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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X)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2월04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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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25> 환관 유등과 양자 원침(AD518)

 

호태후의 측근 삼인방(유등, 후강, 우충)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 격인 우충이 AD518년 3월에 죽자 유등이 그 자리를 메웠다. 유등은 환관으로 글자는 못 읽었지만 머리가 좋아서 교묘한 수법을 잘 만들어냈고 또 호태후의 마음을 잘 읽었다. 호태후가 그의 공을 깊이 인정하였기 때문에 시중 및 우광록대부라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서 돈을 쓰면 그가 하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었다. 

 

하간왕 원침은 원간의 아들로 정주자사로 있으면서 탐욕하고 폭정을 거듭하다가 쫓겨나게 되었다. 원침은 유등의 양자가 되기 위해 거만의 금은보화를 뇌물로 주었다. 유등은 호태후를 설득하여 겸도관상서를 거쳐 원침에게 진주자사가 되게 하였다. 유등이 병이 들자 죽기 전에 원침을 귀하게 만들기 위해 위장군 및 의동삼사를 덧붙여주었다.

 

 

<126> 북위의 흔들림 전조 : 무사들의 소란(AD519)

 

위나라 정서장군 장이의 아들 장중우가 봉서를 올려 무인들이 높은 자리를 앉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무인들의 다수가 선비족이어서 한족이 크게 밀렸거나 아니면 무인들이 득세하면서 정치가 거칠어져 민심이 크게 불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무관들과 그 가족들이 들고 일어나 장이 및 장중우 부자를 도륙하겠다고 협박했지만 장이 부자는 눈도 깜짝이지 않았다.   

 

2월 황실 호위군인 우림군과 호분군 중 천여 명이 상서성으로 몰려와 장중우의 형 장시균을 내놓으라고 소란을 피웠다. 상서성이 내놓지 않자 우림호분군은 기왓장과 돌로 문을 부수고 불을 지르고는 장이의 집으로 가서 끌어낸 다음 구타하고 집을 불 질렀다. 장시균은 도망가다가 다시 돌아와 아버지만은 해치지 말라고 간청했는데 붙잡혀 불구덩이 던져졌다. 장시균은 목숨을 건졌지만 장이는 그 다음날 화상으로 인해 죽었다.  

 

호태후는 우림호분군 중에서 강포한 8명을 체포하여 목을 자르고 나머지는 죄로 다스리지 않았다. 

 

 

<127> 인재선발의 난맥상(AD519)

 

당시 북위 관원들의 숫자는 이미 넘치도록 많아서 새로 뽑는 자리는 적고 응시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이부상서 이소가 인재선발을 등한시하여 원성과 물의를 일으키자 최량으로 교체했는데 최량은 인사개혁을 주장하면서도 현명함이나 우매함을 가지고 뽑지 않고 오직 근무연한이나 연공서열로 사람을 뽑았기 때문에 적체되어잇던 사람들은 최량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최량의 조카 유경안이  능력과 품성이 아니라 연공서열 만으로 사람을 뽑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최량은 이렇게 대답했다.

 

  ” 네가 말한 것은 진실로 깊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내가 이번에 내린 서공서열 기준 방침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즉, 옛 적과 지금은 다른 것이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적절히 시대에 부응해야 하는 법이다. 

    네가 한 말은 옛 법을 가지고 

    적절히 다스리려 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설숙도 연공서열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을 비판하고 능력과 인품으로 새로운 인재를 뽑자고 건의했지만 다 묵살되었다. 최량에서 이침으로 이부상서가 교체되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사마광은 북위가 사람 뽑는 것을 실패한 것이 최량부터라고 지적하였다.(魏之選擧失人自亮始也) 

 

 

<128> 천문변고가 일어나자 고태후를 독살한 호태후(AD518)

 

그 때 북위 하늘에 천문변고가 나타났다. 호태후는 요광사에 유폐된 고태후(고영, 원각의 부인)가 저주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고태후는 작년(AD515) 호태후를 독살하려다가 들켜서 요광사에 유폐되었었다. 고태후가 갑자기 죽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그 대 사람들은 호태후가 독살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호태후의 집정이 6년이 되자 황제 원후(당시 열 살)는 호태후의 명령을 령(령)이라하지 말고 격을 높여서 황제 급인 조(조)라고 하도록 했다. 

