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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직서 말고 신고서를 내세요.” -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실효성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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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8월16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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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저 학교 가기 싫어요.”라고 털어놓았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선생님이나 부모님께서는 십중팔구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것이다. 학교생활에 문제는 없는지, 본인을 괴롭히는 친구가 있는 것인지, 어떤 점이 적응하기 힘든지 물어보고 도움을 주려 노력할 것이다. 만약 한 어른이 “저 회사 다니기 싫어요.”라고 말한다면? “회사는 돈 받고 다니는 곳이잖아.”,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야.” “OO 씨는 이런 것도 못 견디면 어떻게 일하려고 그래?”와 같은 핀잔이 따르는 게 더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 같다. 

 

최근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거지고 있다. 항공사 오너일가의 갑질, 웹하드 플랫폼 소유주의 직원 폭행, 간호계의 태움문화(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괴롭힘 등으로 길들이는 규율 문화)등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기도 했다. 건전한 근로문화 형성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국회는 2019년 1월 15일 소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불리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6개월의 계도기간이 지난 후, 7월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 중이다. 하반기 채용 기업들은 해당 법을 반영하여 대부분 인사규칙을 개정했고, 고용노동부에서는 관련 매뉴얼을 제작해 배포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세부 내용


개정된 근로기준법 76조 2항은 ①직장 내 지위,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②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는 ③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되는 행위장소는 외근 및 출장지, 사적 공간, SNS, 사내 메신저, 회식 등을 폭넓게 포함한다. 업무의 과도한 부여 혹은 미부여, 집단 따돌림, 뒷담화, 회식 강요, 업무 시간 외 과도한 사적 연락 등이 직장 내 괴롭힘 행위로 제재받을 수 있다. 해당 법은 근로자 5인 이상의 기업에 적용된다. 직장 내 괴롭힘이 확인되면, 사업주는 가해자를 즉시 징계해야 한다. 신고자나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주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

 

가해자 처벌 조항의 부재와 피해자 증명 책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가장 큰 특징은 형사 고소가 아니라 사내 신고라는 점이다. 게다가 모욕죄나 명예훼손죄와는 달리 가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 조항을 명시하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직장 내 괴롭힘 사례가 신고되면, 회사가 내부 절차를 통해 사안을 판단한 뒤 피해자를 구제하고 가해자를 징계하라는 권고 매뉴얼에 가깝다. 가해자에게 형사처벌을 가하기 위해서는 결국 법원의 유권해석을 통한 법리적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증언이 엇갈릴 경우 피해자가 본인의 근무상황이 악화되었음 증명해야 하는 피해자 증명 책임 구조를 전제로 하는 것 또한 실질적 구제를 어렵게 한다. 고용노동부가 배포한 ‘직장 내 괴롭힘 예방대응 매뉴얼’에서는 ‘밥을 혼자 먹은 카드 명세서’, ‘싫어하는 티를 내는 대화 녹음’ ‘업무 공유에서 제외된 자료’ 등을 합법적 입증자료의 예시로 제시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직장 내 ‘은따’(은근히 따돌리는 행위) 피해자가 따돌림의 증거를 적극적으로 수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괴롭힘의 판단 기준은 상식?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2월 ‘직장 내 괴롭힘 예방대응 매뉴얼’을 배포했다. 매뉴얼에 따르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은 행위’란 ‘사회 통념에 비춰볼 때 업무상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거나, 업무상 필요성은 인정되더라도 그 행동이 사회 통념상 문제가 있는 행위’를 의미한다. 사회통념, 즉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가 괴롭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괴롭힘이 상식에 대한 가해자의 몰지각, 몰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피해자에게는 엄청난 압박, 조롱, 고통이었던 행위를 가해자는 업무의 연장, 장난, 독려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사업주에 대한 신고는 사실상 불가


‘회사에 신고하면 회사가 징계를 내린다.’라는 처벌 구조의 사각지대는 바로 사업주가 직원들에게 갑질 및 괴롭힘을 행할 때다. 최근 항공사 오너 일가의 갑질 사건만 보아도 경영진의 괴롭힘을 신고한다는 것은 언론 제보나 제3자를 통하지 않는 이상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전한 근로문화 확립을 위한 인식 개선이 뒤따라야


개정근로기준법의 시행으로 갑자기 직장 문화가 개선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직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해왔던 행위들이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다. 지난 8월 12일 시행된 취업포털 잡코리아의 자체 설문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660명의 22.0%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시행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또 '재직 중인 직장에서 법 시행에 맞춰 취업규칙을 개정하고 적절한 교육을 했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다'라는 답변이 55.5%에 달했다. 해당 법의 실효성 문제는 차치해두더라도, 법안의 제정과 적절한 홍보는 적용 대상인 사람들에게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기업문화 개선의 긍정적 유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매뉴얼 보완과 관련 법제의 뒷받침을 통해 건전한 근로문화 형성의 첫 출발신호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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