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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강자의 이익인가?-추미애 사태가 우리에게 묻는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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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9월10일 12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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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평중
  • 한신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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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란 무엇인가](M. 샌델 지음)는 2010년 이래 우리 사회를 강타한 슈퍼 베스트셀러다. 2백 몇 십만 권이 팔렸다. 하버드대 1학년 교재라고해도 소설이나 수필이 아니라 철학책인데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이다. 막상 본국에선 많이 팔리지 않았다.  

출판마케팅을 비롯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한권의 철학책이 사회문화현상으로 커진 데는 책 주제가 한국인의 마음을 건드렸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즉 한국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식이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고 난 생각한다. 실제로 2010년경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 10명 가운데 8명이 한국사회를 불공정하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1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이 정의로운 나라, 공정한 사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을까?

 

 - 정의와 공정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순간 직면하는 절박한 현실적 문제다. 그와 동시에 영원한 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정의에 대한 논쟁이 철학사의 시작과 동행하는 게 그 증거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인이었던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는 말을 남겼다.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폴리테이아)]는 정의(옳음)를 둘러싼 소크라테와  트라시마코스의 치열한 논쟁으로부터 시작한다.

 

트라시마코스에 의하면 한 사회의 정의(옳음)는 강자의 이익에 복무한다. 정의를 구현한다는 법도 강자의 편익을 관철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결국 힘이 정의다. 이와 배치되는 모든 정의론은 순진하거나 헛소리라는 게 트라시마코스의 냉소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엔 트라시마코스의 이런 주장 자체가 당대 아테네의 총체적 부패를 폭로하는 병적 징후다. 이상국가(좋은 나라)는 영원한 정의의 원리(이데아)에 따라 운영되는 공정한 나라라는 확신을 가졌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겐 트라시마코스는 궤변론자(소피스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 결코 설복되지 않았으며 끝까지 앙앙불락한다.

 

- 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에게 완승을 거둔다. 후자를 지칭하는 궤변론자라는 이름 자체가 소크라테스에게 진리의 스승이라는 명예를 선사한다. 그렇다면 철학사 서술은 그렇다 치고 현실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완전히 사망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안다. 피 튀기는 현실정치와 적자생존의 사회현장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여전히 살아있다. 트라시마코스의 명제는 적나라한 권력정치의 한 실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트라시마코스가 결코 죽지 않았다'는 내 언명은 소크라테스 이래 현대의 롤스와 샌델에 이르기까지 2천년이 넘도록 보편적 정의론이 부단히 탐구되고 있다는 데서 우회적으로 증명된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백만권씩 팔리는 이유는 인간사회의 현실이 아직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싸움은 철학사 안에서만 종료 됐을 뿐 현실에선 아직 진행형이다.

 

- 인류역사 전체가 트라시마코스 류의 현실추수주의적 상대주의 대(對) 소크라테스식 보편 정의론의 갈등으로 압축될 수도 있다. 사실 수천년 정치사의 흐름은 다음과 같은 정의원리가 확장되고 뿌리를 내려가는 역사이기도 했다. 역동적인 한국현대사는 더욱 그렇다.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주되, 그 누구도 법과 정의 앞에서 특권을 주장할 수 없으며,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보편적 정의론의 원칙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편타당한 정의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은 인류역사의 성취를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의와 옳음 없이 법이 있을 수 없으며, 나라다운 나라가 불가능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 문재인 정부는 정의와 공정을 앞세워 국민의 뜨거운 박수와 함께 출범했다. 6공화국을 통틀어 문 정부가 오랫동안 가장 높은 지지율을 누려온 것도 정의와 공정을 실천할 것이라는 국민적 여망과 시대정신을 업었기 때문이다.

 

- 나는 문재인 정부가 이런 국민적 기대와 역사적 소명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본다. 이건 개인 차원의 주관적 실망이나 우려만은 아니다.

 

- 조국 사태에 이어 추미애 사태는 문재인 정부가 트라시마코스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여기서 문 정부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며 '법은 강자의 편익을 위한 것'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국-추미애를 구하기 위한 정부여당의 필사적 노력이 한결같이 '궤변'의 향연에 머무르는 본질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정의의 법 앞에 그 누구도 특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보편정의론을 부정하는 것은 인류문명사의 흐름을 거역하는 시도다. 이는 법치주의와 보편 정의론을 지향해 온 한국민주주의의 성취를 부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 언젠가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과오는 보편타당한 정의원리를 부정한데 있다'고.

나아가 문 정부는 실제로는 트라시마코스의 궤변을 추종하면서도 그것과 정반대되는 보편정의론으로 정권을 치장함으로써 정의원칙 자체를 조롱의 대상으로 타락시켰다.

 

인간은 정의 없이는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결정적 과오는 그 정의를 한낱 웃음거리로 만든데 있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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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9월10일 12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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