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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6 고구려의 천적 전연(F)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8월08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8월07일 16시0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9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29) 고구려 고국원왕의 전연 복속(AD343)

 

다음 해 고구려 고국원왕 고소는 동생을 전연 수도 용성에  보내 신하를 자칭하면서 조현하고 수 천 개 보물을 바쳤다. 모용황은 고소의 아버지 시신을 돌려 보내주었지만 어머니는 인질로 계속 붙들어 두었다. 

 

우문일두귀는 재상 막천혼을 파견하여 전연의 변경을 침략했다. 제장들이 곧바로 반격하자고 했지만 모용황은 그냥 두라고 지시했다. 전연의 반응이 없자 막천혼은 겁을 먹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술을 마시면서 사냥에 빠졌고 방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고 모용황은 모용한을 보내 공격하도록 했다 막천혼은 대패하고 겨우 목숨만 살아서 돌아갔다.(AD343)

 

대나라 탁발십익건의 처 모용씨(모용황의 누이)가 죽자 그는 또 다시 모용황에게 혼례를 요청하였다. 모용황은 말 천 필을 받고 딸을 주어 빙례를 치르게 했는데 탁발십익건의 태도가 매우 건방지고 장인어른에 대한 태도가 불손했다. 8월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을 파견하여 탁발무리를 공격했다. 탁발십익건은 신부 얼굴도 보지 못하고 혼비백산 본국으로 도망갔다.    


(30) 모용황의 우문일두귀 정벌(AD344) 

 

모용황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초조한 우문일두귀는 석호의 후조에 의지할 생각을 굳히고 명마 1만 필과 함께 망명와 있던 단료의 동생 단난을 잡아서 후조로 압송했다. 후조왕 석호는 단난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좇고 따르는 선비족 5천을 붙여 주어서 옛 단씨의 근거지였던 영지(하북성 천안)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AD343)   

 

모용황은 후조와 연대하려는 우문씨를 이 치마에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좌사마 고후가 말했다.

 

“ 우문씨는 점차 강성해지고 있으니 지금 빼앗지 않으면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를 정벌하시면 반드시 이기실 것이나

  충성스런 신하는 많이 다칠 것입니다.“

 

고후가 나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 내가 이번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충신은 자신의 안위를 피하지 않는다.“

 

모용한을 선봉으로 삼고 유패가 부관이 되었으며 모용군, 모용각, 모용패, 모여근 등이 군사를 나누어 세 길로 나아갔다. 고후가 집을 나서면서 그의 처 보기를 외면하면서 집사에게 집안일을 잘 처리해 주기를 부탁했다.

우문일두귀는 최정예장군 섭야간을 파견하여 모용황 군대를 맞아 싸웠다. 모용황이 사람을 보내 모용한에게 용맹스런 섭야간의 예봉을 피하라고 지시했다.  모용한이 이렇게 말했다.

 

“ 지금 제가 그 나라의 기둥과 같은 섭야간을 이기면 

  저들은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섭야간의 명성은 다소 과장된 헛것입니다.

  맞붙어 싸우기 쉬운 존재입니다.

  괜스레 우리가 피하는 것같이 보여 저들의 사기를 높여 줄 이유는 없습니다.“

 

모용한이 직접 출정하여 적진에 부딪치자 섭야간이 몸소 나와 대적했는데 이 때 모용패가 측면에서 요격하여 섭야간 목을 베었다. 섭야간의 무리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우문일두귀는 북쪽 사막으로 달아나다가 길에서 죽었고 우문씨 세력들은 바람의 모래처럼 역사에서 사라졌다. 석호는 우문일두귀가 전연의 공격을 받자 후원군을 보냈지만 이미 우문일두귀가 격파도니 뒤였으며 석호의 지원군 또한 전연의 모용표에게 크게 격파 당했다. 모용황은 우문씨들의 축산물과 재물을 모두 몰수했으며 5천여 무리를 전국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 정착시켰다. 고후와 유패는 이번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31) 맹장 모용한의 죽음(AD344)

 

모용황의 서형 모용한은 대단히 명석하고 강단있는 사람이었다. 섭야간의 예봉을 피하라는 모용황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선봉에 서서 섭야간의 목을 자르기도 했지만 모용황의 불필요한 요구도 따끔하게 거부한 사람이었다. 이 번 전투에서 모용한이 화살에 맞아 크게 부상당했다. 병석에 누워 오랫동안 나오지 못하였는데 점차 차도가 있자 재활 훈련 삼아 말을 타보고 활도 쏘아 보았다. 어떤 사람이 모용황의 승마 및 무예 수련행위를 보고서 모용황에게 고해 바쳤다.  

