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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파리 구석구석 돌아보기(10)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0월05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19년10월04일 18시27분

작성자

  • 김도훈
  • 서강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전 산업연구원 원장

메타정보

  • 8

본문

오늘은 ‘아련한 추억으로의 여행’ 2탄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희가 1985년 프랑스로 공부하러 왔을 때 5년 가까이 살았던 루앙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곳이 프랑스에서의 삶을 시작했던 곳이므로 저희들이 느끼기에는 ‘제 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프랑스 고향으로의 여행’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 여행을 갑자기 기획한 것은 여하튼 제법 장시간 기차를 타고 가므로 그동안은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다는 첫 번째 이유가 결정적이었지만, 월요일이라 빠리 대부분의 박물관들이 쉬는 날이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자는 두 번째 이유까지 감안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프랑스 날씨가 갑자기 시원해진 날입니다. 빠리의 날씨가 최저 15도 최고 24도 정도로 예보되었는데, 루앙은 빠리 서북쪽 노르망디 지방에 위치하므로 더 기온이 낮으므로 저는 속에 런닝셔츠도 입고, 긴 팔 티셔츠에 바람막이 잠바까지 걸치고 출발했습니다. (이 결정은 잘 맞아떨어져 오늘은 더위도 추위도 느끼지 않고 쾌적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의 루앙으로의 여행은 ‘참으로 신기한 두 가지 우연’과의 만남이기도 했습니다. (뒤에 설명됩니다.)