 

북위는 AD431년 하, .AD436년 북연, 그리고 AD439년 북량을 정복함으로써 5호 십육국 시대를 끝내고 사실상 황하 이북의 광대한 영토를 통일한 셈이다. 그 이후 간간히 남쪽(동진,유송과 소제 및 소량)과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지만 당시 최대강국은 북위였다. 당연히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이 들어왔고 부를 축적해갔다. 창고에는 비단과 곡식이 넘쳐났고 대신들도 경쟁하듯이 재산을 끌어 모았다. 황족 고양왕 원옹이나 하간왕 원침은 거의 황제와 같은 부를 지녔으며 하간왕 원융이나 상서령 이숭의 재산도 그들과 필적할 만했다.      

 

호태후는 불교에 깊이 심취되었으므로 끝없이 많은 사찰을 지었다. 호태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관대작들도 불사를 일으키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전국은 불사로 분주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백성의 힘은 고갈되었고 원성은 하늘 높이 찔렀다. 국가의 재정이 점차 고갈되기 시작했고 관리들의 봉록은 다시 줄어들고 백성들의 세금은 높아만 갔다.

임성왕 원징이 표문을 올렸다.  

 

  ”남쪽의 송연이 항상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마땅히 국가가 강성하고 군사가 힘에 넘쳐서 통일의 위업을 달성해야 할텐데

   최근처럼 공사가 빈번하고 씀씀이가 헤퍼서는 안 됩니다.

   비용을 줄이시고 급한 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당시 학교나 황족회당을 건설하던 인력들은 전부 사찰 건설에 동원되었으므로 학교나 회당건축은 모두 중단된 채로 방치되었다. (AD519)

 

 

<129> 원광과 원징의 대립(AD519)

 

중위(군사책임자) 원광은 강단 있는 황족이었다. 십 이년 전인 AD507년 탁지상서로 있으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최고실세 고조를 지록위마의 간신이라고 비판했던 사람이다. 원광은 자주 임성왕 원징과 의견 충돌이 있어서 원징을 공격하는 주청을 올릴 계획을 짰다. 원징 또한 원광의 잘못을 30여개 들추어서 황제께 주청하여 사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AD519년 8월 조정에서는 사형만은 면제시키고 삭탈관직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중위의 업무는 실제 후강이 맡았다. 신웅이 전 황제들이 황족을 용납한 예를 여럿 들면서 사면해 주기를 간청하자 원광을 사면하여 평주자사로 임명해 내보냈다.

 

 

<130> 원화와 원차의 징계(AD519)

 

호태후는 겸중서사인 양욱을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부탁했다.

 

  ” 외직에 있는 여러 황족들이 민심에 부합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으면

    경은 그것을 듣고 숨기거나 감추지 마시고 보고 하시오.“

 

양욱은 상주자사 양균이 은식기를 만들고 양주자사 이숭이 수레에 실어서 영군장군 원차에게 보냈다고 말했다. 호태후는 원차 부부를 궁으로 불러서 울면서 질책했다. 원차는 이 일로 양욱을 심히 미워하게 되었다. 

 

마침 유선화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자 원차는 양욱에게 원한이 있던 친척을 시켜 양욱이 유선명을 숨겨 주었다고 무고하였다. 밤에 군사를 보내 양욱을 잡아 들였는데 양욱은 무고를 한 자신의 친척이 원한을 품은 이유를 낱낱이 호태후에게 말했다. 호태후가 결박을 풀어주고 무고한 친척에게 사형을 내렸다.     

