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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B)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03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5> 북위와 후연의 갈등(AD395)

 

북위 탁발규는 여러모로 후연과 인연이 깊고 또 신세를 많이 졌다. 할아버지 탁발십익건의 2명의 부인이 모두 모용씨였고 탁발십익건의 딸도 모용씨에게 시집가기도 했다. 게다가 AD387년 유현의 공격을 받은 탁발규가 장수 안동을 보내 후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들어준 적도 있었다. 그런 탁발규가 후연을 배반하고 변경을 침략하였다. 탁발규가 후연과의 우호관계를 끊은 것은 4년 전의 일 때문이었다.

 

위왕 탁발규가 AD391년 7월 동생 탁발고를 보내 후연에 알현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모용수의 황족들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더 많은 명마를 요구하면서 탁발고를 억류하였다. 화가 난 탁발규는 후연과의 유대를 끊고는 대신 서연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탁발고가 후연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태자 모용보에게 다시 붙잡혀 돌아왔는데 관대하기로 유명한 모용수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탁발고를 예전처럼 우대했다. 

 

남방경략도 거의 끝난 상태라 여유가 있던 모용수는 정예 군사력을 동원하여 북위토벌에 나섰다. 태자 모용보의 지휘 아래 요서왕 모용농, 조왕 모용린에게 8만 기병을 주어 오원(내몽고 포두)서부터 그 이북지방을 공략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따로 범양왕 모용덕과 진류왕 모용소에게 1만 8천 군사를 주어 그 뒤를 잇게 했다. 산기상시 공호는 북위를 토벌하려는 주군 모용수에게 이렇게 건의하며 따졌다.

 

 “ 위와 우리는 대대로 혼인으로 엮인 사이입니다.

   그들이 내부적으로 어려웠을 때 그들을 도왔기 때문에

   그들도 우리를 오랫동안 고마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우호관계가 깨진 것은 몇 년 전 명마를 무리하게 요구하면서

   그의 아우를 이쪽에서 억류하면서 생긴 일입니다.   

   잘못은 우리에게 있는데 어찌 갑자기 군사를 일으키려 하십니까?“

   탁발(섭)규는 침착하고 용기가 있으며

   어려서부터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자라서    

   지혜 또한 범상치 않습니다.

   황태자(모용보)께서는 나이가 젊지만 마음이 너무 과단성으로 넘쳐서

   북위를 가볍게 볼 우려가 많습니다.

   만일 하나라도 일을 그르친다면 태자의 위엄이 크게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말이 깊고 격렬하였는데 모용수는 크게 화를 내고 그의 관직을 빼앗고 내쳐버렸다. 

 

<6> 후연의 참합피 패전(AD395년 10월)

 

북위 장곤은 후연의 10만 대군이 몰려온다고 하자 탁발규에게 이렇게 말했다.

 

 “ 후연이 적위의 활대를 점령하고(AD391) 서연의 장자를 차지한 뒤(AD394)    

   기세를 몰아서 국가의 자원과 군사력을 모아 우리를 가볍게 여기고 덤비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야위고 약하며 궁핍한 모습을 보여 그들의 마음을 풀어놓은 다음에

   교만한 그들을 치면 마침내 이길 수 있습니다.“

 

탁발규가 그의 말대로 부락과 가축을 몰아서 천천히 서쪽으로 도망가는 척 했다. 그리고  허겸을 후진에 보내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동시에 후연의 배후에 군사를 매복시켜 후연군사와 조정과의 연락사절을 중간에서 모조리 사로잡도록 시켰다. 출병할 당시 모용수는 이미 깊이 병들어 있었다. 전장에서의 소식이 두절되자 조정도 불안해졌고 전장에서도 병들고 늙은 황제 모용수의 건강상태를 몰라 전전긍긍하였다. 탁발규는 사로잡은 후연의 연락병을 다시 돌려보내 주면서 모용보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네 아버지(모용수)가 죽었다는데 왜 돌아가지 않는거냐?” 

 

후연의 점술사 근안이라는 사람이 모용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 하늘의 별을 보니 때가 매우 불리한 것 같습니다.

   크게 패할 것 같으므로 빨리 재난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용보는 불쾌하고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군사를 되돌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 하는 동안에 포로로 잡혀있던 연락병이 돌아와서 아버지의 유고를 전달하자 모용보는 더욱 초조했다. 모용수 황제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자 조왕 모용린의 부장 모여숭이 모용보를 죽이고 모용린을 세울 반란을 계획했다가 발각되어 죽었다. 

