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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디에서 영감을 찾아야하나?

"나는 진리라는 거대한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 말했던 아이작 뉴튼은 당시의 과학계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였다그의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에는 관성의 법칙’, ‘운동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만유인력천체의 운동에 관한 내용 등을 담았다이런 초월적 업적을 만든 뉴튼을 향해 철학자 존 로크는 신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뉴튼은 항상 진리를 찾기 위한 고민을 했다중력의 법칙을 알아낸 1666년에는 22개의 문제를 동시에 연구하기도 했었다그의 삶은 자나 깨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의 연속이었다그가 중력의 법칙을 알아낸 유명한 일화인 사과나무 아래서 졸다가 그의 머리에 떨어진 사과를 계기로 알아낸 것처럼 그는 어쩌면 졸기 전부터 그 문제에 골몰했었을 것이다그러다가 우연한 사건으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았을 것이다.

 

현대인은 급변하는 사회 현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많고 또한 창조적인 일을 해야 할 것이 많다뉴튼처럼 또는 빌게이츠스티브 잡스제프 베이조스 등등처럼 창조적 아이디어가 수없이 많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훈련을 상당히 오랜 기간하게 된다아무것도 없는 빈 백지에 그림을 그려가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더해가며 깊이를 만들어 낸다. 4차 산업 혁명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가기 위해서는 예술가들처럼 무언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작가: Kai Jun 제목: 제주의 아름다움NO.5(부분) 크기: 116.8cm X 91cm 재료: Acrylic & Mixed Media 제작년도: 2018년

 

창의성도 개발 되는가?

크리에이티브(creative)은 예술가들에게는 필수적인 재능으로 얘기한다. 타고 난다는 말도 많이 한다. 그러나 창의성은 진리를 탐구했던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의 사고체계와 다르지 않다. 재능이 있으면 좋겠으나 재능만이 답은 아니다. 진리를 추출하는 방식을 얘기했던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단계에서 확실성을 근거로 진리의 기초를 삼았던 것과 같다.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문을 열었던 몬드리안의 경우도 우주의 진실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원했다. 그는 자연물들을 그림에 있어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하고 선을 수평과 수직의 축으로 환원하며 색채를 삼원색과 흰색, 검은색, 회색으로 환원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을 택했다. 그에게 수직선은 생기를, 수평선은 평온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두 선들이 서로 적절한 각도에서 서로 교차하면 역동적인 평온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방법론과 철학을 정립함에 있어 나무라는 대상을 통해 우주의 진실과 부합하지 않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결과를 얻어냈다.

 

제거하고 정리하여 창의성이 만들어 지는 것을 설명하였지만 때론 무언가를 추가하여 창의성이 만들어 지기도 한다. 전화기에 컴퓨터 기능이 추가되어 스마트폰이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창의적 결과물을 도출시키는 과정은 깊은 고민 속에서 이루어짐이 분명하고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여기에 영감(靈感. 신령스러운 예감이나 느낌)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나 상황이 결합되면 창의적 사고가 샘솟게 된다.

 

영감과 자연의 관계

영감을 얻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했었던 일은 자연과의 교감이다. 우연이든 자발적인 노력이든 자연 현상에서 영감을 얻은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이것은 어쩌면 아인슈타인이 말한 '모든 질량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산화하여 없어졌다 하여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 우주 공간에 에너지로 변화하여진 것뿐'이라고 한 것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원리가 적용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한낱 길가의 돌멩이에도 우주의 원리가 들어갈 수도 있으니 영감을 얻는데 자연과의 교감은 중요한 일이 된다.

 

어떤 문제를 풀기위한 과정에서는 비슷한 상황이 나타난다. 사색에 잠기고 골몰하다보면 자기안의 해법을 모두 소진하는 단계가 오고 이 단계는 무언가를 알 것 같기도 한데 분명하지 않은 모호함의 시기이다. 즉 사색을 통한 깊이 있는 자기와의 대화가 끝나갈 무렵이 최대로 부풀은 풍선이라면 자연의 어떤 현상은 풍선에 가해지는 바늘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영감(靈感)의 뜻과 같이 신령스러운 예감이나 느낌을 자연이 주는 경우가 많다. 

 


 


작가: 이유진 촬영지: 제주도-용두암 제작년도: 2015년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곳. 제주!

전편에서 말한바와 같이 현대인은 대체적으로 예술가의 자격이 있으며 예술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창의적 사고를 해야 한다.

창의적 인간, 현대인에게 제주도는 더 없이 많은 영감을 주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기기묘묘한 자연 경관이 펼쳐져있고 혼자만의 깊은 사색이 가능하다. 제주도에서 걷다보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또한 사색의 풍선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보면 자연의 현상이 무언가를 말해준다.

철학자의 길이라고 이름이 붙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산책로나 일본 교토 시 사쿄 구에 있는 산책길은 진리를 탐구에 있어 사색자가 자연과의 교감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색하며 걷고 느끼기 좋은 제주도의 자연은 창의적 사고를 해야 하는 현대인에게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 본다.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얻었고 치유를 얻은 땅.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보물이 분명하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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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내용

(01)당신은 예술가입니다! - 1010

(02)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곳. 제주! - 1017

(03)유레카! 영감을 얻다!- 미술의 심봤다! - 1024

(04)자연감상과 미술감상의 공통점 - 1031

(05)우리는 왜? 힐링에 목마른가? - 117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2018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최대규모의 인물화전을 열었으며 ‘KOREA Renaissance Art’를 선언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우리는 예술가!

대한민국은 국민 모두가 예술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사진을 찍어 SNS에 온라인 전시를 하고 모임이 있으면 으레 노래방에서 노래 한가락 불러야 마무리가 된다.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콘테스트에 100만명이 넘게 지원하는 것을 봐도 예술이 생활이고 삶 자체이다. 그런데 예술적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예술가라고 자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예술가임을 인정하며 전문적인 예술가들이 어떤 생각과 어떤 경험을 하는지를 제주도를 통해 1년간 매주 연재하는 여정을 떠난다. 

 


 


 


작가: Kai Jun 제목: 제주의 아름다움NO.4(부분) 크기: 116.8cm X 91cm 재료: Acrylic & Mixed Media 제작년도: 2018년

 

우리의 삶이 왜? 예술인가?

