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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the New Deal) 정책 대해부 : <제1부> 정책과 정치의 갈림길 ②포효하는 ‘20년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03일 09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01일 11시0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문재인 정부 향후 정책기조가 뉴딜(New Deal)을 표방함에 따라 세간의 이목이 다시 뉴딜을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뉴딜이 태동된 배경과 그 구체적인 정책의 내용과 성과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내려 볼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뉴딜의 좋은 점은 다시 배우고 나쁜 점은 반복하지 않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미국의 1920년대 : 포효하는 20년대 (Roaring Twenties) 

 

(경제성장과 공화당 장기집권)

 

쿨리지 번영기(Coolidge Prosperity, 1923-1928)로 불리는 1920년대 미국경제는 대호황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급등한 세계수요 증가의 덕을 톡톡히 누렸고 1924년 이민자를 제한할 때까지는 매년 거대한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산업생산은 급격히 증가되었고 민간소비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미국의 1920년대를 포효하는 20년대(The Roaring Twenties)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기업의 성장에 따른 미국경제의 괄목할 만한 경제적인 성장은 정치적으로 기업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공화당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실제로 미국경제가 남북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산업화발전을 해오는 동안, 즉 1860년 후반서부터 1920년대 말까지 약 70년 동안 미국 정계는 공화당의 독무대였다. 링컨대통령에서부터 후버대통령까지 15명의 대통령이 나오는 동안 공화당 대통령이 12명이 나왔으며 그랜트서부터 아서까지 네 번 연속(18대, 19대, 20대 및 21대) 맥킨리서부터 태프트까지 세 번 연속(25대,26대 및 27대), 그리고 하딩서부터 후버까지 세 번 연속(29대, 30대 및 31대)으로 공화당 대통령을 배출할 정도로 공화당이 강세였다.  

 

공화당이 대통령 선거 뿐 만 아니라 의회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경제적 번영이 지속되는데다가

  · 대부분의 기업가나 권력자들만이 선거에 몰두하였고, 

  · 소수민족들이나 경제적 약자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참정권이 없었으며 

  · 민주당이 여러 갈래로 쪼개져 있었기 (남부-중서부-서부, 진보-개혁 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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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문제 : 기업가 계급과 근로자 계급의 양극화)

 

그러나 급격한 경제성장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회적 문제점들을 창출해냈다. 특히 기업가계급과 근로자계급의 양극화, 도시와 지방농촌의 양극화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근로자계급 내부에서도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 아동근로자 및 여성근로자의 노동차별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이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질병들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사회적 약자들의 정치적 각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정치인들 중에서도 사회적 병폐에 대한 개선 혹은 개혁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물론 사회적 병폐에 대한 정치지도자들의 각성과 개선 노력은 1860년 남북전쟁 이후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거대한 물결처럼 정치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의 불-무스 개혁운동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잠시 물밑에 잠복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부터 다시 재 점화 된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문제점을 가장 전반적으로 조사 연구한 자료가 1929년에 출간된 「미들타운 연구보고서Middletown: A Study in Modern American Culture」라는 것이다. 사회학자인 린드(Robert and Helen Lynd) 부부가 쓴 실태조사보고서는 미국사회가 기업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분화되면서 격차가 급속히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1900년대 초반부터 대두된 사회적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해법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이 복지자본주의(welfare capitalism)이다. 모든 사회적 병폐를 사업별 노조가 아닌 기업별 노조를 결성하게 하고 자발적으로 이익을 배분하며 높은 임금을 주며 연금과 의료혜택 등 근로자들의 요구를 선제적으로 제공하자는 것이다. 학계나 노동계나 정치권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유럽 일부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해법으로 인식되었다. 

 

<4> 농업위기와 후버의 대책 농업유통법Agricultural Marketing Act, 1929년 6월)

 

후버는 1928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스미스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득표율은 58.2%로써 민주당 스미스 후보의 득표율 40.8%를 압도하였다. 상원의원 의석수도 6석이 늘어서 53석을 차지했고 하원도 32석이 늘어나 270석을 얻었다. 주 별로 보면 민주당은 남부 6개주와 북동부 2개주만 이겼을 뿐 나머지 40개 주는 공화당 후버를 지지하였다.  

