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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22 : 사마염의 서진(西晉) <I>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1월21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1년12월07일 16시3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36> 팔왕의 난 

 

진나라 무제 사마염은 AD279년 대도독 가충의 지휘아래 대군을 내려 보내 오나라의 혼군 손호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AD280) 그러나 이 통일 서진 또한 불과 10년 만에 8왕의 난이라는 전에 없던 혼란과 분열을 겪은 뒤 해체된다.   

    

 

① 사마염의 사망(AD290)과 가황후의 국정농단

 

중국을 통일한 진무제 사마염은 AD290년 54세를 일기로 죽었다. 황태자 사마충(AD259-AD307)이 31살의 나이로 자리를 이어받아 진혜제(晉惠帝)가 되었지만 그는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와병중인 사마염 곁에서 홀로 병 수발을 들던 황후 양지와 그의 아버지 양준이 사실상 정치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황제 사마충의 부인은 가황후로써 대장군 가충의 딸이었다. 그러나 가황후는 너무 난폭했고 질투가 심해 시아버지 사마염이 한 때 폐위를 하려고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가황후는 심복 환관 동맹과 결탁하여 양준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가황후와 환관 동맹은 형주도독이자 황제의 이복동생인 사마위의 도움을 얻어냈다. 사마위가 이복형제 양주도독 사마윤(이 또한 황제 사마충의 이복동생)와 함께 황제알현을 요청했고(AD291년 2월 20일) 사마위와 사마윤이 입조하는 것을 계기로 안팎에 계엄조치를 내려 양준을 무고죄로 얽어매고 가택 연금시켜 버린 뒤 사마요와 400군사를 보내 양준의 일족은 물론 장소, 이빈, 단광 무무 등 수 천 명의 양준 무리를 족멸시켰다. 양준이 차지하던 국정 최고자리 태재는 사마황실의 최고 연장자인 사마염의 삼촌인 사마량이 낚아챘다. 양준 축출 쿠테타의 겉에는 사마량과 사마위가 있었지만 그 깊은 배후는 가황후와 동맹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조종한 것이다. (AD291년 3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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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가황후와 환관 동맹의 태재 사마량 제거(AD291년 6월12일) :  8왕자 난의 1막

 

태재 사마량이 집권하자 그의 정치는 과거 양준의 정치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민심을 얻기 위해 1000명이 넘는 사람에게 공훈을 수여하여 국고를 바닥냈고 진혜제 황후 가씨 친척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가황후의 오빠 가모, 외삼촌 곽창, 남동생 아들 가밀 등이 정치실세가 되었다. 

이번 거사에 큰 공을 세운 황족 초왕 사마위나 동안왕 사마요도 만만치 않은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문제는 가황후의 포악함이었다. 가황후는 양태후를 유폐시킨 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서인시켰다. 

 

가황후의 포악함이 날로 더해가자 가황후 폐위를 모의했으나 가씨 실세들의 반발이 걱정되었다. 쿠테타 실력자 중의 하나인 초왕 사마위도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여 가황후 만큼이나 주변의 원성을 높이 사고 있었다. 태재 사마량과 태보 위관이 초왕 사마위의 병권을 빼앗아 배외에게 주려고 사마위를 봉지로 내쫓으려고 시도했다. 크게 반발한 사마위는 참모 공손굉과 기성을 통해 가황후를 움직여 봉지로 가지 않도록 조치했다. 

 

나아가 가황후를 설득하여 이 기회에 사마량과 위관을 몰아 내도록 계략을 꾸몄다. 즉, 사마량과 위관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사마량이 그 자리를 차지할 역모를 꾸몄다고 참소했다. 가황후는 황제를 움직여 조서를 내려 “사마량과 위관을 파면하라.” 명령을 내렸다. 사마량을 집으로 보낸 뒤 군사를 보내 사마량의 가택을 포위했다. 사마량의 참모 유준이 ”싸워 볼만 하다.“고 했지만 사마량은 ”나의 붉은 마음을 쪼개어 보여주고 싶다.“고 하며 무력저항을 포기했다. 결국 사마량의 전 가족은 이조의 손에 죽었다.(AD291년 6월 12일) 이 사건이 20년에 걸친 진나라 ‘8왕자의 난(AD290-AD310)’의 첫 서막이다.