고대로 갈수록 조형적 시각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노예들이 하는 기술이었다. 고대의 여러 나라 중에서 예술을 가장 높이 평가 했던 고대 그리스도 미술은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 범주는 요즘 미국과 한국의 일부 대학에서 시행하는 자유과(自由科, liberal arts)와 유사한 형태이다. 고대 그리스의 liberal arts는 교양있는 사람이 되어 신과 교감 할 있는 수준의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다. 이 교육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이 하는 행위와 사고가 예술이다.

 


작가: 이유진 촬영지: 제주도-차귀도 제작년도: 2015년

 

교육 내용은 문법, 수사학, 변증학(논리학), 산술, 기하학, 점성술, 음악 등이다. 미술이나 건축이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이고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미술(표현 기술)에 인문학과 과학을 결합하여 liberal arts적 관점의 예술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표적인 예술이 미술인데 과거의 상황에서는 멸시 받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땀 흘려가며 생산되어야하는 미술의 특성을 보면 이해 할 수가 있다.

이후 예술의 범주 안에 다양한 장르가 편입되다가 18세기 산업혁명을 전후하여 폭발적으로 장르의 확대가 이루어 졌다. 이는 7-8세부터 피땀 흘려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가지지 않아도 교양 있는 인간이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표현해내는 삶을 만들어 내면 예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시대는 4차산업혁명의 시대 안에 들어왔으니 거의 모든 것이 예술로 편입되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해율(97.9%)의 나라이며 중학교까지가 의무교육, 대학 진학률이 60%에 달하며 국민들이 가장 관심 있는 분야가 교육이다. , 교양교육이 거의 되어있다고 보며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 국민인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미 예술가임을 인정한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술가의 사고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실천하면 된다고 본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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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내용

(01)당신은 예술가입니다! - 1010

(02)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곳. 제주! - 1017

(03)유레카! 영감을 얻다!- 미술의 심봤다! - 1024

(04)자연감상과 미술감상의 공통점 - 1031

(05)우리는 왜? 힐링에 목마른가? - 117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2018년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최대규모의 인물화전을 열었으며 ‘KOREA Renaissance Art’를 선언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前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작품 소개

이중섭 선생님을 그리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마치 '한국의 고호' 같다. 전쟁, 아들의 죽음, 가족과의 별거, 조현병 등등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가 <'은지화'라는 독특한 그림을 그렸고 당시에 보기 힘든 야수적이며 특별한 거친 표현들이 신선했고> 하는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들이 많지만 그의 위대함은 개인에게는 최악의 상황인 가운데에서도 가족과 한국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내게 위대함으로 다가온다.

 

그는 일본 유학을 했으며 미국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선생님께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 에너지를 오롯이 한국적이며 향토적인 소재로 가득 채웠다. 나는 이런 그의 정신세계가 훌륭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자신의 정신을 온전하게 예술로 변환할 수 있어야한다.

그는 한국 정서를 온전하게 미술로 변환한 위대한 작가이다.

그가 있어서 감사하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의 위대한 화가 시리즈 NO.1- 이중섭/ 유화/ 72.7cm X 60.6cm/2018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 서양 17세기 화파. 카라바조 작품의 영향을 받아 격렬한 명암대비로 극적인 연출을 하는 방식을 말한다. 대표화가로는 만프레디, 칼라치오로, 혼트호르스트, 피테르 판 랄, 조르주 드 라 투르, 호세 데 리베라 등이 있고, 벨라스케스와 귀드 레니도 일시적으로 그 영향하에 있었으며 렘브란트 역시 이 영향 하에 있었다. 

 

키아로스쿠로 : ‘명암이라는 뜻. 빛에 의해 사물이 밝은 면에서 어두운 면까지 점진성을 가지며 변하는 변화를 통하여 삼차원성을 획득하는 방식을 말한다. 고대에도 사용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 많은 활용이 있었으며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활용이 되었다.

 

임파스토 : ‘반죽된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유화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을 일컫는다. 붓이나 팔레트 나이프, 또는 손가락을 사용해 색을 칠하거나, 직접 튜브에서 물감을 짜 바르는 방식으로, 붓자국 등을 그대로 남겨 표면과 질감에 다양한 변화를 주려할 때 이 기법을 사용한다. 렘브란트, 루벤스, 넬러의 작품 중에서 중요 부위는 이 기법을 활용하여 강조성을 주었다. 

 


 


그림의 자료로 활용된 이중섭 선생님 사진과 작품의 부분​ 확대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2018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최대규모의 인물화전을 열었으며 ‘KOREA Renaissance Art’를 선언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본 작품은 2018424일부터 428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2018대구아트페스티벌에 초대되어 전시된다. 

작품 소개

지구촌은 매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한다. 10여년 이상 진행되고 있는 중동의 전쟁은 중동뿐만이 아니라 유럽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의 피난 과정을 보며 슬픔과 아픔을 공감한다.

작년 가을 파주에 볼일이 있어 가던 중에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들린 적이 있다. 이제 연세가 80세 이상은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 잘 보이지도 않는 북녘 땅을 멍하니 쳐다보고 계셨다. 그 모습과 TV를 통해 자주 접하고 있는 피난민의 모습이 겹쳐지며 그분의 눈 속에 고인 연한 눈물이 아프게 느껴졌다. 그분의 슬픈 눈을 바라보는데 나를 의식하였는지 시선을 피하고 다시 멍하니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분이 보이고 싶지 않았던 슬픔과 아픔이 가슴에 남는다.