루앙은 빠리에서 120Km 정도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나라로 치면 대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도시이지요. 인구는 10만을 조금 넘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도시입니다. 루앙은 전통적으로 노르망디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 왔는데, 특히 영국에서 바다를 건너면 바로 맞닥뜨리는 곳이 노르망디이므로 이 지역을 놓고 중세시대에는 프랑스와 영국 왕실이 치열한 영토싸움을 한 곳이지요. 그 대표적인 싸움이 백년전쟁인 셈입니다. 그 백년전쟁의 가장 큰 영웅은 역시 잔다르크인데, 그녀가 영국군에 넘겨져 오랫동안의 외교적 밀고당기기와 마녀사냥식의 재판 끝에 끝내 화형에 처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인터넷으로 루앙 왕복 기차표를 두 장 예약해 두고, 비교적 일찍 호텔을 나서서 생라자르 역 (이번 여행에도 이미 두 번 이곳을 거쳤습니다.)으로 갔습니다. 저는 루앙에 살면서 빠리 1대학을 4년간 통학했던 경험이 있으므로 예약한 표를 역에서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생라자르 역이 영국 방면으로 가는 열차의 출발점까지 되면서 엄청나게 커지고 복잡해진 것을 잘 몰랐습니다. 그 복잡함을 뚫고 역의 거의 끝 지점까지 가서 기계에서 표를 인쇄하는 데 (복잡복잡) 걸린 시간이 20분이 넘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 서두르지 않았다면 계획된 기차를 타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아도 되는데 프랑스 표는 그 다음 기차에 이용해도 됩니다.) 여하튼 실로 30년 가까이 지나서 통학열차를 타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 기차의 빠리-루앙간 왕복 주행시간 동안 (대체로 1시간 15분 정도 소요), 반드시 논문 한 편씩을 읽기를 결심하고 바깥 구경도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제대로 마음 놓고 바깥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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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거의 정오가 되어 루앙에 도착. 저희 부부는 이곳에 두 곳의 추억이 있습니다. 저희가 살았던 루앙시 동쪽 언덕 위에 형성된 주거지 그랑마르 (Grand’Mare) 지역과, 거의 그 반대쪽 즉 서쪽 언덕 위에 세워진 루앙 대학 (Universite de Rouen)이 있는 몽생떼냥 (Mont St Aignan) 지역입니다. 제가 구글지도로 경로를 찾았을 때 두 곳 모두 대중교통 정보가 주어지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역에 내리자마자 information에 가서 버스 경로부터 물었습니다. 안내원은 친절히 두 곳으로 가는 버스 경로, 시간표가 적힌 작은 책자를 두 개 주었습니다. 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우선 대학으로 향했습니다. 그 대학에서 아내는 프랑스대혁명과 동학혁명을 비교하는 공부를 했고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중간에 해당하는 DEA 학위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 대학에서 불어능력을 1년 더 키운 뒤 빠리 1대학을 다니게 되었는데, 빠리에 가지 않는 날은 아내와 같이 이 학교로 차를 몰고 가서 도서관에서 공부하곤 했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루앙 대학은 지방도시에 있으므로 빠리 대학들과는 달리 캠퍼스가 넓습니다. 그래서 물어물어 인문학부 건물과 그 옆의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직원들에게 30년전 공부한 사람이 왔노라 했더니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어서 당시 공부하는 시늉도 해 보았습니다. 아내의 감회가 매우 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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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 내려와 유명한 루앙 대성당 (규모는 빠리 노트르담과 비견됨)으로 가는 관광거리인 그로오를로주 (Gros Horloge) 거리로 가서 그 연변에 늘어선 노르망디 지방 특유의 전통 가옥들을 감상하고 대성당 가에 있는 식당 (Brasserie Paul)에서 생선요리로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갑자기 첫 번째 우연과 마주쳤습니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한국의 전통악극단이 오늘부터 일주일간 루앙에서 공연을 시작하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거리 행진하면서 식당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하필 그 시간에 그 식당 근처를 지나가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지요. 저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진을 찍고 그 광경을 구경하던 프랑스 사람, 영국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설명하느라 바빴습니다. 행열 끝에 따라가던 전통복장의 아저씨 한 분과 사진도 한 컷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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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에 대성당을 돌아보았는데 이 성당은 약 200년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유명한데, 그 중간에 건축기법도 바뀌어서 한쪽 타워는 로마네스크 양식, 다른 쪽 타워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지요. 그리고 성당 안을 둘러보는데 마침 전시된 2차 대전 당시의 성당 파괴 장면과 그 후의 복구 사진들을 보다가 두 번째 우연과 맞닥뜨렸습니다. 복구 후 첫 미사를 연 날이 저의 생일 날짜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1956년 6월 25일) 아내는 ‘우리가 루앙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네.’하고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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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추억 여행은 아내가 가장 애착이 컸던 (아마도 고생이 가장 많았던) 그랑마르 지역입니다. 여기는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 (우리나라 식과 비슷한 13층의 높은 건물), 그리고 큰딸이 다녔던 세 곳의 학교들을 (어린이집,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 돌아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동네 쇼핑몰과 그곳에 붙어 있는 어린이집 (Halte Garderie)을 발견하고 아내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변의 빵집, 약국, 수퍼, 우체국 등도 우리가 많이 들렀던 곳들이지요. 모두가 추억에 젖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PS: 쇼핑몰인데도 화장실이 없어서 고심하던 우리는 그곳 커뮤니티 센터에 들어가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고향을 방문하러 왔다고 말을 붙이며 그곳 화장실을 이용했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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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를 기점으로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부터 찾아냈습니다. 13 rue Wagner. 높은 건물 사진의 왼쪽 위에서 네 번째가 저희가 살던 곳 (9층입니다.)이지요. 이곳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 유리창으로부터 루앙대성당과 루앙 시내를 내려다보는 사진을 자주 찍곤 하였습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큰딸 유치원을 찾아냈습니다. 방학이라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 옆 전문학교가 문을 열어두고 있어서 들어가 아이들이 뛰놀던 안마당도 찍었습니다. 한참을 걸어 큰딸이 마지막 1년을 보낸 초등학교에 갔는데 닫혀 있기는 마찬가지. 그곳은 어떻게 접근해 볼 방법이 없어서 학교 명패 앞에서 사진 찍는 데 만족해야 했네요. 유치원 이름이 로댕의 제자이며 애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 그리고 초등학교 이름이 음악가 끌로드 드뷔시이므로, 그곳 가르침을 이어받았다면 예술가로 컸어야 할 큰딸은 연대 법대를 나와 KOICA에서 근무하다 스타트업 재단에 다니면서 기술/법률 전문가로 커가고 있으니 아이러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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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 시내로 다시 내려와 마지막으로 보아야 할 잔다르크 처형장소 (구시장터)에 세워진 (현대식 건물이지만) 잔다르크성당을 들렀다가, 루앙역까지 걸어 기차를 타고 빠리로 복귀했습니다. 기차 속에서 충분히 쉬고 정말 오랜만의 추억을 되살리는 힐링 여행이었지만, 그 대가로 오늘 제일 많이 걸은 날이 되었네요. (1만 6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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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삼아 저희가 타고 다닌 기차표 4장과 루앙에서의 버스표 7장 (1장은 기계가 고장 나서 공짜가 되어 버렸음.)의 사진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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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10월05일 17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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