감숙성) 지역을 휩쓸고 다녔는데 진나라 장수 호열이 그를 토벌하다가 실패하여 죽었다.(AD270). 옹주 및 양주를 관장하던 총 책임자 부풍왕 사마량은 다시 유기를 파병했지만 그 또한 겁을 먹고 관망할 뿐 나아가지 않았다. 진 황제 사마염이 격노하여 삼촌인 사마량을 깎아내려 평서장군으로 강등하고 유기를 참형에 처한다는 황명을 내렸다. 놀란 사마량이 조정에 탄원하여 죄는 자신에게 있으며 유기는 죄가 없으니 선처를 부탁했다. 황제 사마염은 사마량을 평민으로 만들고 유기를 면죄해 주었다. 사마량은 사마염이 죽은 AD290년 황족의 연장자이었으므로 곧바로 실권을 장악했으나 바로 다음 해인 AD 291년 조카 사마위에 의해 축출되면서 8왕자의 난에서 첫 번째 희생자가 되는 사람이다. 

 

사마염은 장군 석감을 보내 행안서장군으로 삼고서 양주의 반란군 독발수기능 토벌을 맡겼다. 석감 또한 독발수기능 군사의 강성함을 꺼려 직접 나가는 대신 진주자사 두예를 시켜 토벌하게 하였다. 두예는 독발수기능을 지금 토벌하기보다는 봄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석감은 두예가 겁을 먹었다고 판단하고 조정에 소환명령을 내려주기를 청했다. 두예는 결국 함거에 갇혀 소환되었으나 황제 사마염의 고모부인 탓에 벌금을 내고 풀려날 수 있었다. 독발수기능은 중국을 통일한 서진의 행안서장군 석감 역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독발수기능은 주변의 여러 이민족 호인들을 규합하여 진나라 양주자사를 연이어 부수었으므로 진나라 조정이 크게 염려하였다.      

 

AD279년 진 조정에서는 마륭을 무위태수로 삼아 독발수기능을 토벌시켰다. 수 만 명의 병력을 지닌 독발수기능은 험한 지형을 방패삼아 매복 작전으로 마륭을 훌륭히 격퇴했다. 마륭은 매복군대가 던지는 돌을 막기에 충분한 지붕이 튼튼한 편상거를 제작하여 독발수기능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1천리 이상을 진격하였다. 진 조정은 승전보에 고무되어 마륭을 선위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가절(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인 명령을 내림)하도록 하였다. 마륭이 무위에 다다르자 선비족의 대인이었던 졸발하차만능이 1 만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다. 마륭은 그해 12월 마침내 독발수기능 군대를 격파하고 그의 목을 베었다. 이로써 양주는 다시 진나라에 평정되었다. 그러나 독발씨가 거느리던 부족들은 계속해서 독발씨의 통솔을 받으면서 100여년 내려왔는데 AD365년 독발수기능의 사촌동생 독발무환의 손자 독발추근이 110세로 죽었다. AD255년생인 셈이다. 독발수기능이 피살되었을 때(AD279년) 독발추근은 이미 24세였으므로 독발수기능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나라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모든 것을 목격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 후 86년 동안 서진(西晉) 조정이 분열과 혼란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 없이 선비족들을 잘 이끌면서 서진 조정에 대항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매우 조심스럽고 또한 현명한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독발추근이 죽고 아들 독발사복건이 선비무리를 이어받았다.

 

(2) 열국의 독립(AD384-AD386)과 걸복국인의 서진 건국(AD385)

 

AD385년 전진의 부견이 48세의 나이로 후진 요장에게 죽자 서역 지역 곳곳에서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요익중이 후진(AD384)을 건국하고 모용수는 후연(AD384)을 건국했으며 걸복국인 또한 AD385년 스스로 대도독, 대장군이라 칭하면서 을전동니를 좌상에 임명하고 옥인출지는 우상에 임명하면서 독립을 선언했다. 서진(西秦)이라는 나라였다. 서역에서 돌아오던 중이었던 여광은 AD386년 후량(AD386)을 건국했고 탁발규는 북위(AD386)를 세웠다.