 

태자 모용보는 동생 모용린이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했다. 모용린 또한 형 모용보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모용보는 즉각 군사를 포두 동쪽의 참합피(양고, 대동 북동쪽)로 물렸다. 이때를 기다리던 탁발규의 2만 경기병이 모용보를 추격했다. 

 

후연의 군사가 참합피에 도착할 무렵 거대한 바람이 뒤편으로부터 불어 와 군대를 덮쳤다. 지담맹이라는 군사작전가가 이렇게 말했다.

 

 “ 북위의 군사가 오고 있다는 징후인 것 같습니다.

   서둘러 군사를 보내 방어하셔야 합니다.“

 

모용보는 그들이 상당한 거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 지담맹의 건의를 묵살했다. 다시 지담맹이 간청하자 곁에 있던 모용린이 화를 내면서 꾸짖었다.

 

  “  전하(모용보)의 귀신같은 무력과 지략은 

     사막을 족히 가로질러 갈만한데

     어찌 색로가 감히 멀리 따라오겠는가.

     지담맹이라는 작자가 망언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당장 목을 베어 돌려보내야겠다.“ 

 

지담맹이 대꾸했다.

 

  “ 부씨가 백만의 대군을 가지고 

    회남에서 패한 것은 

    천도를 믿지 않고 

    오직 무리의 숫자를 믿고 적을 가볍게 본 때문입니다.“

 

사도 모용덕도 태자 모용보에게 지담맹의 간언을 듣기를 권유했다. 마침내 모용보가 군사 3만을 보내 모용린에게 후방을 막을 것을 맡겼다. 그러나 모용린 스스로가 지담맹의 말을 믿지 않은 터이므로 형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기병을 풀어서 사냥을 즐기도록 방치해 뒀다.

 

빠른 속도로 모용보를 쫓아오던 탁발규의 2만 기병대는 세 갈래로 나누어 참합피의 모용보 군사를 포위하였다. 후연의 군사는 대패했으며 태자 모용보만 겨우 살아서 빠져나갔다. 진류왕 모용소가 붙잡혀 죽었으며 모용수의 아들 노양왕 모용왜노, 모용수의 조카 계림왕 모용도성, 제음공 모용윤국 등 장수 수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것이 참합피 대전(AD395년 10월)이다. 탁발규는 포로 중에서 쓸 만한 관리들은 등용해 썼으며 나머지 관리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려다가 왕건의 건의를 받아들여 땅을 파고 묻어죽였다.

 

<7> 모용수의 북위 복수실패와 죽음(AD396)

 

평규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모용수는 이른 봄(3월) 모용덕에게 중산을 맡기고는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운중(내몽고 탁극탁)을 향해 진격해 나갔다. 승리에 도취되어있던 탁발규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평성(산서성 대동)을 지키고 있던 탁발건은 준비를 태만히 하고 있었던 까닭에 모용농과 모용륭의 습격을 받고 패사하였다. 평성을 함락시키고 북으로 진격하던 모용수는 참합피(산서성 양고 동북)를 지나면서 산처럼 쌓여있는 시체와 유골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고 그 곳에 내려서 유골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모용수는 물론 모든 군사들이 목을 놓고 우는 소리가 산과 계곡을 뒤엎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부끄럽고 분하여 피를 토하기 시작한 모용수는 이때부터 앓기 시작했고 전군은 평성(산서성 대동) 서북쪽 10여KM 지점에 머물렀다. 태자 모용보 등이 놀라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는데 후연의 군사들 중에 배신자들이 북위로 들어가 후연의 주군이 이미 죽어서 수레 안에 걸쳐 두었다고 보고했다.

 

모용수가 평성 부근에 주둔한지 10여 일 만에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자 후연군대는 마침내 북벌을 중단하고 회군했다. 며칠 뒤 상곡(하북성 회래)에서 모용수는 죽었다. 향년 70세. 그러나 모용수의 죽음은 비밀에 붙여졌고 13일 뒤 중산에 도착하고 나서야 발표되었다.   

 

<8> 모용보 즉위(AD396)

 

태자 모용보가 모용수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즉위했다. 모용수 시호는 세조 성무황제로 정했다. 5월 대대적인 인사가 시행되었다. 범양왕 모용덕(모용보 삼촌)은 도독기연청서형예육주제군사로 업(하북성 한단)에 주둔하고, 동생 요서왕 모용농은 도독병옹익양진량육주제군사로 진양(산서성 태원)에 주둔시켰다. 고녹관위를 태사, 부여왕 부여울을 태부로 삼았다. 부여울은 전연 모용황이 부여를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아 온 부여 왕자로 전연이 망했을 때 전진으로 갔다가 다시 후연에서 왕으로 책봉된 사람이다. 조왕 모용린에게는 상서좌복야, 모용륭에게는 우복야라는 직을 겸하게 했다. 장락공 모용성은 사예교위, 의도왕 모용봉은 기주자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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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에게는 단씨 자매가 황후로 있었는데 먼저 죽은 단씨(선단후)가 지금의 황제 모용보와 모용령을 낳았고 그의 동생 후단후는 모용랑과 모용감을 낳았지만 나이가 매우 어렸다. 모용수는 정실이 아닌 여러 희첩이 낳은 아들, 즉 모용린과 모용농과 모용륭과 모용유를  사랑했는데 그 중에서도 또 다른 비첩 단씨가 낳은 모용회를 특별히 사랑했다.