 

 

<131> 원차와 유등의 불만과 쿠테타 호태후 실각(AD519)

 

위의 태부 시중 청하왕 원역은 원굉의 아들로 풍채가 좋아서 호태후가 가까이 하던 인물이었다. 정무에도 밝고 재주도 많아서 정치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영군장군 원차는 금병을 총괄하는 사람으로써 호태후의 신임을 바탕으로 매우 교만하고 방자하여 원역이 법으로 제재하고 단속하였다. 원차가 원역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했다. 위장군이며 실세인 유등이 동생을 등용시키려하자 원역이 그것을 막고 주청을 올리지 않자 유등 또한 원역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다.

 

원차는 원역이 추천한 경박하고 허영심 많은 송유라는 사람을 꾀어서 원역에 대해 무고하도록 사주했다. 즉, 한문수 부자가 반란을 일으키고 원역을 세우려고 했다는 거짓 모의였다. 수사 끝에 원역은 증거가 없어서 풀려났는데 송유는 무고죄에 걸려들었다. 원차가 호태후에게 말했다.

 

   ” 지금 송유를 죽이면 

     앞으로 모반을 고발할 사람이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원차는 이 일 이후로 원역을 더욱 껄끄럽게 생각하고 유등과 손을 잡았다. 중황문 호정을 통하여 황제 원후에게 이렇게 자백하도록 했다.

 

  ” 원역이 저 호정에게 뇌물을 주면서 

    위 주군을 독살하라 했습니다.

    자기가 황제가 된다면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열한 살 황제는 그 말을 믿었다. 원차는 황제와 함께 가면서 유등에게 호태후가 있는 궁(가복전)의 문을 폐쇄하도록 시켰다. 원역이 원차와 마주치자 소리쳤다.

 

  ” 당신이 반역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원차가 대꾸했다.

 

  ” 반역한 사람을 포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시켜서 원역을 붙잡고 가두었다. 유등은 조서를 내려서 백관을 불러 모은 다음에 원역을 대역부도로 몰아갔다. 모든 사람들이 원차를 두려워하여 서명했지만 오직 복야 유조만이 항거하는 말로 옳지 않은 판단이라고 말하고 서명하지 않았다. 유등과 원차는 대신들이 의결한 것을 들고 황제에게 들고 가 결재를 얻었다. 원역이 죽었다. (AD519년 7월4일)병이 있어서 모든 정사를 황제에게로 돌린다는 호태후의 조서를 거짓으로 만들어 내렸다. 호태후의 시대가 끝나고 원차와 유등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호태후는 북궁 선광전에 유폐되었고 열쇠는 오직 유등이 가지고서 최소한의 음식만 허락하였다. 굶주리고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 호태후가 말했다.

 

  ” 호랑이를 기르면 씹혀 먹힐 수가 있다더니

    내가 그런 꼴이구나.“ 

 

유등은 황실 원로격인 태사 고양왕 원옹을 앞세워 정사를 오로지 하였지만 실권은 원차와 유등에게 있었다. 원차는 군권을 가지고 밖을 맡고 유등은 황실 안을 장악하였다.  

 

 

<132> 원희의 쿠테타 실패(AD520)

 

원역이 피살되자 상주자사 중산왕 원희가 동생 원략과 원찬과 함께 유등과 원차가 농단하는 조정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참모 유원장이 성 내에 잇는 무리를 이끌고 들어가 원희와 원찬을 체포하였다. 원차는 사람을 보내 원희와 원찬의 목을 베게 하였다.     

 

원략을 다행히 체포되지 않고 피신했는데 그의 목에 현상금이 걸렸다. 원략은 과거 부하엿던 사람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서하태수 조쌍의 집에서 1년을 숨어 지냈다. 원략은 남쪽으로 도망가 장강을 건너 양으로 망명하였고 양에서는 그에게 중산왕의 칭호를 주었다.  

 

원역의 동모 동생 여남왕 원열은 원차에게 붙어서 목숨을 연명했다. 원차는 원열에게 시중 태위라는 자리를 주었다. 원열은 원역의 아들 원단에게 장100대를 때려 거의 죽게 만들어서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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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12월04일 17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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