 

(3) 독발사복건의 전량 장대예 지원(AD386) 

 

전량의 장천석이 부견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면서 동진으로 도망갈 때(AD376) 어린 세자 장대예를 왕목이 숨겨서 하서(감숙성 중서부)로 달아났었는데 이 지역을 장악하던 독발사복건은 전량의 정통 후예인 장대예를 진중하게 보호해 주었다. 독발사복건은 장대예를 위안(감숙성 고랑현)을 통치하도록 해서 보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인 초송, 제숙, 및 장제 등이 장대예를 주군으로 모시고 여광의 영토 창송군(감숙성 무위시)을 점령하고서 반란을 일으켰다. 여광은 장수 두진에게 장대예 무리를 토벌하게 했지만 두진은 패배했고 장대예 무리는 다시 후량 수도 고장(감숙성 무위시)까지 쳐들어왔다. 충신 왕목이 장대예에게 이렇게 간했다.

 

 “ 여광의 군대는 양식이 풍부하고

   숙련된 전투병일 뿐만 아니라 갑병은 정예병인데다

   성벽이 공고하므로 그를 공격하는 것은 옳은 전략이 못 됩니다.

   영서지방(감숙성 장액, 주천 및 돈황지역)을 장악한 뒤에

   군사를 연마하고 나서

   틈을 보아 공격하면 일 년도 안 돼 여광을 잡을 수 있습니다.“

 

어린 장대예는 왕목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스로 무군장군 양주목이라고 일컫고는 왕목을 장사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여광을 공격했다.(AD386년) 장대예는 왕목 및 독발사복건의 아들 독발해우와 함께 3만 군사로 고장(감숙성 무위)의 서쪽에서 여광과 대치했는데 여광이 직접 나아가 이들을 격파하고 독발해우와 2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AD386년) 장대예는 요행히 죽음을 면하고 빠져 나와 감숙성 남쪽으로 도망갔다. 

 

AD386년 부견을 죽인 후진 황제 요장이 장안에서 즉위했다. 부견의 사망소식을 늦게 전해들은 고장에 있던 여광은 AD386년 9월 군대 전체에게 흰 옷을 입게 하고 통곡했다. 그리고 10월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를 대안(大安)으로 정했다. 스스로 사지절, 중외대도독, 독농우하서제군사, 양주목, 주천공이라 불렀다.(12월) 이때가 사실상 실질적으로 후량을 건국한 셈이다. 

 

(4) 서진 걸복국인의 죽음과 걸복건귀 즉위(AD388) 

 

AD388년 6월 원천(苑川)왕이라 불리는 서진의 걸복국인이 재위한지 3년 만에 죽었다. 아들걸복공부가 아직 어렸으므로 원로들이 걸복국인의 동생 걸복건귀를 추대하여 대장군, 대선우, 대도독, 하남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한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백관을 두고 대사면을 내렸으며 연호를 고쳐 태초(太初)라고 불렀다. 그리고 9월에는 수도를 금성(金城, 지금의 감숙성 난주)으로 옮겼다. 서진의 걸복건귀가 새 연호를 쓰고 백관을 설치하자 머뭇거리던 후량의 여광 또한 다음해인 AD389년 스스로 삼하왕이라고 칭하면서 백관을 설치하고 연호를 인가(麟嘉)라고 쓰기 시작했다. 金城王 걸복건귀가 농서지역 侯年部를 공략하여 크게 깨뜨렸다. 이때부터 진주, 양주의 선비족과 강족과 호족들이 대부분 걸복건귀에 귀부하였으며 걸복건귀의 서진의 세력이 막강해지기 시작했다. 걸복건귀는 이들 귀화한 이민족들 모두에게 관작을 주어 통치했다.

 

(5) 후진 요장의 죽음과 열강의 세력확장(AD394)  

 

서진의 걸복건귀가 집권한 뒤 영역을 확대해 가는 기간 동안 후진의 요장은 부등이 이끄는 전진의 잔존세력과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데다가 지도자 요장마저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결국 요장은 AD394년 병사하고 그 아들 명군 요흥이 집권하게 되지만 동쪽으로 모용수의 후연과 동북쪽의 북위가 강력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므로 서쪽의 서진이나 여광의 후량에게 정신을 쓸 틈이 별로 없었던 것이 이들 국가가 세력을 넓혀 나갈 수 있는 좋은 호기였던 것도 사실이다.

 

(6) 남량 독발사복건의 죽음과 독발오고 즉위(AD394) 

 

AD394년 초 독발사복건이 죽고 그 아들 독발오고가 왕위를 계승했다. 독발사복건이 죽은 나이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고령이었을 것은 확실하다. 그의 아버지가 AD255년 생이었으므로 오십의 나이에 독발사복건을 얻었다 하더라도 AD394년에 그의 나이는 90세가 가까운 나이였다. 독발사복건의 아들 독발오고는 용감하고 영웅스러웠으며 큰 뜻을 품고 있었다. 대장 분타(紛陀)에게 독발오고가 양주지역을 탈취할 방략이 무엇인지 물었다, 

 

분타가 이렇게 말했다. 

