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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7 : 광개토대왕과 후연(18)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2월20일 16시5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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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99) 난한의 쿠테타와 모용보의 피살 (AD398)

 

갈 곳을 잃은 모용보는 모여등과 모용성을 보내 기주 지역의 군사를 모았다. 그러나 모여등이 평소에 거칠고 포악하여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으므로 모용성은 그를 죽여버렸다. 모용성의 간절한 부탁으로 거록(하북성 영진)과 장낙(하북성 기) 여러 부락들이 호응해 왔다.

 

모용보는 용성에 있는 난한이 연의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역심이 있는 것은 아니고 후연 조정에 충절을 바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용성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무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다가 도중에 건안(하북성 천안)에서 장조라는 사람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모용성은 용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난한을 살펴보자고 했다.

 

모용보가 용종복야 이한을 난한에게 보내고 자신은 석성(용녕성 건창 부근)에 머물렀다. 난한은 좌장군 소초를 보내 이한을 극진히 영접하고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상세히 말하도록 했다. 모용보는 난한이 아버지의 장인 중의 한 사람이며 또한 아들 모용성의 비의 아버지 이므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한이 돌아오기도 전에 앞으로 나아갔다. 아들모용성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렸지만 뿌리치고 용성으로 나아갔다. 모용성은 자신의 측근 장진과 함께 샛길로 들어가 숨었다. 

 

모용보가 용성에서 40여 리 떨어진 색막한형(조양 서남쪽)에 다다르자 성 안 사람들은 환호하며 기뻐했다. 난한은 무리를 이끌고 나아 와 죄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형과 아우들이 극구 반대하며 말렸다. 동생 난가한을 보내 500 기병과 함께 모용보를 영접하고 형 난제를 파견하여 무기를 숨기고 성문을 차단하여 주민들의 내왕을 막았다. 모용보 세력과 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사전에 막자는 생각이었다.

난가한이 모용보를 영접하는 동안 모용보 측근에 있던 여숭이 조용히 말했다.

 

  “ 난가한의 얼굴을 보니
    장차 변란이 아주 가까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마땅히 세 번 생각을 하시고 나서셔야지 어찌
    무턱대고 그를 따라 가십니까?“

 

모용보는 아무 걱정이 없다고 그를 타일렀다. 몇 리를 가던 난가한은 먼저 여숭을 사로잡았다. 여숭이 소리쳤다.

 

  “ 너희 집안은 운 좋게 폐부와 인연을 맺고 나라의 총애와 영광을 받았으니
   종족이 다 없어져도 은혜를 갚기에 부족하다.
   지금 찬탈을 꾀하는 모양인데
   이는 하늘과 땅을 거스르는 일이니
   조석 간에 싹 쓸려버려질 존재들이지만
   내 손으로 그러지 못하는 것이 원통하다!“

 

난가한은 여숭의 목을 내리쳤다. 그리고 모용보도 민가 저택을 모신 뒤에 살해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난한은 모용보의 시호를 영제라 하고 그의 측근 100 여명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대도독 대장군 대선우 창려왕이라고 불렀다. 

장낙왕 모용성이 아버지 피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용성으로 달려가려는 것을 장진이 말렸다. 모용성이 말했다.

 

  “ 난한의 성격이 어리고 천박하여서
    반드시 혼인(자신의 딸이 모용성의 부인)을 생각하고
    차마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한  달 열흘이면 내 생각을 펼치기에 충분하다.“

 

뿌리치고 들어가서 장인어른 난한을 만났다. 난한의 부인 을씨와 난한의 딸이자 모용성의 부인인 난씨가 간절히 모용성의 목숨을 살려줘야 한다고 하자 난한은 불쌍히 여겨 모용성을 궁 안에 가두기만 하였다. 동생 난제와 난가한이 여러 번 간청하여 모용성을 죽이자고 했으나 난한은 따르지 않았다. 난제는 술과 여자에 빠져서 난한을 모시는 일에 예의가 없자 모용성이 이를 이용하여 난한 형제 사이를 벌여놓기 시작했다. (AD398년 5월)


(100) 모용기의 반란과 모용성의 난씨 제거(AD398)

 

태원왕 모용기는 모용해의 아들이고 모용각의 손자이며 난한의 외손자였다. 난한이 반란을 일으킬 때 죽지 않은 것도 이런 관계 때문이었다. 모용성은 갇혀 있기는 했지만 부인을 통하여 모용기의 알현을 받도록 한 다음에 그에게 나가서 군사를 모아 난한을 제거하라고 부추겼다. 모용기는 모용성에게는 5촌 당숙이었다. 모용기가 그 말을 듣고 나가서 건안(하북성 천안 부근)에서 수천 명의 군사를 일으켰는데 난제가 나가서 토벌의 임무를 받았다. 모용성이 난한에게 말했다.

