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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7 광개토대왕과 후연(6)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1월28일 17시01분
  • 최종수정 2019년11월28일 11시38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30) 왕맹의 전연 토벌(AD370)

 

왕맹은 낙양을 함락시키고 나서 등강에게  맡기고 더 동쪽으로 나아가 형양 가까이까지 다가갔다. 부견은 그의 공을 높이 사서 사도 겸 녹상서사 겸 평양군후라는 작위까지 내렸지만 왕맹은 사양했다. 부견이 억지로라도 받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왕맹은 끝내 받지 않았다. 부견은 왕맹과 양안에게 6만 군사를 주면서 다음과 같이 동진을 명령했다.

 

“ 호뢰관을 깨뜨리고

  상당(산서성 장치)을 평정하며

  달려가 업(전연의 수도)을 접수하되

  마치 빠른 뇌성은 귀에 듣지 못하는 것처럼

  전격적이어야 한다.

  내 친히 1만 군사를 가지고 뒤쫓아갈 테니

  육로와 수로로 나누어 동시에 갈 것이다.

  경은 후미를 전혀 걱정하지 마시고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시오.“

 

왕맹이 이렇게 답변했다.

 

“ 남은 호족으로 싹 쓸어버림이

  마치 바람으로 낙엽 쓸 듯이 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수레가 먼지를 뒤집어쓰시는 수고를 겪지 마시고

  서둘러 칙령을 내리셔서 

  선비족을 어디에 묻을 것인지만 걱정하십시요“ 

    

업성에 주둔하는 전연 황제 모용위는 30만 대군을 모아 방어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 전진의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

  우리가 싸울 만한가? ”

 

산기시랑 이봉은 전진의 6만 군사력을 형편없이 폄하하면서 대수롭지 않다고 평가했다. 황문시랑 양침과 중서시랑 악숭은 군사의 수가 아니라 지략이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고 그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것이므로 전쟁의 승산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사이에 왕맹과 양안이 각각 호뢰관과 상당을 함락시키자 전연은 크게 술렁거렸다. 전진의 왕맹이 동진하여 낙양과 호뢰관을 정벌하는 사이 양안은 북로를 향하여 상당을 접수하고 진양(산서성 태원)을 함락시켰다. 전쟁이라고 할 것도 없이 전진 군사가 도착하는 순간 전연 군사는 무너졌다.  

 

진양을 함락시킨 양안의 군사는 다시 남동진하여 왕맹의 군대와 합류한 뒤 모용평의 30만 대군이 주둔한 노천(산서성 여성)으로 향했다. 이 때 왕맹의 척후병 서성이 기한을 어겨 늦게 도착하는 잘못을 범했다. 왕맹이 군법을 위반한 서성을 죽이려하자 등강이 말리고 나섰다. 왕맹이 등강의 용서를 듣지 않자 등강은 왕맹을 공격하려 했다. 왕맹이 왜 그렇게 흥분하냐고 묻자 등강이 이렇게 대답했다.

 

“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먼 곳 까지 와서 적을 토벌하러 왔는데

  가까운 곳에 적을 두고

  서로 죽이려고만 하고 있으니

  답답해서 내가 그대를 공격하려 한 것이요.“

 

왕맹은 그런 등강의 용기를 높이 치하하면서 서성을 사면했다. 서성이 사면되자 등강 또한 왕맹을 몸소 찾아가 사죄했다. 왕맹이 등강의 손을 잡고 말했다.

 

“ 내가 장군을 시험해보려고 한 것일 뿐이오.

  장군이 한낱 군장 서성에게도 그리 충성을 보이신

  나라에 대한 충성이야 어떻겠소.

  나는 다시는 전연 도적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요.“ 

 

(31) 전연의 멸망(AD370년 11월)

 

