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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지방선거의 민주당 완패와 시험대에 오른 윤석열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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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실시된 전국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민주당 김동연 후보가 신승(辛勝)했다. 전국적으로 보면 완패한 형국이지만 그나마 민주당에 숨통을 열어준 승리가 아닌가 싶다.국민은 민주당을 완전히 죽이지는 않은 셈이다. 호남이야 오래된 민주당 텃밭이니 당연히 민주당이 승리할 것으로 모두 예상했다. 호남이외 지역에서 제주도를 빼고 민주당은 모든 지역에서 패배했다. 이러니 경기도에서 마저 졌다면 민주당은 완전히 전멸하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굳이 민주당의 경기도 승리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민주당의 잘못이 크지만 회초리 한 번 맞고 정신 …
황희만(heman21) 2022-06-03 20:4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2>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⑤맹사성[孟思誠(1360-1438), 시호 文貞公,계속](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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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맹사성] 세종은 즉위하자 바로 변계량, 박자청과 함께 맹사성에게 말을 한 필 씩 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경이 관습도감제조로 악사들에게 새 가사를 잘 가르쳐 율조와 합치되므로 부왕이 매우 기뻐하셨소. (卿爲慣習都鑑提調 敎伶人新詞 合 於律調 父王歡愉 : 세종 즉위년 11월 10일)” 맹사성은 음악에 관해 조예가 매우 깊었으므로 세종은 늘 그에게 음악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악사의 연주를 지켜 본 세종이 잘못을 지적하며 말했다. “에는 노래 사이에 를 부른다고 했고 에는 생과 용을…
신세돈(seshin) 2022-06-03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1>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⑤ 맹사성[孟思誠(1360-1438), 시호 文貞公](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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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5 맹사성[孟思誠(1360-1438), 시호 文貞公] 맹사성은 고려 최영장군의 손녀사위로 우왕 12년(1386) 문과 일등으로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이라는 직책으로 관문에 들어섰다. 맹사성의 초기 관직생활은 유난히 곡절이 많았다. 태조 때 예조의랑으로 이씨조선 정부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개국공신 정희계를 똑바로 기록하지 못했다는 죄로 파면되었다. 태종 3년(1403) 윤11월 좌사간대부로 다시 복직되었지만 이번에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된다. 이 때 맹사성이 속해 있던 사간원과 사헌부 사이에는 묘한 갈등이 있었다.…
신세돈(seshin) 2022-05-27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0>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④신개[申槪(1374-1446), 시호 文僖公,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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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4 신개[申槪(1374-1446), 시호 文僖公, 배향공신] 신개는 황희, 허조, 최윤덕과 함께 세종의 묘정에 배향된 7공신 중에 하나이다. 두 형(양령대군 제와 효령대군 보)과 일찍 타계한 스승 이수의 3명을 제외하면 이 4명이 세종의 묘정에 배향된 ‘진정한 세종의 신하’라고 할 수 있다. 신개는 세종의 공법(貢法)을 강력하게 추진한 인물이다. 신개는 조선 개국과 함께 치러진 과거에 급제하여 태조 1년(1393) 스무 살의 나이로 사관(史官)이라는 공직의 길을 시작하였다. 태종 때에는 주로 사간원에서 봉직하였으며 태종 17…
신세돈(seshin) 2022-05-20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9>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③허조[許稠(1369-1439), 시호 文敬公, 배향공신](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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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마소요구] 명나라가 조선에 말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왔다. 지난 태종 9년 10월(1409)에도 말 만 필을 요구해 보내었고 세종 3년(1421) 9월에도 보냈는데 이제 또 말 1만 여 필을 요구한 것이다(세종 5년 8월 2일). 이 문제를 여러 재상과 의논하다가 다른 모든 재상들은 물리치고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만 남았다. 허조는 말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는 것을 반대했다. 북방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예측이 어렵기도 하려니와 나라 안은 흉년으로 창고가 비었으므로 형편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적미적 대면서 …