 

 “ 선구(모용기)는 어린 아이입니다.
   어찌 그런 큰일을 자기 혼자 했다고 여기십니까?
   반드시 안에 호응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태위(난제)는 교만하고 민기가 어렵습니다. 큰일을 맡기시면 안됩니다.“

 

난한이 무례한 동생 난제의 군사를 빼앗고 구니모를 대신 보내 모용기를 토벌하도록 시켰다. 용성에는 여름 내내 비가 오지 않아서 난한이 비를 비는 제사를 올리면서 가뭄은 모용보를 시해한 난가난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난가난은 난한이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에 대해 격분한 나머지 부하들을 이끌고 나가서 구니모를 습격했다. 예기치도 않게 뒤에서 습격을 받은 구니모 부대는 패배 당했다. 난한이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난목을 보냈는데 난목이 난한에게 말했다.

 

  “모용성은 나의 원수이고
   모용기와는 겉과 속이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용기를 치기 전에 먼저 모용성을 없애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난한이 모용성을 불렀다. 모용성의 비가 그것을 알고 모용성에게 알려주자 모용성은 역병을 앓고 있어서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었다. 난한은 더 이상 모용성을 부르지 않았다.   

이한, 위쌍, 유충, 장호, 장진과 같은 무리들은 예전에 모용성의 후한 대접을 받았었는데 모용성이 실각한 뒤 난목이 영입하여 심복으로 그 휘하에 있었다. 이한과 위쌍은 난목의 권세를 업고 모용성의 처소를 드나들면서 몰래 모의를 꾸몄다. 7월 17일 난목이 군사를 일으켜 먼저 난제와 난가한 부대를 격파했다. 난목이 난가한 무리를 제거한 것을 자랑하며 축하하는 잔치에 난한을 초청하였다. 두 사람이 다 술에 취해 있는 동안에 모용성이 변소를 간다고 꾸미면서 담을 타 넘고 난목의 처소에 들어가 이한과 위쌍이 난목을 베어버렸다. 모용성이 난목을 죽였다는 소식이 퍼지자 모든 사람들이 앞 다투어 나서서 난한을 베어버렸다. 패하여 몸을 숨겼던 난가난과 난제 또한 사람들에게 붙잡혀 목이 날아갔다. 이제 후연 조정의실권이 모용보의 큰아들 장낙왕 모용성에게로 돌아갔다. 아버지 모용보의 시호를 영제에서 혜민황제로 다시 고쳤다. 모용성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왕공들은 공경으로 직함을 낮추었다.(AD98년 7월) 

 

(101) 모용기 반란 실패와 피살(AD398)

 

실권을 장악한 모용성은 곧바로 을련(요녕성 객자심좌익) 모용기에게 명을 내려 군사를 해체하라고 지시했다. 모용기가 들을 리 없었다. 그의 참모 정령족 엄생과 오환족 왕용도 그러기를 강청했다. 모용기는 3만 기병을 이끌고 용성 10리 밖까지 이르렀다. 모용성이 사기충천한 군사를 몰아나가 모용기 군대를 격파하고 모용기를 사로잡았다. 모용기의 일당 100여 명의목을 벤 다음 모용기의 목도 처단하니 환왕 모용각의 후사가 완전히 끊어졌다. 
 
나라를 수습하고 반란을 제압한 장낙왕 모용성은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삼촌 하간공 모용희를 시중 거기대장군 사예교위로 삼고 삼촌 성양공 모용원을 위장군으로 삼았다. 좌장군 유충과 후장군 장호에 임명함과 동시에 모용씨의 성을 내렸다. 공신 이한, 위쌍, 장순과 장진 모두 중책을 맡았다. 후연의 보병교위 마륵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죽었는데 이 일이 고양공 모용숭과 동평공 모용징에게 연결되어 모두 자결 명령을 받았다. 이 둘은 모용륭의 아들이다. 