 

우리는 3세기 초 고조선과 연나라의 전쟁을 시초로 2천여 번의 전쟁을 겪었다. 4세기부터는 3, 5, 10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술이 있다. 심지어 100만대군 이라는 형용할 수 없는 숫자의 병력도 서술되어있다. 이런 규모의 병사가 동원되고 전쟁이 치러진다면 그 피해와 아픔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다 기술할 수 없을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북한의 미사일 실험이 중단되었고 대화의 채널이 가동되고 있다. 너무나 다행스럽고 좋은 일이다. 이제 2천여 번의 전쟁 횟수에 수를 더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병자호란의 아픔과 이에 대한 심리를 통일전망대에서 본 어르신의 눈빛과 이재민의 피난 과정을 보도한 여러 뉴스의 영상에서 받은 인상을 적용하여 제작하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9- 망향/ 유화/ 72.7cm X 60.6cm/ 2017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 임파스토 : 한국인 시리즈NO.1 이순신 장군 편 참고 

 


한국인 시리즈 NO.9- 망향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2018년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최대규모의 인물화전을 열었으며 ‘KOREA Renaissance Art’​를 선언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작품 소개

정조 이산이 살던 시대에 대한 궁금증으로 그 시대의 실상을 보여주는 신윤복의 그림을 여러 번 살폈던 적이 있다. 신윤복은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때 태어나서 정조때에 왕성한 활동을 했던 화원이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지칭된다. 특히 양반층의 풍류와 남녀 간의 연애, 기녀와 기방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의 그림은 현시대에서 당시를 이해하는데 매우 큰 자료가 된다. 그의 아버진 신한평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원이다. 영조, 정조, 순조 초년까지 활동했으며 특히 초상화와 속화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신한평의 이름이 정선강세황김홍도심사정등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정조 시대의 생활상을 알고 기뻐했던 감흥을 그에 대한 오마주로 미인도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8- 신윤복 미인도 재해석/ 유화/ 162.2cm X 130.3cm/ 2018

 

신윤복 [申潤福]

1758 ~ ?

"신윤복(申潤福). 자 입보(笠父), 호 혜원(蕙園), 고령인(高靈人). 첨사(僉使) 신한평(申漢枰)의 아들, 화원(畵員).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는 오세창(吳世昌)[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기술되어있는 것이 신윤복에 대한 문헌상 기록 내용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춘화와 기생 그리고 양반의 이탈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해학적 표현을 거침없이 했다는 틀에 박힌 조선시대를 깨보려는 그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림의 수준은 그 누구와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그렸으며 다른 화원들과 다르게 색채의 다양성과 표현의 섬세함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신윤복은 아버지 신한평과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친척들이 중인이어서 다양한 계층의 일을 한 것도 영향을 받은듯하다. 특히 구하기 어려운 채색 안료를 사용한 점도 친척들의 지원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과거보다 오히려 현대적 감각이 넘쳐나는 그의 표현은 해학적 구성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가늘고 유연한 선과 원색의 산뜻하고 또렷한 색채사용, 현대적인 구도와 독특한 상황 설정으로 조선시대 풍속화의 격과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제작 방식

신윤복의 미인도를 좌측 벽면에 배치하고 방안에 미인이 환생한 것과 같은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보이는 복식과 포즈를 동일하게 하였으나 인체 비례의 안정감을 만들기 위하여 두상의 크기는 일반적인 서양화 방식과 유사하게 7등신으로 하였다. 얼굴 내부의 눈코입 비례도 가능한 선에서 동일 비율로 구성하였으나 모양의 마무리는 현재 인기 아이돌들의 눈코입 모양을 활용하였다.

배경인 방은 중인 가정의 방을 상상하여 표현하였다. 화려함이 없이 수수한 방안 가구 등으로 배치하였으며 핵심인 신윤복의 미인도와 환생한 여인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도록 구성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화원 : 도화서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종사하는 잡직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도화서의 화원들이 실제로 맡아서 그려낸 일들은, 감계화(鑑戒畵교민화(敎民畵장식화(裝飾畵사대의례도(事大儀禮圖제례도(祭禮圖의장도(儀仗圖세화(歲畵경직도(耕織圖지도(地圖불화(佛畫포응견본도(捕鷹見本圖초상화(肖像畵지형실경도(地形實景圖실경산수사생도(實景山水寫生圖감상화(鑑賞畵모사(摹寫사생(寫生) 등이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가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그들을 현재와 비교해보면 다큐멘터리 작가나 사진가 등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인 시리즈 NO.8- 신윤복 미인도 재해석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18314일부터 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Kai Jun의 인물전'을 한다. 본 연재 작품도 포함된 전시이다. 

작품 소

수원화성 옆의 수원문화재단에 수년 전 심사를 몇 차례 가며 수원 화성의 가치를 새삼 느꼈던 적이 있다. 치밀해도 이렇게 치밀할 수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계획 도시였다. 이상이 높았던 정조는 화성을 만들면서 이상실현을 하려했던 것 같다. ‘정조가 만약 장수를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그의 치밀함과 군사(君師)를 자처하는 것처럼 국가와 백성을 위한 수많은 노력과 방안이 있었기에 아쉬움으로 다가 온다. 정말 49세가 아니라 70세 정도까지만 살았더라도 조선의 미래와 현재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 같다. 화성을 거닐면서 세종대왕 52, 정조대왕 49라는 안타까운 혼잣말을 하며 걸은 기억이 난다. 그가 일차적으로 시행 했던 일은 조정의 안정이었다. 그 안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장용영(壯勇營)’의 설치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이었다. 왕권의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 정조가 이루려했던 꿈의 일환인 무예도보통지 24()는 수원화성에서 지금도 시연되고 있다. 그중 마상쌍검을 통해 정조를 생각해 봤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7- 정조대왕의 꿈/ 유화/ 162.2cm X 97cm/ 2018

 

정조[正祖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6~1800) 이름 이산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나 할아버지 영조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행으로 인해 죄인의 아들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기에 1764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양자로 입양되어 종통을 잇게 한다. 1775년 영조는 노환으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1776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상황에는 당파싸움이라는 강력한 문제의 소용돌이 안에서 진행되었다. 정조는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정의 문제와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개혁과 선진화에 눈을 뜨고 개혁군주로써의 꿈을 꾸었다. 당시 세계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미국의 독립, 프랑스 혁명 등의 큰 바람이 불던 시기이다.

 

정조는 세종대왕과 더불어 준비된 왕이었으며 노력을 아끼지 않은 왕이었다. 학자군주로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100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되었고 그림을 잘 그렸으며 의학에도 밝아 본인의 병을 스스로 치료하기도 했었다. 또한 과학, 문학, 미술, 음악 등의 문화적인 발전도 꾀했다. 왕권의 강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기 위해 사도세자가 체계화 했던 무예18기를 무예도보통지 24()로 만들었다. 또한 노비제도 폐지를 추진하고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 실학자를 등용해 상업과 유통을 발달시키는 등 조선근대화의 싹을 틔운 임금이기도 하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정치를 구현하였으며 영조의 탕평정책을 계승 발전시켰다. 청류(淸流) 세력을 끌어들이고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남인과 정치적인 정적 세력인 벽파세력까지 끌어안으려했었다.