전연은 망할 징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황제 모용위는 무능하고 정치는 가족혼태후가 농단하고 있었다. 군사를 장악한 대사마 모용평은 겁 많고 용렬하며 허풍에만 익숙해 있었다. 모용위가 전쟁을 독촉하자 노천(산서성 여성현) 방어에만 힘쓰던 모용평이 사신을 왕맹에게 보내 한 판 전쟁을 벌이자고 독촉해 왔다. 왕맹은 등강에 전투를 부탁했다. 등강은 전쟁 조건으로 사예교위를 달라고 했다. 사예교위란 황실과 대신들의 비위를 감찰하는 책임자 자리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공직자 비리수사처 같은 자리인 셈이다. 왕맹은 자기 능력 밖의 일이기는 하나 안정태수에 만호후 정도는 최선을 다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시큰둥해진 등강은 물러나 자리에 눕고 일어나지 않았다. 왕맹이 마침내 사예교위를 허락하자 등강은 즉각 군사를 일으켜 전연을 대파시키고 약 5만군사의 목을 베었고 10만 군사의 항복을 받아냈다. 모용평은 노천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업성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전진 군사는 노천에서 동쪽으로 100여KM 떨어진 수도 업성을 포위했다. 부견은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함락을 미루고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AD370년 11월 10만 전진의 대군이 업을 둘러싸고 포진했다. 이미 황제 모용위, 태부 모용평, 모용장, 모용연 등 전연의 최고 지도부는 업성을 빠져 나간 뒤였다. 업성을 지키던 전연 산기시랑 여울은 업의 북문을 몰래 열고 전진의 군사를 받아들였다. 11월10일 부견은 전연의 궁궐로 무혈 입성했다. 부견을 수행한 모용수는 남아있는 전연의 공경대부를 심하게 질책했다. 모용수와 함께 전진으로 망명했던 측근 고필이 다가가 화를 내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나라를 시작하는 계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몰래 귀띔했다. 모용수는 과거 전연의 대신들을 책망하기를 그쳤다.

 

전진의 유격장군 곽경은 번개처럼 말을 몰아 도망가던 전연 황제 모용위를 체포해서 업성으로 압송했다. 모용위가 모든 전연 관원을 대동하고 전진에게 무릎 꿇고 항복했다. 전연의 157개 군과 246만호, 그리고 인구 999만이 전진에 항복했다. 북중국의 절반 이상이 전진의영토가 된 것이다. 장천석의 전량이 고장(감숙성 무위)에 있기는 했으나 칭번국이었으므로 사실상의 북중국 통일이나 마찬가지다. 왕맹에게는 사지절, 도독관중육주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기주목으로 삼아 업에 주둔시키고 모용평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주었다. 등강에게는 사지절, 정로대장군, 진정군후 및 안정태수, 양안에게는 박평현후, 그리고 곽경에게는 도독유주제군사를 주었다. 

 

부견은 전연의 관료들을 후히 중용했다. 황제 모용위에게 신흥후라는 작위를 주었고 황보진은 봉거도위, 이홍은 부마도위라는 직책을 주어 등용했다. 모용위는 전연이 멸망하고도 한참 뒤인 AD385년 동생 모용충의 반란에 연루되어 부견에게 죽었다. 전연 지도부를 추격하던 곽경이 용성에 다다랐을 때 모용평은 고구려로 달아났지만 고구려 고국원왕이 모용평을 잡아들여 업성으로 압송시켜 버렸다. 업성에서 다시 전진 수도 장안으로 끌려 온 모용평에게 부견은 급사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전연 조정에서 간첩으로 오인되어 갇혔던 양침에게는 중서저작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모용수는 부견에게 모용평을 죽여야 한다고 간청했지만 부견은 죽이지 않고 범양(학북성 탁현)태수로 내보내었으며 전연의 여러 왕족도 죽이지 않고 변방으로 내보내기만 하였다. 

사마광은 부견의 이런 관대한 조치를 냉혹하게 비판했다.

 

“ 모용평은 임금을 가리고 제멋대로 정치를 하였고

  현명한 사람을 시기하고 공로를 세운 사람을 미워하며 

  어리석고 아둔하여 포학한 일에 욕심을 내어 나라를 망치게 했으나

  스스로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 왔던 사람이다.

  부견은 그런 그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총애하는 자리를 내렸으니    

  이는 한 인간을 아낀 것이지 한 나라를 아낀 것이 아니므로

  그로인해 인심을 잃은 것이 크다.

  따라서 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었어도

  그 받은 사람은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정정을 쏟아도

  그 사람은 정성을 되 쏟지 않으니 

  끝내 은혜와 정성이 공로와 명성을 쌓지 못하고

  자기 몸을 받아들일 곳조차 없게 되었으니

  그가 도를 얻지 못한 까닭이다.“

 

(32) 전진 부견이 모용수의 부인을 아끼다(AD374) 

 

관대하고 자비심 많은 전진 황제 부견은 모용수의 처 단씨를 지극히 아꼈다. 부견의 궁궐 뒤뜰에 불러 같이 가마를 타고 놓았다. 이를 본 환관 조정이 넌지시 깨우치는 노래를 부르며 부견을 나무랐다.