 

  “ 공께서 반드시 양주를 얻으실 생각이시라면

    마땅히 먼저 농업을 일으키시고 

    무력을 강화시키셔야 합니다.

    예를 가지고 현인들을 대우하셔야 하고

    형벌과 정치를 곧바로 세우셔야 합니다.

    반드시 그런 다음에야 양주를 얻으실 수가 있습니다.“

 

독발오고는 신중하게 경제력을 쌓고 예절과 형법과 정치의 기초를 먼저 쌓으라는 분타의 충언에 매우 깊이 감명을 받고 그의 말을 따랐다. 삼하왕 여광은 사신을 독발오고에게 보내와 관군대장군, 하서선비대도통이라는 직함을 내려 주었다. 독발오고는 부하 무리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 여광이 보낸 이것을 내가 받아야 옳은가?“

 

모두가 말했다.

 

  “ 우리 군대와 군마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어찌 그의 밑으로 들어가겠습니까? “ 

    

석진약류(石真若留)라는 자가 아무 말이 없자 독발오고가 그에게 물었다.

 

  “ 경은 여광을 두려워하시오? ”

 

석진약류가 이렇게 말했다.

 

  “ 우리의 근본이 미천하고 약하므로

    큰 적을 막기에 부적합합니다.

    만약 여광이 우리를 죽이자고 덤벼든다면

    어떻게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받는 척하여 여광이 교만해지고  

    틈이 생기는 것을 가다렸다가

    군사를 일으키면 지금의 모멸감을 어찌 극복 못하겠습니까? “

   

독발오고가 지극히 옳다고 여기고 여광이 보낸 작위를 수령하기로 했다.        

 

(7) 걸복건귀의 영토 확장과 천수 차지(AD394)

 

AD394년 당시 전진의 잔당을 이끌고 있던 부등은 후진을 침략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부등이 대군을 이끌고 섬서성 건현에서 장안 서쪽 흥평을 향하여 남동쪽으로 진군했다. 죽은 요장의 아들 요흥은 적백지라는 명장을 파견하여 부등의 군대를 격파했다. 부등은 단기로 빠져나와 태자 부숭이 지키고 있는 옹주(지금의 봉상) 방면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이미 부숭은 옹주를 버리고 북쪽으로 빠져 나간 뒤였다. 부등은 잔당들을 규합하여 평량(감숙성 화정)지역으로 들어갔다가 북쪽에 있는 마모산(영하성 고원 남쪽의 산)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 요흥은 아버지의 장례를 발표하고 괴리(섬서성 흥평)에서 후진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산으로 들어간 부등은 급히 아들 부종을 서진 걸복건귀에게 인질로 보내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걸복건귀는 아들 걸복익주에게 1만 군사를 주어 파송하여 부등을 도왔다. 그러나 요흥의 군대는 평량 서북쪽에서 북진하여 부등을 포획한 다음 죽였다. 그리고 그 지역 백성 3만호를 붙잡아 장안으로 이송하였다. 서진의 걸복익주의 군대는 싸워볼 겨를도 없이 부등이 패배하고 말자 군사를 되돌려 돌아왔다. 다행이 전진의 후계자인 태자 부숭은 몸을 피하여 황중(청해성 서녕)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걸복건귀는 부숭을 내쫓아버렸고 부숭은 다시 동쪽으로 도망가서 양정에게로 갔다. 

 

양정은 천수를 사마 소강에게 맡기고 부숭과 함께 걸복건귀를 타도하기로 했다. 양정의 군대가 몰려오자 걸복건귀는 3만 군사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걸복익주에서 양정군대에 패배하고 서진의 장수 걸복가탄과 월질힐리도 후퇴하려고 했다. 걸복가탄의 사마 적온이 물러서려는 사람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소리치자 서진의 군사들이 다시 힘을 내어 전투를 발였고 결국 양정의 군대를 격파했다. 부등과 양정의 목은 날아갔고 이 승리로 말미암아 걸복건귀는 천수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걸복건귀는 스스로를 양왕에서 진왕으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 걸복건귀가 세운 나라를 서진(西秦)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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