 

 

정조는 이상의 실현을 위해 수원 화성을 건축하였고 화성을 건축하는 과정에서도 국고의 지출을 최소화하면서도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만들어 10년의 공사를 단 33개월의 기간으로 단축시키기도 했다. 정약용과 채제공 등 정조의 측근들이 대거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완벽한 방어전략을 갖춘 당시로서는 최고의 근대적 성곽이었으며 자족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수원읍의 4개 구획을 따라 상업시설을 조성하고 통공정책을 마련해 자유로운 상행위가 일어나게 하여 인구를 끌어들였으며 저수지를 축조하고 국영농장인 둔전을 설치하여 새로운 농업경영제도를 도입했다.

화성에는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배치됐다. 한양에 내영, 화성에 외영을 설치해 화성에만 5천명의 병사를 배치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정조는 개혁과 이상 실현을 위한 선포를 한다. 그러나 그는 한 달 뒤 병으로 죽게 되고 그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준비한 개혁의 산물과 그를 따르던 세력, 장용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급변하는 세계에 맞설 수 있는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정조와 정조를 따르던 세력만의 안타까움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타까움이다. 

 

제작 방식

달리는 말의 속도를 표현하기 위해 어둠속을 뚫고 나오는 느낌을 주었으며 낭만주의 화가들이 추구했던 특별한 감정의 표현과 윌리엄 터너의 빛에 의한 배경 연출과 같은 효과를 주었다. 양손에 들고 있는 칼은 전체 그림의 역동성을 위하여 사선의 연결선상에 놓이도록 배치하였다. 또한 말과 연결하여 역삼각형의 구도를 이뤄 전체적으로는 불안정과 안정의 접점에서 바라보도록 하였다. 칼은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가 연속성을 가지며 사라지게 하였으나 주인공의 얼굴과 말의 얼굴은 선명하게 묘사하여 극적 대조를 이루었다. 이 극적 대조를 통해 주인공의 감정 표출을 더 강렬하게 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낭만주의 : 고전주의와 대비되는 사조로 고전주의가 보편적인 미의 관념에 입각한 엄격한 규율과 정적이며 우아하고 균제미로 정형화된 방식을 추구한다면 낭만주의는 격정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직관적인 측면의 감성을 중심으로 생각했다. 이런 관념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계몽주의로 비합리적인 정치체계의 타파를 이루었고 혁명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취약한 면을 자신의 심성에 맞는 문화로 이룩하려는 정신적인 욕구의 결과이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났는데 미술에서도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낭만주의 미술은 어떤 기법이나 형식이 낭만주의 미술이다.’ 라고 규정하기는 어렵고 이러한 관점으로 대상을 이해하고 표현한 작품들이 낭만주의 미술로 분류된다. 특정지어 구분한다면 사물을 바라볼 때 화가의 감정에 이끌린 표현이 형태나 색상에 구애받지 않고 화면상에서 자유롭게 표현된다는 점이 다른 점이라 볼 수 있다.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 작품이나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이 이에 해당된다. 


윌리엄 터너 노예선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


한국인 시리즈 NO.7- 정조대왕의 꿈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18년 3월14일부터 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Kai Jun의 인물전'을 한다. 본 연재 작품도 포함된 전시이다.


 

작품 소개

인물화를 그리며 우리나라 미녀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우리는 미녀를 논할 때 남남북녀(강계·회령·함흥미인)라는 속설을 말한다. 그런데 전래되어 내려온 속설과는 별개로 현대적 미의 기준으로 보면 대구미인이 으뜸으로 뽑히고 있다. 근대 이후 연예계나 미의 사절 역할을 휩쓸고 있다.

? 속설과 다르게 대구미인이 주목받는지에 호기심이 생겼다. 과학적 검증이나 역사적 검증이 안 된 시절에는 사과를 많이 먹어서 사과 미인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역사서를 보면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신라의 자장이 중국유학시절 문수보살에게 불법을 전수받을 때 문수보살이 한 말을 보면 신라의 왕족은 인도의 왕족이라는 말이 나온다. 문수보살이 황룡사에 9층 석탑을 지을 것을 권유하여 자장이 이를 전하고 선덕여왕이 건설한 일화는 삼국유사황룡사찰주본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또한 KBS방송으로도 널리 알려진 신라인은 흉노족의 후예인가?’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신라인의 지배계층이 스키타이인과 매우 흡사한 DNA구조를 가졌다고 방영하기도 했었다.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의 중심 내용은 멸망한 페르시아의 왕족이 망명생활을 하다가 연관성이 있는 신라로 와서 신라공주와 결혼하고 그의 아들이 지금의 이란으로 돌아가 전쟁을 일으켜 다시 왕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이다. 쿠쉬나메를 연구하는 한양대 이희수교수의 경향신문 기고를 보면 매우 흥미롭다. 이뿐만이 아니라 삼국사기를 보면 서기 342년 흉노족의 일파인 선비족 모용황55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북쪽으로 침공 15천 남쪽으로 침공한 4만 중 북쪽 부대가 남하하여 신라의 김씨 왕조를 만들었다는 가설도 제기되고 있다.

 

각설하고 현재 경상도에 미인이 많고 빼어남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법 한데 이런 저런 이유를 생각하여 신라의 미인 설화 중 선덕여왕을 사모한 지귀전설을 모티브로 신라의 미인을 그려보았다. 골격과 기본적인 인체 구조는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 당염립본왕회도의 신라 사신도를 참고하였다. 신라사신의 모습은 다른 사신보다 젊고 오뚝한 코와 큰 눈, 두상 및 골격 구조가 조금은 서양인스럽다. 지귀설화의 등장하는 선덕여왕의 나이는 50세이지만 매우 뛰어난 미모로 지귀가 짝사랑했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동안으로 제작하였다. 배경 및 전체적인 색상은 지귀가 불의 화신이 된 모습을 연결하여 표현하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6-신라의 미인/ 유화/ 90.9cm X 72.7cm/ 2018

 

선덕여왕과 지귀 설화

선덕여왕은 너무나 많은 자료가 나와 있으므로 생략하고 본 작품의 모티브인 지귀 설화만 요약한다.