 

 

③ 가황후와 동참의 사마위 제거(AD291년 6월13일) : 8왕자 난의 2막 

 

이제 군권은 사마량에게서 초왕 사마위로 옮겨왔다. 초왕 사마위를 잡으려다가 오히려 사마량이 잡힌 꼴이 되고 만 셈이다. 그 이면에 가황후와 동맹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마위의 참모 기성은 사마위에게 가씨의 실세인 가밀과 곽창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위는 망설였다. 가씨 세력이 워낙 막했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마위와 가씨 세력이 갈등을 내보일 즈음에 황태자(사마휼) 소부(스승)인 장화가 내관 동맹을 불렀다. “가서 가황후에게 말하시오. 초왕 사마위가 두 대신(사마량과 위관)을 죽였으니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천하의 권위가 그에게 쏠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제와 황후는 어찌 편안하시겠소? 그를 서둘러 다스려야 합니다.” 가황후도 같은 생각이었다. 장화와 가황후와 동맹이 나서서 아둔한 황제 사마충을 설득하였다. 황제가 마침내 조서를 내렸다. “초왕 사마위가 조서를 위조했으니 그의 말을 듣지 마라.” 이 조서 한 마디에 초왕 사마위의 모든 병사들이 칼을 놓고 도망쳤다. 군사들이 초왕 사마위를 사로잡고는 목을 베었다.(AD291년 6월 13일) 사마위의 참모 공손굉과 기성의 삼족도 이멸되었다. 이것이 진나라 8왕자 난의 제2막이다.

 

이제 가황후와 동맹의 독재를 막는 가로막는 세력은 모두 제거되었다. 진혜제 사마충은 무능했다. 훌륭한 원로훈구공신들은 이미 다 죽었고 사마염의 형제나 종친들 중에 세력을 형성할 만한 자들은 거의 소탕되었다. 이제 가씨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가모가 산기상시 및 시중이 되었고 배외는 시중을 맡았으며 배해는 중서령이 되었고 왕융은 우복야가 되었다. 겉으로는 장화의 노력으로 안팎의 정치가 잘 다스려져 큰 문제가 없이 나라가 굴러간다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가황후와 동맹 등의 내관들의 전횡으로 소리 없이 진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유폐된 양태후는 가후의 박대에 못 이겨 곡기를 끊고 버티다가 죽었다.(AD292년 2월1일) 가황후는 양태후의 원혼이 하늘로 올라가 사마염에게 원망할 것이 두려워 시체를 엎어 장례를 치렀다. 우박이 내려 패인 땅의 깊이가 3척이나 된다고 했고(AD293년) 창고에 큰 불이 나서 모든 무기가 불타기도 했다.(AD295) 저족, 족, 호족의 반란이 끊임없이 변경에서 일어났고(AD296) 관군은 반란군에게 연전연패했다.(이들 반군은 모두 자립하여 5호16국의 뿌리가 된다.) 무능한 왕융과 같은 사람을 국정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는 바람에 정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사도가 되어서 시대의 병폐를 고치기보다는 가무와 유람을 즐기고 탐욕과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며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두장사를 하면서 자두종자를 가지고 자두나무를 기를까 걱정이 되어 자두의 씨를 파내고서 팔기도 했다. 사람을 뽑을 때의 질문은 “도교와 유교에 차이가 있는 거요?”라고 물었고 “다르지 않을까요?(將無同)“ 라고 대답하면 합격시켰다고 해서 뽑힌 사람을 ‘세 마디 관리(三語椽)’ 라고 빈정댈 정도였다.(AD297)

 

 

④ 제1차 가황후 폐출 모의(AD299년 6월)

 

가황후는 매우 음란하고 포학했다. 태의령 정거와 사통했고 길 가는 사내를 납치하여 궁궐로 들이기도 했으며 들킬까 봐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고 했다. 이런 가황후에 대해 가씨 종친마저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실세였던 가모, 배외, 장화가 가황후 폐출을 모의 했다. 그리고 그 후임에 황태자 사마휼의 생모인 사(謝)씨를 세울 계획이었다. 다만 황제 사마충이 반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걱정이었다. 

배외가 대답했다.

 

“ 그렇긴 한데 가후의 악행이 점점 더 심해지니 

  그렇다고 마냥 서서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소?” 

 

장화가 배외(가후의 이종사촌)와 가모(가황후 사촌오빠)에게 이렇게 제안을 했다. 

 

“그대는 그래도 가황후의 가까운 인척이시니 조신하시도록 설득해 보시지요.” 