 

“ 병석에 있다고 조정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사사로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무엇인가

  변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용황이 한 참을 고민하다가 서형 모용한에게 사약을 내렸다. 재주도 많고 용맹스럽기도 하고 또 나이도 위인 서형이 부담이 많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약을 받아 든 모용한이 웃으며 말했다.

 

“ 내가 죄를 짓고 달아났다가(AD333) 다시 돌아왔는데(AD340)

  오늘 죽는 것도 이미 한 참이나 늦은 것이다.

  그러나 갈족 도적(석호)이 중원지역을 점령하고 있으니

  내가 국가를 위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꿈을 이루지 못해 아쉽지만

  그 또한 남아의 운명 아니겠나! “  모용한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   

   

(32) 전연의 충신 봉유(封裕)의 구구절절한 명간언(AD345)

 

전연의 모용황은 가난한 농부들에게 왕실용 농지에 농사용 소를 빌려 주고는 10분의 8을 세로 거두었고 만약 자신의 소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10분의7일 세로 거두었다. 기실참군 봉유가 편지를 올려서 간했다. 

 

“ 옛날에는 열에 하나를 세금으로 내는 것이 천하에 공정한 것이었습니다.

  위, 진의 혼탁한 시대 때에도 세는 10분의 6 이었고 

  소 있는 자들의 세 부담은 10분의 3 이었습니다.

  영가의 난(서진 팔 왕자 난 기간의 대혼란시대, AD307-AD312) 이후로

  해내가 다 부서진 것을 무선왕(모용외)이 덕으로 어루만지셔서 

  화족과 이족이 모두 우리나라로 몰려들어서

  호구가 열배가 되었으나 농사지을 땅이 없는 가호가 열에 서, 넛 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왕업을 이으신 이후로 남쪽으로 후조를 꺾으시고 

  동쪽으로 고구려를 아우르시며 북쪽으로 우문씨의 영지를 다 차지하셨으니  

  국토는 3 천리가 넘고 백성들의 가호는 10 만호나 늘어났습니다.  

  이제는 왕실 소유의 땅을 다 없애시어 새로 편입된 백성들에게 나누어야 합시다.

  소를 갖지 못한 백성들에게는 당연히 관에서 무상으로 소를 빌려주실 것이지

  더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은 마땅치가 않습니다.

  전하의 소를 전하의 백성들이 사용하는 데 왜 세금을 더 물려야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만 한다면 우리 깃발이 남으로 향하는 날

  누가 단사호장(簞食壺漿, 군사를 위한 밥그릇과 국그릇)을 들고서 

  왕의 군대를 영접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이 밭을 갈지 않으면 식구들이 다 굶을 터인데

  놀고먹는 사람의 숫자가 수 만 명인데 

  이들에게 들어가는 누가 공급할 것입니까? 

  지금 관청에는 쓸데없는 용관들이 너무 많습니다.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면 응당 도태시켜야 합니다.

  이익을 보고 장사하는 상인들도 일정한 숫자로 묶어 두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도 3년 동안 성과가 없으면 

  모두 농사짓는 곳으로 보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성덕과 영명하심으로 추요(芻蕘, 꼴 베는 사람, 즉 백성)를 살피시지만

  어긋나는 말을 했다고 대벽으로 판결된 참군 왕헌과 대부 유명을  

  비록 전하께서 용서해 주셨다지만 아직도 면직 금고에 처해져 있습니다.

  무릇 간쟁하는 말을 찾으신다고 하면서도 

  곧은 말을 한 사람에게 죄를 주고 있으니 

  이는 남쪽 월로 보낸다고 하면서 북쪽으로 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우장사 송해라는 사람이 아미구용(阿媚苟容,아첨)하여

  가벼운 사람들만 채용하면서 임금의 귀와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대단히 충성스럽지 못한 자입니다.“ 

 

(33) 명군 모용황의 지시(AD345)

 

기실참군 봉유의 폐부를 찌르는 간언을 들은 모용황은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 봉기실군의 간언을 듣고 고는 참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들은 곡식을 생명으로 삼는 것이니

  원유(왕실 소유 전지)를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라.

  실로 가난한 자에게는 관의 소를 무상으로 빌려줄 것이며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위, 진의 예(10분의 3)에 따르라.

  하천과 도랑으로 유익한 것은 때에 맞추어 수리하고 다스리라. 

  공훈을 세운 사람이 많으므로 관원을 줄이는 것은 어려우니

  장차 중원을 장악할 때 까지 기다려서 천천히 논의하라.

  공인, 상인, 학생의 수는 마땅히 줄여서 고르게 하라. 

  무릇 신하가 임금에게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비록 미치고 망령된 소리 같아도 

  그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쓰도록 하라.  

  왕헌과 유명은 비록 폐출될 죄를 지었으나

  고가 관대함과 도량이 좁아서 그런 것이니 마땅히 관직에 복직시키고

  여전히 간언을 담당하는 관청에 있게 하라.