 

지귀가 서라벌에 갔다가 지나가는 선덕여왕을 보았다. 그런데 여왕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단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고, 끝내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도중 지귀가 쫓아오고 여왕은 지귀가 자신을 사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절에 함께 가도록한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쳐있던 지귀는 탑 아래에서 잠이 들고 만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지귀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금팔찌를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간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발견하고 더욱 더 사모의 정이 불타올라 불귀신으로 변한다. 지귀가 불귀신이 되어 선덕여왕의 지나간 자리를 떠돌아다니다가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이 불귀신을 쫓는 주문을 지어 문에 붙이도록 하였다.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志鬼心中火, 燒身變火神, 流移滄海外, 不見不相親)’ 이후 선덕여왕의 뜻을 따른 지귀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당염립본왕회도>에 나타난 신라 사신도와 신라의 미인 작품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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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우리나라의 의로운 여성의 대표격인 논개’.

예전 진주성을 방문했을 때 논개의 일화를 알고 있었던 터라 그런지 촉석루에 올랐을 때 전율이 왔었다. 촉석루에서 바라보는 남강은 예사롭지 않게 흐르는 것 같았고 진주성의 성벽에도 수많은 주민이 장맛비에 무너지는 성벽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보이는듯했다. 한걸음 한걸음 진주성에서 발을 떼어낼 때마다 420여 년 전에 벌어졌던 그때의 상황이 상상되었다.

20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격어야만 했던 비애가 가슴 아팠다. 국가의 존망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지아비마저 눈앞에서 잃어야하는 슬픔과 6만 명의 도성사람들이 살육당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피눈물이 그녀의 가슴에서 남강까지 이어져 흘렀을 것이다. 안타깝고 안타까웠다.

깊은 숨을 몰아쉬고 진주성을 나와 차에 탔을 때 나얼의 바람기억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바람기억의 가사가 마치 논개의 얘기인 것처럼 느껴져서 감정이 북받쳤다. 전혀 관계없는 노래였음에도 그 때는 그랬다. 지금도 바람기억을 들으면 무척 슬프다.

 

슬프고, 숭고하고, 고맙다. 그녀의 삶과 결단을 본받아 다시는 그녀와 같은 결단을 내릴 일없도록 해야겠다. 앳된 20살 여인의 비장함을 표현하기 위해 표정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결연한 의지가 보이도록 피부 표현을 점묘화처럼 아주 작은 터치를 찍어가며 그렸다. 눈동자는 눈물이 고인 것처럼 하였으며 손은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할 때 뿌리치지 못하게 손가락마다 가락지를 끼고 있었던 모습을 강조하기위해 명암의 대비를 심하게 주어 밝게 표현하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5- 최경회의 여자. 논개/ 유화/ 116.8cm X 91cm/ 2017

 

주논개

최경회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논개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매우 미흡하다. 그 부족한 부분을 해주 최씨 승지공파의 17세손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기록 된 족보와 최경회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논개의 구전 내용을 결합하여 구성하였다.(최경회의 설명은 4편 참고)

 

주논개(朱論介) 義岩婦人. 신안주씨 전주파 중파손

15741593

논개는 주씨성이며 전라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훈장을 하던 주달문이며 논개가 14세 때 돌아가신다. 논개의 어머니는 자신과 딸의 생계를 시동생인 주달무에게 의탁하나 도박에 가산을 탕진한 주달무는 어린 논개를 김풍헌의 민며느리로 팔아넘기고 달아난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논개의 어머니는 친정으로 도망을 가고 김풍헌은 관아에 고발하게 된다. 김풍헌의 고발로 당시 장수 현감이었던 최경회에게 심문을 받는다. 논개 모녀의 심문 결과 최경회현감은 무죄방면하며 갈 곳이 없는 논개 모녀를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현감의 부인을 시중들게 한다. 논개의 시중을 받던 최씨부인은 논개의 재색이 뛰어남에 감탄하여 지병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부실로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다. 이후 최경회공과 함께하며 의병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그를 돕게 된다. 159369일간의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뒤 최경회장군과 함께하던 장군들이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게 된다. 성의 함락과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왜군들의 잔치가 159377일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장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고 참석한다. 주연에서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장마철이라 물이 많이 불어있는 남강의 바위에 올라 그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다. 논개는 10 손가락마다 가락지를 끼고 깍지를 끼었을 때 손이 빠지지 않게 한 상태였다. 논개와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죽게 되고 이후 진주성전투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이 강 하류에서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서 장사를 지내주려 운구하다가 왜군의 감시로 인해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는데 1976년 발견되어 현재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묘소가 마련되었다.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이라하며 172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은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한다.

1739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지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 절차가 진행되었다.

1868(고종 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해질 뿐이다.

 

참고문헌

최경회 후손 기록 https://blog.naver.com/yschoimd/20137770329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3814&cid=46622&categoryId=46622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표현 특징인 전신사조(傳神寫照)로 표현하였다. 얼굴 및 부분적 표현에 점묘화 기법을 활용한 병치 혼합적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 ‘임파스토1편 이순신장군 설명 참고

전신사조(傳神寫照)’2편 별을 바라보는 염근리 설명 참고

 

점묘화 : 점을 찍어서 표현한 그림을 말하며 신인상주의 화가 쇠라와 시냐크 등이 광학을 활용한 과학적 접근으로 만들어진 기법이다. 점묘화는 색과 색을 혼합하여 중간색을 만드는 방식이 아닌 각각의 색을 나란히 화면에 배치하여 색의 선명성을 유지하되 멀리 떨어지게 되면 두 색이 혼합된 것처럼 보이게 되는 병치 혼합의 방식을 활용한 것이다. 신문, 잡지의 인쇄물도 각각의 망점이 색을 가지고 있고 이 점들이 모여 입체적인 그림이나 이미지가 되는 점묘화 방식을 활용한 것이다. 이방식의 강점은 매우 선명한 색의 느낌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한국인 시리즈 NO.5- 최경회의 여자. 논개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작품 소개

 의로운 한국여성을 생각했다. 여러 여성인물 중 과거 진주성 방문에서 느꼈던 논개가 가장 강열하게 떠올랐다. 논개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표현을 하던 중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의병의 활동이 매우 많은 의병의 역사이다. 논개가 의로운 여인의 대표격이라면 그와 함께한 사람의 정신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논개를 그리다말고 논개의 남자를 떠올렸다. ‘최경회대단한 업적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다. 작품은 최경회 장군의 의병 시절 무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내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던 상황을 상상하여 그렸다. 관군이 아니기 때문에 사복으로 만든 군복이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의 나이가 60이었지만 평소 활쏘기에서 능하여 선조 앞에서 활쏘기 시합을 할 때 장원을 한 사례와 진법에도 능했던 것을 보면 신체 단련도 상당히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외모를 강인하고 조금은 젊은 느낌으로 제작하였다.