 

배외와 가모는 가황후의 생모 곽성군을 찾아가 훈계의 말씀을 드려 달라고 부탁했고 곽성군 역시 친 딸 가황후를 찾아가 간곡히 설득해 보았다. 그러나 가후는 어머니 곽성군 말을 듣지 않았으며 잔소리가 많은 사촌오빠 가모를 오히려 배척하며 멀리했다. 가모는 화병으로 죽었다.(AD299년 6월) 진혜제 사마충은 배외를 가모의 후임으로 상서복야에 임명했다. 배외는 력하게 사양했지만 소용없었다. 다들 임명을 거부했으므로 별로 시킬 사람도 없었지만 꼭 믿는 외척 외에는 시킬 생각도 없었다. 가황후의 가씨와 곽씨(가후의 외가)의 전횡으로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부패는 극치에 달했다. 

 

 

⑤ 가황후의 황태자 사마휼 타살(300년 3월)   

 

무능한 황제 사마충의 유일한 아들 황태자 사마휼(AD278년생)이 스무 살이 넘어 태자비를 맞을 때가 되었다. 가황후의 어머니 곽성군은 또 다른 딸 가오와 한수 사이에서 낳은 외손녀를 태자비로 세우기를 원했지만 놀랍게도 생모인 가오와 가황후는 그것을 반대했다. 속으로 황태자를 폐위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가황후의 심복 가밀이 가황후에게 서둘러 황태자를 폐위하자고 재촉했다. 황태자가 즉위하면 그들의 세상도 순식간에 끝나는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똑똑한 황태자 사마휼이 가황후와 가씨 및 곽씨 일족의 폭정을 매우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황후는 스스로 임신했다고 거짓으로 떠들면서(장차 황태자로 세울 생각) 한수의 아들 한위조를 궁으로 몰래 데려와 키우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이 가황후의 속내를 깨닫기 시작했다. 황태자 사마휼을 폐위시키고 한위조를 황태자로 세워서 차기 정권을 장악한다는 계산임이 분명했다. 황태자 측근들은 태자를 졸라서 가황후를 서둘러 폐위시키도록 주청을 올리라고 재촉했다. 그동안 진나라 정권을 받들고 왔던 대신 장화(사마충의 스승이었다)의 생각이 중요했다. 황태자 측근 유변이 장화에게 은근히 다가와 가황후 폐위모의를 들었냐고 물었다. 장화가 모른 척했다. 유변이 나를 못 믿는 거냐고 장화에게 다그치며 물었다. 그제야 장화가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유변이 대답했다. ”동궁에는 인재가 많습니다. 공께서 명령만 하시면 가황후 폐위는 황문(=환관) 두어 명의 일거리 일 뿐입니다.“ 이 두 사람의 밀담을 누군가 밀고했다. 유변은 음독자살했지만 장화는 죄를 받지 않았다. 장화가 밀고했다는 설이 나오는 이유이다. 

황태자 측의 음모를 알아차린 가황후는 황제가 몸이 불편하니 와서 문병하라고 부른 뒤 별실에 황태자를 가두어 버리고는 술을 제로 마시도록 했다. 그리고 취중에 가황후가 불러 주는 대로 썼다. 

 

” 황제폐하는 스스로 끝내게 하십시오. 아니면 제가 제 손으로 끊겠습니다.“ 

 

가황후가 이 편지를 황제에게 전했고 황제 사마충은 이 편지를 모든 대신들에게 보여 주었다. 조서가 내려졌다.

 

” 황태자 사마휼에게 죽음을 내리노라.“ 

 

온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조서의 진위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황태자 사형집행 반대 논의가 일어났다. 가황후와 동맹은 조정의 의논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불안해했다. 일단 황태자를 폐서인하고 금용성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황문(환관)을 시켜 황태자와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고 거짓으로 위증하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황후의 잔인함에 분노하면서 가황후를 처단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 중심에는 조왕 사마륜이 있었다. 사마륜은 1차 8왕자의 난 때 죽은 사마량의 동복동생으로 사마염에게는 삼촌이다. 그러나 사마륜의 간교한 심복 손수는 먼저 가황후를 폐위시킬 것이 아니라 가황후가 먼저 황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을 기다린 뒤 그 다음에 가황후를 폐위시키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자문했다. 그리함으로써 두 적, 즉 황태자와 가황후를 동시에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조왕 사마륜은 가황후의 액션을 기다렸다. 그리고 황태자 폐위 소문을 은근히 퍼뜨려 가황후 측으로 하여금 초조하게 만들었다. 가후는 내연남 태의령을 시켜 황태자를 독살하려고 했으나 황태자가 들여보낸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러자 황태자 음식공급을 끊어버렸지만 이 또한 궁녀들이 몰래 음식을 넣어주어 실패했다. 결국 화장실에 들어 간 황태자 사마휼을 타살시켜 버렸다.(AD3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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