신세돈(seshin) 2022-05-13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8>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③허조[許稠(1369-1439), 시호 文敬公, 배향공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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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와 부민고소금지법 : 府民告訴禁止法] 예조판서 허조는 이렇게 생각했다.; “천하 모든 국가에는 인륜이라는 것이 있는데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의 신분질서가 그것이다. 조금이라도 이 질서를 능멸하고 훼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조금이라도 틈이나 허물이 생기면 그것을 꼬투리 잡아 문제 삼거나 소송을 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허조가 세종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만약 그런 나쁜 풍조를 금지하지 않으시면 그 폐단은 임금께서 신하를 모으지 못하고 아비가 자…
신세돈(seshin) 2022-05-06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7>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③ 허조[許稠(1369-1439), 시호 文敬公, 배향공신](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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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3 허조[許稠(1369-1439), 시호 文敬公, 배향공신] 허조도 황희나 변계량처럼 태종의 사람이었다. 사실 변계량 이상으로 태종의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옷을 평생 입고 다녔으며 죽을 때에도 그 옷으로 염을 하라고 할 정도로 효심이 남달랐다. 자기 스승(염정수)이 사형을 당하자 제자나 그의 옛 부하 등 모든 주변사람들이 염정수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허조만은 시체를 붙들고 애통해하며 관곽으로 장사지내 줄 만큼 의리도 뛰어났다. 과부가 된 처제가 허조의 맏아들 허후로 양자를 삼고 모든 재산을 허후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
신세돈(seshin) 2022-04-29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6>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②최윤덕[崔閏德(1376-1445), 시호 貞烈公,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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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 최윤덕[崔閏德(1376-1445), 시호 貞烈公, 배향공신] 최윤덕은 고려 때 양장공 최운해의 아들로 음직으로 벼슬에 나왔다. 아버지 운해와 함께 영해에 쳐들어온 왜적을 물리치는 공이 있었으므로 태종이 즉위하자 역마로 그를 불러 영해전투의 상황을 묻고는 바로 부사직으로 등용시켰다. 태종 11년에는 경성절제사로 외방에 나갔으며 우군총제가 되었다. 세종은 즉위하는 그 해 최윤덕을 중군도총제로 임명하였고 그 다음해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하였다. 대마도 정벌 때에는 삼군 도절제사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공조판서를 제수하였다. 공조판서…
신세돈(seshin) 2022-04-22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5>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① 황희[黃喜(1363-1452), 시호 翼成公, 배향공신]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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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섭정문제] 세종 24년 5월 눈병이 심해지자 세종은 영의정 황희와 예조판서 김종서, 도승지 조서강을 불러 세자(珦:문종)에게 업무를 넘기는 문제를 논의했다. “내 눈병이 날로 심해져 중요한 업무를 친히 결단하기 어려우니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보도록 하고자 한다. (予之眼疾日深 未得親斷機茂 欲令世子處決庶務 : 세종 24년 5월 3일)” 황희 등 대신들은 안 된다고 했다. 첫째, 연세가 아직 한창이시고 둘째, 나라 온 신민들이 실망할 것이며, 셋째, 후세에 모범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끝으로 중국이나 여러…
신세돈(seshin) 2022-04-15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4>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① 황희[黃喜(1363-1452), 시호 翼成公, 배향공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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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황희 중용의 이유] 태종 18년 재위기간 중 네 번, 기간으로는 약 8년 동안 파면되었던 황희는 세종 32년 재위기간 중에는 두 번 밖에 파직되지 않았다. 그것도 합하여 11개월 밖에 안 되는 짧은 파직이었다. 세종 재위기간으로 본다면 거의 파직되지 않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만큼 세종은 황희를 신뢰했다는 말이다. 세종이 황희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아버지 태종의 유훈이라 할 수도 있다. 태종은 진정으로 황희를 믿고 신뢰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아들이 그를 중용해 주기를 바랐다. 세종의 말이 그…
신세돈(seshin) 2022-04-08 17: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