 

1편에서 이순신 장군을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이순신 장군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최경회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못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경회와 같은 의로운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있다는 고마움을 느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4- 논개의 남자. 최경회/ 유화/ 72.7cm X 60.6cm/ 2017

 

최경회 소개

최경회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논개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매우 미흡하다. 그 부족한 부분을 해주 최씨 승지공파의 17세손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기록 된 족보와 최경회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논개의 구전 내용을 결합하여 구성하였다.(논개의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편에)

 

최경회(崔慶會) : 선우, : 삼계, 별호: 일휴당

1532년 화순 삼천리 태생/1561년 신유 식년시 생원 급제/1561년 신유 식년시 진사 급제/1567년 정묘 식년문과 을과 급제/1574년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옥구현감(송덕비 건립)/1577년 장수현감(선정비 건립)/1579년 무장현감(송덕비 건립)/1582년영암군수(송덕비 건립)/1584년 호조정랑, 형조정랑, 영해부사(영해고을민이 생사당을 세움)/1587년 사도시정, 담양부사(선정비 건립)/1590년 모친상으로 관직 사직/1592년 임진왜란 전라우의병장/1593년 경상우도병사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

최경회는 문신이며 의병장이다. 그의 생은 백성을 위한 삶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옥구현감 시절부터 고을민들이 자진하여 송덕비와 생사당을 지을 만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국난이 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목숨을 바쳐 싸웠으며 혁혁한 전과를 이룬 대장군이다. 그의 충의에 대한 신념과 실천은 주변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함께 동참 할 수 있는 큰 믿음을 주었던 훌륭한 리더임이 분명하다.

 

그의 업적과 관련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590년 모친의 상으로 낙향하여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그는 이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으니 내 몸을 나라에 바쳐도 된다. 부모에게 하던 효도를 나라에 충성으로 바치리라.“하며 형 최경운, 최경장, 아들 최홍기, 조카 최홍재, 최홍우 6명이 힘을 합쳐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고 전라우의병이라 칭하였다. 조카 최홍재를 금산의 고경명(高敬命. 문인·의병장) 휘하로 보냈으나 고경명장군이 이미 전사한 후로 그의 휘하였던 남은 병력 800여명을 수습하여 전라우의병에 편입시켰다.

전라우의병은 한양으로 가서 근왕하려하였으나 전라감사 권율으로부터 전라도 방어를 책임져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전라우의병은 장수를 주둔지로 하여 금산, 무주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다. 금산전투에서는 짙은 밤안개를 이용하여 볏짚을 병사로 위장하고 적의 화살과 탄환을 소비하게 했다. 어둠이 개이고 날이 밝아올 때 공격하여 크게 승리한다. 그는 탁월한 감각과 현감 시절 고을의 안녕을 위한 노력으로 각 고을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던 경험으로 지리에도 밝았다. 그는 장사진, 어관진, 조운학익진 등의 진법을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기습작전 및 매복 작전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1592년 왜군이 진주방향으로 진격한다는 첩보를 받고 의병을 매복시켜 공격하며 큰 타격을 입힌다. 이 전투를 무주대첩이라 한다. 이 승리 이후 장수에서 남원으로 주둔지를 옮긴다. 남원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을 때 영남의병장 김면과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이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그의 부장들과 고을민들은 적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치고 있는데 호남을 버리고 멀리 영남으로 간단 말입니까라는 말을 하였다. 이에 영호남의 마음을 하나로 잇는 위대한 말을 남긴다. “嶺右我國之地 湖南我國之地 영남도 우리 땅이요, 호남도 우리 땅인데 의로써 일어난 사람들이 어찌 영호남을 가리겠는가.' 라며 영남으로 출병하여 159210월 진주성 1차 전투 외곽 지원담당을 맡는다. 왜군 2만 여명을 상대로 진주목사 김시민과 진주성 군사(38백명) 주민(수만명), 정유경(300), 조응도/최강/이달(500), 정기룡(300), 상대승/정언충(200), 최경회/임계영/김준민(2000)의 관군과 주민 의병이 힘을 합쳐 진주성 1차 전투(진주대첩)를 대승리한다.

 

전라우의병은 거창에 주둔하며 영남의병장 김면과 합동 작전으로 개령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1593115일에 성주성을 탈환한다. 이후 고령의 김면과 김성일이 전염병으로 죽자 조정에서는 421일 조정에서는 최경회를 경상우도병사로 임명한다. 선조실록 371593421일의 기록을 보면 비변사가 말하기를 최경회는 무신이 아니지만 이미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명성이 크게 드러나고 재능도 책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호남의 의병이 이미 그와 친숙해 있으니 사변이 안정될때가지 직을 맡겨도 되겠습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 조선에서는 구원군인 명나라와 1년간 전쟁으로 피폐해진 왜군사이에 화의가 성사된다. 그 결과 왜군은 북부 및 수도권 지역에서 철수, 남해안까지 물러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과정에서 왜군 전군에 진주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1차 전투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6월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경상남도 함안, 반성, 의령 일대를 점령하고, 19일에는 37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한다.

 

거의 모든 왜군 병력이 진주성 한 곳에 집중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진주 근처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은 진주성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왜군 측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의 의지가 확고하여 진주성만은 함락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들이 공격하기 전에 민간인들을 모두 내보내라고 권고할 정도였다.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도 진주성 근교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했다. 그러나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진주는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기에 진주만 공격하고 돌아간다는 왜군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성을 포기하라는 명군과 왜군의 권고를 거부했다.

 

진주성을 향해 총공세를 전개하려는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관군으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사천현감 장윤 등이 진주성으로 들어 왔고, 고종후, 강희열, 이계련, 변사정, 민여운 등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왔다.