 

비록 당시 미국 경제는 ‘포효하는 20년대(the roaring twenties)’와 쿨리지 호황(the Coolidge Prosperity)의 끝자락에 있었지만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부터 농업생산물의 과잉공급으로 골머리 앓고 있었다. 해외로 부터의 농산물 수요가 급격히 감소한 때문이었다.   

 

거의 10여년 지속된 과잉생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는 지속적으로 해법을 제시해왔다. 소위 「맥나리-하우젠 안(The McNary – Haugen Bill)」이 그것이다. 오레곤 주 맥나리 상원의원과 아이오와 주 하원의원 하우젠이 제안한 이 안의 핵심 내용은  

  

  · 수입농산물에 높은 관세를 물리고

  · 국내 농산물에는 균형세를 물려 가격을 안정시키고 

  · 잉여농업생산물은 저렴한 가격으로 매입하여 해외로 수출하며  

  · 이를 위해 연방특별기구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이 안은 1924년에 제출되어 여러 수정을 거친 뒤에 1927년과 1928년 두 번이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양원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당시 쿨리지 대통령은 두 번 모두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거부권 행사의 주된 이유는 재계가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재계의 반대 이유는,

 

  · 경제(시장)의 자율원칙에 반하는 것이고

  · 상당한 국가재정이 투입될 수밖에 없으며 

  · 농민의 자조정신(self-reliance)을 크게 손상한다는 것이었다.  

 

쿨리지 정부는 그 대안으로 당시 상무장관 후버와 농업부장관 자딘이 마련한 「농업근대화방안」을 채택하였다. 

 

  · 전력을 이용한 근대적 농업방법 도입 

  · 초우량 종자 및 작물 전파

  · 최신 농업설비 도입

  · 과학적 농업기술 전파

  · 최신 경영기법 전수 

  

등 이었다.


(후버의 농업정책 : 「농업유통법 The Agricultural Marketing Act of 1929」)

 

후버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자신이 평소에 생각했던 농업문제 해결방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는데 그것이 「농업유통법(The Agricultural Marketing Act of 1929)」이다. 1929년 6월 15일 통과된 이 법은 후버집권 이후 대공황대책 제1탄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사실 「맥나리 하우젠 법안」과 거의 같다.

 

   · 기존 「연방농업대출위원회」를 「연방농업위원회(the Federal Farm Board)」로 재편하고

   · 「연방농업대출법(1916)」에 근거한 최대 $5천억의 기금을 조성하여  

   · 잉여농산물은 매매하거나 저장하며

   · 농업관련기관에게 종자나 사육동물에 대한 사료비 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농업인에게 직접 대출은 허용하지 않았다. 위헌의 요소(연방정부가 주의 경제행위에 개입하는 것은 위헌)가 있었고 또 도덕적 해이를 초래할 염려가 있다는 비판도 강했다.

 

후버의 야심찬 작품 「농업유통법 1929년」은 성공하지 못했다. 크게 세 가지 원인 때문이다.

 

   · 정부의 수매를 기대한 농가들이 생산을 오히려 늘렸고,

   · $5천억의 기금이 농산물가격을 끌어올리기에는 턱없이 불충분하였으며, 

   · 농산물 생산량 제한과 같은 결정적이 제한조치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계속)​

 

 ◈ 뉴딜(the New Deal) 정책 대해부

제1부 정책과 정치의 갈림길  -  세부목차

 

<1> 공화당 진보파의 분당과 테디 루즈벨트의 ‘Bull Moose Movement’(1912)

<2> 윌슨 대통령과 WWI(1914-1918)와 베르사이유 조약(1919)

 

<3> 미국의 1920년대 : 포효하는 20년대 (Roaring Twenties) 

<4> 농업위기와 후버의 대책 농업유통법Agricultural Marketing Act, 1929년 6월)

 

<5> 월-스트리트 증시 대폭락(the Wall Street Crash of 1929)과 대공황

<6> 후버의 대공황 종료선언 (1930년 5월 1일)과 11월 중간선거 참패 

 

<7> 1930년 은행위기

<8> 스무트-홀리 관세법(1930년 6월 17일 서명 발효)

<9> 1931년 미국과 유럽의 은행위기 

 

<10> 후버의 대공황 타개정책

<11> 후버의 1932년 증세법(The Revenue Act of 1932)

 

<12> 1932년 11월 대통령 선거와 FDR 집권

<13> 1933년 금융위기와  긴급은행법(the Emergency Banking Act, 1933)

 

<14> FDR의 집권 100일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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