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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리스트 한국 배제와 우리 정부의 역할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8월04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19년08월05일 09시19분

작성자

  • 손병해
  •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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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지난 7월 초 일본이 핵심 반도체 원료의 한국 수출 규제를 발표한 이후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왔던 전략물자 수출우대국 명단(white list)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안건이 결국 일본 각의를 통과하여 이달 28일부터 실행에 옮길 예정이다.

 

 일본이 안보 우방국으로 평가되는 국가를 지정하여 첨단기술 제품의 수출허가를 면제해주는 차별적 수출관리 제도가 화이트 리스트이다. 여기서 한국을 배제한다는 것은 한국을 안보 우방국으로 대하지 않고 수출규제를 하겠다는 뜻이므로 우리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특히 이러한 결정은 현 정부 들어 일련의 과거사 관련 조치를 취한데 대한 보복적 대응으로 읽혀지고 있어 전 국민을 긴장시키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 외교, 군사협력 면에서 결코 간단하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 

 

국제적 파장도 없지 않다. 자유무역질서를 해치고 글로벌 공급망을 위해하는 조치로 외신들은 비판하고 있다. 한국을 배제하고 유럽계 26개국만을 안보 우대국으로 하겠다는 이번 결정을 보고 우리는 명치유신 이후의 탈아입구(脫亞入歐)정책을 회상하게 된다. 한국과 아시아를 상대로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고, 경제부흥을 이루었던 일본이 다시 아시아를 제외하고 유럽국가와만 우대 교역을 하겠다는 처사를 보고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과거 대동아공영권의 상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게는 배신의 감정을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씁쓸함을 불러오는 치졸한 결정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전략물자로 간주되는 첨단소재 및 부품의 대일 수입이 일본 정부의 직접 규제하에 들게 되고 품목별로 수출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실상의 수출억제를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첨단기술 및 소재산업 분야에서 한일 간에 얽혀있는 분업구조를 고려할 때 핵심 부품, 소재의 수출통제는 가히 한국에 대한 경제적 선전포고와도 같은 파괴적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이번 조치로 일본의 수출 규제를 받게 될 품목은 대충 1,190 여개,  집중 규제를 받게 될 민감품목은 159개 품목에 이를 것이라 한다. 대일 의존도가 높고 수입규모가 큰 산업에서는 부품 소재의 공급과 생산라인 유지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전자, 통신, 석유화학 등 주종 수출산업이 그 대상이 되고 있어 우리 경제에 주는 피해 강도는 외형보다 더 클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수출과 경제성장률이 끝없이 추락하고 실업은 늘어나고 있는 것이 한국 경제의 현실인데 필수 원자재의 공급차질로 수출과 생산 감소가 더해진다면 우리경제가 입을 피해는 추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질 수 있다. 

 

과거사 처리의 국지적 사안에 대해 일본이 이렇듯 선전포고와도 같은 경제적 공격 수단을 동원하게 된 배경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자국 내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한국에 대한 공격을 확대한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그럴듯한 사유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여기에 빌미를 주지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일본은 이번 수출규제의 근거로 “케치올(catch all)” 규제와 신뢰상실의 문제를 들고 있다. 대량살상무기와 재래식 무기에 사용되는 제품수출을 규제하는 “캐치올” 규제에서 한국은 재래식 무기에 대한 규제를 도입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다는 우리 정부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을 내세우는 배경에는 핵과 미시일 개발에 치중하는 북한에 대하여 화해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안보 불신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뢰상실의 문제는 과거사에 대한 시각차에서 야기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번 화이트 리스트 배제 논의의 발단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현 정부에 의한 위안부 화해치유재단 해체 결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일본 측에서는 강제징용 배상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해 해소되었으므로 한국정부의 해결사항으로 보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2015년 양국 정부간 합의를 통해 정리된 사안인데 한국의 현 정부가 그 합의를 지키지 않고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도 일방적으로 해체하였으므로 한국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정부간 합의로 해결되었다는 일본과 그것으로 부족했다는 현 정부의 시각차에서 야기된 문제이다. 

 

기존 협정에 부족함이 있으면 그 수정. 보완을 먼저 요구하고 새로운 합의가 있을 때까지는 기존 합의를 존중하는 것이 절차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강제징용 배상문제를 짚어 볼 청구권협정의 내용이나, 위안부 문제 합의의 상세 내용을 모르고 있다. 문제 제기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부족했던 부분이다. 늦었지만 절차적 타당성에 좀 더 신중했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냉정한 입장에서 볼 때 국제간의 과거사 문제가 외교적 해결이 아닌 일국의 사법적 판단으로 해소될 문제인가에 대해서도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일본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실효적으로 대응할 수단은 많지 않다. 반면 일본이 보복수단으로 내놓은 수출규제 수단은 어떠한 법적 조치보다 더 큰 경제적 피해를 한국 국민들에게  입힐 수 있다. 많은 국민들은 사태의 전개과정을 알지 못한 채 일본과의 경제전쟁에 노출되게 된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이로 인한 실질적 피해는 우리 기업과 일반 가계로 돌아갈 것이기에 우리는 일본을 욕하기에 앞서 사태를 여기까지 오게 방치한 현 정부의 허술한 상황인식과 적절하지 못한 접근 방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발전해 온 이상 정부 입장에서는 과거사 청산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든가 아니면 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일 외교노선을 화해 모드로 수정하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과 같은 대립 상태에서 화해 모드로의 전환은 쉽지 않다. 고통을 참으며 장기적으로 대응을 잘하면 부품 자립도를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막대한 R&D 투자와 신기술 개발에 소요되는 시간, 거기에 시장성 검증까지 생각하면 만만한 일이 아니다. 장기적 대응의 성과가 나올 때까지 우리 경제를 지탱해줄 단기적 대응이 중요한 이유이다. 

 

단기 대응에 실패하면 신기술이 나오기 전에 우리 경제는 회복할 수 없는 추락을 면치 못할 수 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단기적 대응은 평화외교보다 경제외교에 주력하여 추가적 수출규제를 예방하고 떨어진 기업의 사기를 살려내는 길이다. 대체 수입선을 확보하고 국내 생산을 늘리는 것은 기업이 더 잘하고 있다. 정부가 좋아서 하는 외교보다 국민이 필요해서 하는 외교를 잘 하는 정부가 유능한 정부이다. 

 

이번 사태로 한일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받고 있다. 1965년 한일협정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언제까지나 부정적으로 풀어갈 수는 없는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그것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상 남북한만의 공감이나 북미간의 합의만으로 그 평화체제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의 평화질서가 유지될 때 한반도 평화체제도 힘을 받을 수 있다.

한․미․일 공조도 현재로서는 동북아 평화질서 유지의 한 축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선은 밉더라도 동북아의 평화질서의 창출이라는 미래 공동의 선을 위해 한일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가야할 것이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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