 

불행한 것은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은 원병으로 와있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다가 급히 전투에 참가하느라 진주성을 지휘할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다. 진주성의 대대적인 공격을 막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군 22백여 명, 의병 6백여 명 그리고 주민도 6만여 명이 되었지만 모두 의기로 뭉쳤을 뿐 잘 훈련된 왜군에 대항하기는 처음부터 열세적인 입장에 있었다.

 

621일부터 627일까지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621일 왜군 기마병 2백여 기가 출몰하여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갔다.

622일에는 처음 교전이 일어나 왜군 30여 명을 쏘아 죽이니 퇴각을 하였다가, 초저녁과 2, 3경에 다시 공격을 해왔다가 퇴각을 하였다. 조선군은 남쪽에는 남강이 흐르기 때문에, 침입이 예상되는 서북쪽에 해자를 파고, 물을 흘려 호를 만들었으나, 왜군은 해자에 흙을 메워 길을 만들었다.

623일 낮에 3, 밤에 4회를 공격을 하였다.

624일에는 적의 증원군 1천여 명이 동서로 진을 쳐서 포위하였다.

625일 왜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흙으로 만든 대를 세워 성안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이에 충청병사 황진도 성안에 다시 높은 언덕을 쌓아 대처를 하였으며, 낮의 세 차례 공격과 밤의 네 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다.

626일 왜군은 방책을 만들어,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화전 공격을 하여 성내의 초옥을 불태우면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고 다시 전서를 보내 항복을 독촉한다. 이 날도 밤낮으로 일곱 차례를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627일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에 다섯 군데의 언덕을 축조하고 거기에 공성용 대나무 대를 세워 하향 조준으로 사격을 하여 조선군 300여 명을 죽였고, 철갑을 입고 사륜거라는 장갑차를 끌고 와, 철추로 성문을 뚫으려 했다. 장사였던 김해부사 이종인이 연거푸 적을 베어 물리치고, 조선군은 기름과 횃불을 던져 왜군에 대항하여 격퇴시켰다.

628일 야간 경비가 소홀하여 적이 몰래 와서 성을 뚫으려하는 것을 힘들게 방어를 했으며, 1천여 명의 적이 죽었는데 황진도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를 하였다.

629일 전사한 황진을 대신하여 목사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겁을 먹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자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 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죽게 된다. 오후에 비가 내려 동문의 성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노도와 같이 밀려왔는데, 활과 화살로 대응을 하지 못하므로 창과 칼로 육박전이 일어나게 되고, 이종인도 왜군의 탄환을 맞고 죽게 된다.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조복 한벌과 무주대첩에서 왜장에게서 빼앗았던 보검과 공민왕의 그림을 조카 최홍우에게 맡기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둘째형 최경장에게 전하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둘째 형님이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의병을 일으킬 것인데 이것으로 표지를 삼고 이 옷으로 내가 죽은 후 장례를 치러 달라.”고 말한다.

 

이후 끝까지 저항하던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오른다. 최경회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촉석루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한 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죽지 않으리.

 

마지막으로 최경회는 북쪽을 향해 4배하고 외로운 성이 포위당했는데 밖에서 지원군은 오지 않고 형세도 불리하고 힘도 다했으니 한 번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인장과 병부를 가슴에 안고 남강에 투신을 한다. 이때 함께 있던 여러 장군도 남강에 투신하여 죽게 된다.

 

이후 159377일 일본군 장수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 장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한다. 논개는 깍지를 끼었을 때 빠지지 않게 열손가락 마디마다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끌어안아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죽게 된다. (논개에 관한 내용은 다음 편에 좀 더 자세히 다룹니다.)

 

진주성 2차 전투는 조선군이 패한 전투이지만 결코 패전이라 할 수 없다. 왜군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주어 진주성 전투이후 왜군은 이렇다 할 전적 없이 부산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막부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였다.

이 전투는 지방의 성 하나를 놓고 싸운 전투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가치가 남은 전투였다. 진주성 전투는 조선인이 얼마나 강인하고 충, 의가 있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준 전투였다. 고립된 성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웠다. 최경회와 의병들은 1년간 노숙을 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했으며 과거부터 있었던 호남과 영남의 간극을 없애는 모범을 보였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군이 호남이나 한양으로 다시 진군하지 않도록 사수하겠다는 생각은 국가와 백성을 사랑하는 깊고 큰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을 예측하고도 감행했던 그들은 우리역사에서 소중히 생각해야하는 위인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40, 26(1593710)(1593715)(1593716)

선조실록 42, 26(159396)

김세곤 http://blog.daum.net/segon53/15860230

위키백과 제2차 진주성 전투https://ko.wikipedia.org/wiki/%EC%A0%9C2%EC%B0%A8_%EC%A7%84%EC%A3%BC%EC%84%B1_%EC%A0%84%ED%88%AC

최경회 후손 기록 https://blog.naver.com/yschoimd/20137770329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33741&cid=51942&categoryId=54817

세계일보 기사 http://www.segye.com/newsView/20120807022391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표현 특징인 전신사조(傳神寫照)로 표현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 ‘임파스토1편 이순신장군 설명 참고

전신사조(傳神寫照)’2편 별을 바라보는 염근리 설명 참고 



한국인 시리즈 NO.4- 논개의 남자. 최경회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작품 소개

고부 봉기의 동학 농민을 표현한 작품이다. 순박해 보이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으로 느껴지는 미간의 주름을 중점적으로 표현했다. 죽창을 잡고 있지만 그에게서는 살기(殺氣)보다는 살기위한 간절함이 더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으로 표현했다. 그런 인상을 만들기 위해 얼굴을 4번이나 고쳐 그렸다.

 

조선말기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세금을 걷기위한 횡포가 도화선이 되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전봉준 녹두장군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주로 설명하지만 실상은 농민 즉, 백성이 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한 탐관오리와 농민의 문제이다. 근대 역사를 보면 몇몇 귀족이나 왕의 횡포로 혁명이 일어났다. 영국의 세금이 도화선이 되어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이를 돕던 프랑스의 세금이 도를 넘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세금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세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세금이 국민에게 올바로 사용되느냐가 중요하다.