 

<9> 불안한 승계와 후단후의 자결(AD396)

 

태자 모용보는 처음에는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공손하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으나 황태자가 되고 부터는 게으르고 교만하며 주변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후단후는 그것이 걱정되어서 모용수가 살아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 태자가 승평의 시절을 만난다면 훌륭한 수성의 군주가 되겠지만

   지금과 같은 혼란한 시절이라면 

   세상을 구제할 인물이 되지 못할 것이 두렵습니다.

   요서왕(모용농)과 고양왕(모용륭)은 모두

   폐하의 훌륭한 아들이시니 

   그 중 한 사람을 선택하여 대업을 넘겨주셔야 합니다.

   조왕 모용린은 간사하고 속이며 너무나 강퍅합니다.

   일찍이 그를 제거하심이 옳습니다.“   

 

모용보는 여러 주변 사람들을 잘 대접하므로 모용수는 그런 태자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 당신이 나를 진나라 헌공으로 만들 셈이요?”

 

진 헌공이란 춘추시대 진나라 주군으로 애첩 여비의 거짓말을 듣고 태자 신생을 핍박하여 결국 자살하게 한 사람이다.

 

후단후는 자신의 충심을 몰라주는 모용수를 야속해하면서 울며 뛰쳐나가서 자신의 동생인  범양왕 모용덕의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 태자가 덕과 재능이 없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다.

  내가 사직을 위해 충언을 했건만

  주상께서는 나를 여희에 비유하시니 이 일을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

  태자는 반드시 사직을 잃을 것이다.

  범양왕은 덕과 재능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

  사직의 존망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범양왕의 판단에 달려 있을 것이다.“

 

 

모용보와 모용린이 그 소식을 듣고 섭섭하고 한탄스럽게 생각했다. 모용보는 황위에 오른 보름 뒤 모용린을 후단후에게 보냈다.

 

 “ 후께서는 일찍이 주상이 대업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시다면 일찍이 스스로 결단을 내리셔서 단씨 종족을 보존하십시오.“

 

자결을 택하라는 말이었다. 후단후가 소리쳤다.

 

 “ 너희 형제가 어렵게 생각하지도 않고

   에미를 압박하여 죽이려 드는데 

   어떻게 대업을 지킬 수가 있겠느냐! 

   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느냐?

   다만 나라가 오래지 않아서 망할 것이

   억울해서 그런 것이다.! “

 

후단후는 마침내 자결했다.

 

후연의 청하공 모용회는 희첩 단씨의 소생으로 어머니는 미천하였지만 용맹하고 사내답고 뛰어나서 모용수가 죽기 전에 몹시 총애하였다. 그런 까닭에 북위를 정벌하는 동안 모용회에게 동궁의 업무를 맡도록 했고 태자와 똑같이 대우하도록 했다. 모용보가 패하고 나서 직접 북위르 정벌할 때에는 모용회에게 용성에 진수하여 동북면을 방어하도록 했는데 모용회가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다스리면서 훌륭하게 행정을 펼쳐 보였다. 그런 솜씨를 지켜 본 모용수는 병이 위독해지자 유언으로 모용회를 모용보의 후사, 즉 태자로 삼을 것을 모용보에게 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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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용보는 모용회보다는 복양공 모용책을 더 사랑했으므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모용보의 다른 아들인 장락공 모용성이 자신이 나이가 같은 배다른 동생 모용회의 아래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따라서 삼촌 모용린과 함께 아버지 모용보에게 강력하게 11살 짜리 모용책을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모용책을 태자로 책봉했다. 모용성과 모용회 모두 왕으로 승격하였지만 이 일로 모용회는 마음이 크게 상하여 원한을 품었다. 

 

9월에 장무왕 모용주(모용황의 아들, 모용수의 동생)가 모용수 자결한 후단씨를 받들어 용성에서 장사를 치렀다. 모용보는 조서를 내려서 그 지역에 있는 모용륭과 모용회의 가속 및 보좌관등 모두를 중산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모용회는 조서를 어기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모용회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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