  봉생은 충성을 다하여 왕신의 본체를 깨우쳐 주었으니 5만전을 하사하여 

  고의 허물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귀천을 불문하고 구애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하게 하라."

 

원래 모용황은 문학을 매우 좋아하여 항상 학교에 가서 강의도 하고 토론하기를 좋아하였다. 왕의 그런 성품에 따라 학생의 숫자가 1천명을 넘으면서 온갖 외람된 사람들의 폐단이 늘어나게 되자 봉유가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모용황은 이해부터 동진의 연호를 버리고 스스로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34) 모용황이 부여를 멸망시킴(AD346)

 

부여에는 녹산이라는 땅이 있었는데 대략 현도에서 북쪽으로 천 여리 쯤 된다고 했다. 백제가 쳐들어오자 약한 부여는 전연의 동쪽 국경부근까지 도망갔다. 모용황은 세자 모용준과 1만 7천 군사를 파견하여 부여를 습격했다. 군사를 통솔한 모용각이 부여를 뽑아 버리고 부여왕 부여현을 사로잡았다. 모용황은 부여현에게 진군장군이라는 직을 내리고 자신의 딸을 부여현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35) 전연왕 모용황의 죽음(AD348)

 

전연왕 모용황에 병이 들었다. 나이 51세였으니 한창의 나이였다. 세자 모용준을 불러 이렇게 부탁했다.

 

“ 지금 중원이 아직도 평정되지 못했구나.

  바야흐로 현명하고 걸출한 인물을 밑천으로 

  세상을 경륜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동생 모용각은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추었고 

  그 재주 또한 중임을 감당할 만하니 너는 국사를 그에게 위탁하여

  나의 뜻을 완성시켜라.

  또한 양사추(양무)는 선비로서의 품행이 매우 고결하고 

  충성스러운 줄기가 곧고 굳으니 큰일을 그에게 부탁할 수 있을 것이다. “

 

9월 17일 모용황이 죽고 시호를 문명왕이라 했다. 그 큰 아들 스물 아홉 살 모용준이 왕위를 계승했다. 동생 모용교를 좌현왕으로 삼고 양무를 낭중령으로 등용했다.

 

(36) 석호의 와병과 혼란(AD349)

 

모용황이 사망한 그 석호는 병이 들었다. 총애하는 아들 석도를 죽인 또 다른 아들 석선에게 잔혹한 형벌을 내리면서 같이 죽인 손자(석선의 어린 아들)이 억울한 울부짖음을 듣고 병이 났다고 자치통감에는 기록되었다. 다음 해 4월 석호의 병이 깊어갔다. 황제 자리에 오른 지 넉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석호는 팽성왕 석준에게 대장군 직을 주어서 관중의 오른쪽을 방어하게 하고 연왕 석빈을 승상으로 삼아서 상서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그리고 장시는 진위대장군 및 영군장군 이부상서로 삼아서 석빈과 함께 정사를 나누어 보도록 했다. 태자의 어머니 유후는 석빈이 정치를 보좌하는 것을 꺼려하여 장시를 꾀어서 석빈을 도모하게 하였다. 장시는 사냥으로 양국(하북성 형태)에 가있던 석빈에게 거짓 편지를 보냈다.

 

“ 주상의 병이 이미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사냥을 좀 더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석빈은 정말로 그런 줄 알고 사냥과 음주를 계속했다. 유황후와 장시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조서를 고쳐서 불충하고 불효한 석빈을 관직에서 몰아내고 귀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는 장시 동생 장의에게 무사 500명으로 석빈의 집을 지키게 하였다.(AD349년4월9일)

 

4월 19일 석준은 유주에서 업성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뵐 수가 없었고 다만 금병 3만 명을 배속 받고 임지(관중의 오른 쪽)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차린 석호가 석준의 도착을 물었는데 이미 떠난 지 한참 뒤였다. 석호를 호위하는 군사들은 연왕 석빈을 근위병사의 책임을 맡게하고 황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했으나 연왕을 불러도 유황후와 장시가 가로막아 들어올 수가 없었다. 석호의 눈이 가물가물해지자 인새를 직접 가지고 연왕에게 주려고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석호의 마음이 석빈에게 있음을 알아챈 유황후와 장시는 다시 조서를 고쳐서 석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시를 태보·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았다. 최고의 군권이 장시에 쥐어진 것이다. 시중 서통은 절망에 빠져 음독자살하고 말았다.(4월22일) 그 다음날 석호가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열 살 태자 석세가 즉위하고 유씨가 유태후가 되어 황제를 대행했다. 장시는 태위 장거와 사공 이농을 죽이려고 모의했는데 장거가 사이가 좋았던 이농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줬다. 이농은 즉시 식솔을 데리고 도망갔다. <다음에 계속>

 

 [그림] 전연 및 후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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