 

지난 1218일부로 2018년 지방선거가 180일의 공식일정에 돌입하였다. 지역민을 위한 훌륭한 인물들이 선출되어야겠다. 지역을 살리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물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지역인구가 급격히 줄고 고령사회로 급변하는 상황에서 조만간 지역민이 사라져 소멸되는 군이 나온다는 조사가 있었다. 2015 통계청 조사에서는 산청, 합천, 의령, 남해, 강화군이 소멸 예상지역으로 나타났다. 그 후 2년 뒤인 올해 2017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기초자치단체 228곳 중 85곳은 30년 안에 사라진다고 조사되었다. 위험수위가 2년 만에 급격히 늘어났다. ‘소멸고위험지역으로는 의성군, 고흥군, 군위군, 합천군 순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높게 나왔다. 기초자치단체의 자구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할 때이다. 지금 부터라도 지역재생사업에 매진하지 않는다면 30, 40년 뒤에는 감당할 수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훌륭한 리더를 뽑아야하는 이유가 분명해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고령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청년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모두가 현명해져야한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3-고부 봉기 동학 농민/ 유화/ 72.7cm X 60.6cm/ 2017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표현 특징인 전신사조(傳神寫照)로 표현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 ‘임파스토1편 이순신장군 설명 참고

전신사조(傳神寫照)’2편 별을 바라보는 염근리 설명 참고

 


한국인 시리즈 NO.3​-고부 봉기 동학 농민작품의 임파스토 표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작품 소개

염근리(廉勤吏)를 생각하며 그린 작품이다. 상징적인 대상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맹사성을 생각하며 그렸다. 평소 소를 타고 다니길 좋아해서 그가 재상인줄 알지 못했고 남루한 행색으로 수령의 야유를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평소 음악을 즐겼으며 스스로 악기를 만들기도 했었다. 품성이 어질고 늘 차분했으나 정사를 논할 때에는 과단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강호사시가에 나오는 탁료 계변(濁醪溪邊), 초당(草堂), 소정(小艇), 삿갓, 누역 등의 단어를 보면 그가 세속을 벗어나 한가로운 생활 속 모습조차 너무나 검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재상이었으면서도 청백의 모범이 되었던 맹사성과 조선의 염근리들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해야하는 위인이며 영웅이라 생각한다.

 


화가: Kai Jun/ 제목 : 별을 바라보는 염근리/ 유화/ 72.7cm X 60.6cm/ 2017

 

염근리(廉勤吏)

고려시대부터 청백리제도는 시행되었었다.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이상적인 관료에게 주어진 호칭이다. 조선시대에는 총217명의 청백리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수장이 천거하고 임금의 재가를 얻어서 의정부에서 염리(廉吏)를 뽑았다. 훌륭한 관료에게는 염리라고 호칭을 주었고 사후에는 녹선(錄選 추천하여 관리로 삼음)하여 청백리를 주었으나 조선 명종 대부터 살아 있는 자는 염근리라는 명칭을 붙여 선발했고,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사후에는 청백리로 녹선(錄選)하였다.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표현 특징인 전신사조(傳神寫照)로 표현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전신사조(傳神寫照) : 동양화의 초상화, 인물화를 그릴 때 그 인물의 정신세계를 전하려는 목적으로 외형의 묘사에 그치지 않고 대상이 살아온 삶과 고매한 인격 등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한다는 초상화론이다. 동진의 고개지에 의해 전신론(傳神論)’이 시작되었다. 4세기 후반 당시에는 대상을 외형적으로 닮게 그리는 것이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했었으나 고개지에 의해 정신이 담기 그림이 더 좋은 것이라는 알려졌다. 고개지에 의해 중국미술사가 전환점을 가졌으며 이후 남종화는 사실보다 정신을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즉 대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끄집어내어 의미를 담아야한다는 것이다. 서양화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는데 종교화나 19세기 이후의 인상주의나 표현주의 , 캐리커쳐와 같은 형식이 의미를 중요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고개지의 방식과 서양화의 방식과 차이가 있다. 19세기 이후 서양방식에서는 외형의 변형을 적극적으로 나타냈다면 고개지는 골법(骨法)이라하여 대상의 골격과 근원적인 것에 변형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차이가 난다. 고개지가 만든 동양미술의 관념은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1편 이순신장군 설명 참고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작품 소개 

이순신 장군이라는 설정으로 그린 작품이다. 12척의 배로 국가를 지켜야 했던 장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심각한 상황에서도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정신력의 원천은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며 작업했다. 

 

“勿令妄動(물령망동) 靜重如山(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했던 말은 장군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군은 수없이 많은 시간동안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세상을 비춰보는 시간을 가졌던 같다. 장군의 업적과 위대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통찰력과 침착함은 그가 난중일기와 서간첩, 임진장초를 적으며 망중한의 여유를 가진 덕분이 아닌가 한다. 역사에 길이 남는 명장 이순신의 정신을 생각해봤다.

 

화가: Kai Jun/ 제목 : 이순신 장군/ 유화/ 116.8cm X 91cm/ 2017년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 서양 17세기 화파. 카라바조 작품의 영향을 받아 격렬한 명암대비로 극적인 연출을 하는 방식을 말한다. 대표화가로는 만프레디, 칼라치오로, 혼트호르스트, 피테르 판 랄, 조르주 드 라 투르, 호세 데 리베라 등이 있고, 벨라스케스와 귀드 레니도 일시적으로 그 영향하에 있었으며 렘브란트 역시 이 영향 하에 있었다.

 

 화가 : 카라바조/ 제목 : 그리스도의 매장/ 유화/ 300 x 203cm/ 1602~1604년

 

키아로스쿠로 : ‘명암’이라는 뜻. 빛에 의해 사물이 밝은 면에서 어두운 면까지 점진성을 가지며 변하는 변화를 통하여 삼차원성을 획득하는 방식을 말한다. 고대에도 사용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 많은 활용이 있었으며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활용이 되었다. 

 

임파스토 : ‘반죽된’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유화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을 일컫는다. 붓이나 팔레트 나이프, 또는 손가락을 사용해 색을 칠하거나, 직접 튜브에서 물감을 짜 바르는 방식으로, 붓자국 등을 그대로 남겨 표면과 질감에 다양한 변화를 주려할 때 이 기법을 사용한다. 렘브란트, 루벤스, 넬러의 작품 중에서 중요 부위는 이 기법을 활용하여 강조성을 주었다.

 

 

이순신 장군 작품의 임파스토 표현 1. 투구의 금동 장식 부분 / 2. 투구 귀덮개의 털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년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년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前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칼럼리스트 Kai Jun(전완식) 소개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를 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문재인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운영위원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