 

“ 참새가 와서 제비집으로 들어가 안 보이는데(不见雀来入燕室)

  다만 뜬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만 보이네(但见浮云蔽白日)

  

부견이 얼굴빛을 고치고 단씨를 가마에서 내리게 한 뒤 환관 조정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33) 모용수 옹립의 여론(AD376-AD377)

 

전진의 양평국(하북성 관도현) 상시 모용소가 모용해에게 이렇게 모용수 옹립을  건의했다.

 

 “ 전진이 강성함을 믿고 오로지 전투에만 몰두하여 있으니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굶거나 노역으로 쓰러지고

   병사들은 바깥에서 지쳐 힘들어하니

   나라가 위태롭기가 짝이 없습니다.  

   관군장군 모용수 숙부는 어질고 지혜가 뛰어나서 영웅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반드시 연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무리들은 자신을 아끼면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AD376)“

전진의 국위가 사해를 떨치게 되자 조정안에서 서서히 국가기강이 무너질 조짐이 보였다. 삼십 여 년 전 후조의 석륵 조정에서 장작공조(기물제조 담당)를 했던 웅막이 말하기를 후조시대의 기물과 완구가 지금보다 훨씬 웅장하고 화려하며 정교했다고 지적하자 부견은 당장 그에게 장작승이라는 직책을 내리고 후조에 못지않은 병기와 기물을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전진 조정이 점차 사치에 기울고 나태해지자 큰 아들 모용농이 아버지 모용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 왕맹이 죽고 나서 전진의 법제도가 나날이 쇠퇴하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치하고 장차 재앙이 올 것 같습니다.

    도참에 있는 말도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마땅히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영웅호걸들을 영입하셔서

    하늘의 때를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모용수가 웃으며 말했다(AD377).

 

   “ 천하의 일은 네가 알바가 아니다(天下事非尔所及)”。

  

(34) 전진의 남침에 동참하는 모용수(AD378)

 

부견은 동진 조정의 어수선한 틈을 타고 남정을 결정했다.(AD378년 2월) 목표는 양양이었다. 양양은 한수를 장악하는 요충지다. 양양을 장악하면 물길로 내려가 무한을 거쳐 건강(남경)까지 직행 할 수 있다. 부견의 대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했다. 남쪽의 양양을 향하는 부견의 중군 선봉에는 아들 정남대장군 부비가 섰다. 구장과 모용위가 동행했다. 총 군사는 7만 이었다. 부견의 동군은 모용수와 요장이 이끄는 5만군으로 남향(하남성 석천)에서 양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부견의 서군은 구지와 모당과 왕현이 이끄는 4만 대군으로 장강을 끼고 무당(호북성 단강구)에서 양양을 향해 나아갔다. 총 16만 대군이다. 동진에서는 환충의 7만 군이 송자에 주둔하고 있었고 시평에 1만 뿐이었다. 수적으로 동진은 확실한 열세였다. 환충이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모용수가 남양을 뽑아버리고 양양 주변에서 중군 부비군사와 만났다, 부비는 구장의 권고에 따라 서두르지 않고 장기전으로 갈 생각이었다. 전진 조정에서는 부비가 대군을 가지고도 속히 양양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탄핵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부견조차 아들에게 전투를 재촉하며 말했다.

 

“ 봄까지 함락시키지 못하거든 

  목숨을 끊고 나타나지 마라!“

 

당황해진 부비는 마침내 양양 공격을 개시했다. 부견은 스스로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융에게 군사를 수춘에 모으라고 지시했다. 부융이 부견을 말리며 나섰다.

 

“ 형님, 강남을 얻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넓고 깊게 생각하셔야지

  어찌 그리 조급하게 덤벼드십니까? 

  만약 양양만 얻을 것이라면 대가가 움직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수후가 구슬로 천길 참새를 쏜다면(隨珠彈雀) 세상이 웃을 일 아니겠습니까?“

 

양희도 말리며 나섰다.

 

“ 한광무제가 공손술을 죽였고

  진무(사마염)제가 손호를 사로잡았지만

  두 황제가 손수 6사를 이끌고

  친히 북과 북치는 막대기를 잡고

  돌과 화살을 무릅썼다는 예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부견이 친정의 생각을 버렸다. 마침 부비가 훌륭하게 양양을 함락시켰으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AD379년1월-2월)   <다음에 계속>

 

[그림] 후연 및 서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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