(102) 모용성 황제 칭함(AD398년 10월)

 

9월 6일 동양공 모용근이 후연 상서령에 오르고 장통이 좌복야, 위륜이 우복야가 되었다. 모용호는 유주자사가 되어 북쪽지역 방어를 맡았는데 다음 해(AD399) 초에 반란을 일으켰다. 연루된 장통과 장순과 함께 모두 주살되었다. 동양공 모용근과 장수 장진도 따로 반란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죽었다.
 
AD399년 10월 모든 신하들이 간곡하게 제위에 오를 것을 바라니 모용성이 마침내 제위에 올랐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황후 단씨를 황태후, 태비정씨를 헌장황후라 불렀다. 모용성의 아내 중 난한의 면했다. 딸 난씨는 모용성이 죽을 것을 간신히 살려내는 공이 깊었는데 난씨 일족이 제거될 때 헌장황후 정씨가 강력하게 옹호한 까닭에 목숨을 건졌지만 끝내 황후가 되지는 못했다.
 

(103) 남연 모용덕이 활대를 잃고 광고로 옮김(AD399)

 

AD394년 전진이 망할 때 죽은 황제 부등의 동생 부광은 3천 무리를 이끌고 남연왕 모용덕에게 의존했다. 모용덕은 그를 관군장군으로 임명하고 후하게 대했다. 마침 형혹성(화성)이 동정 별자리에 머물게 되자 사람들은 그것이 전진이 부흥할 징조로 여겼다. 부광은 스스로 그 적임자로 생각하고 진왕이라고 일컬으며 반란을 일으켜 남연의 북지왕 모용종을 공격했다. 당시 모용덕이 도읍으로 삼던 활대(하남성 활)는 영토도 10여 개 성으로 작을뿐더러 군사도 1만을 채 넘기지 못했다. 모용종이 패하여 무너지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모용덕을 버리고 부광에게 의탁했다. 모용덕이 모용화에게 활을 맡기고 나서서 부광을 격파하고 그의목을 잘랐다.

 

작년에 모용보가 북으로 가면서 여양(하남성 준현)에 당도했을 때 모용화의 참모 이변은 모용화에게 모용보를 영접하라고 권했었는데 모용화가 반대했었다. 죽은 모용보에게 우호적인 자신의 입장에서 새로 독립한 모용덕은 언제라도 자신의 목을 칠지 모르는 상황이 된 이변은 동진세력을 끌어들여 모용화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계획을 세웠다. 먼저 동진 부대를 관성으로 끌어들인 다음 모용덕이 나가서 싸우는 동안에 활 안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모용덕이 나가 싸우지 않아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갈 즈음에 부광이 반란을 일으켰고 마침 모용덕이 나가 부광과 싸우자 이변은 모용화를 설득해서 반란을 일으키자고 종용했다. 모용화가 끝내 동조하지 않자 이변은 모용화를 죽여 버리고 활대를 북위 탁발규에게 바쳤다.      
  

모용덕은 북위에게 넘어간 활대를 공략했다. 북위가 점령한 활대가 완강히 버티는 동안에 우위장군 모용위가 이변의 목을 제어가지고 2만여 가속과 함께 모용덕에게로 왔다. 모옹략하고 싶었으나 활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북위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이 쉽지는 않았다. 활대 공격에 대한 찬반양론이 뜨거웠다. 혹자는 다른 지역을 점거하자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래도 근거지였던 활대를 수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서 반총은 활대는 여러 나라의 국토가 겹치는 곳이라 환란이 하루도 없었던 적이 없어서 안 되고, 팽성은 인구가 적고 물이 가까워 수전에 능한 동지에게 유리하니 안 되므로 산동성 광고(청주시)야 말로 비옥한 토양이 가까이 있고 정예군사는 10만이 넘고 바다와 산이 험준하여 천하의 요새니 그리로 옮기자고 했다. 모용덕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이에 승려 축랑이라는 자가 점을 보면서 반상서의 말이 옳다고 추켜세웠다. 모용덕은 마침내 산동성 광고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104) 이랑의 반란(AD399)

 

후연의 요서(하북 노룡)태수 이랑은 10년을 재임하고 있었다. 모용성이 자신을 의심하여 해임할까 두려워하였으나 자신의 가솔들이 모두 용성에 있어서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항복할 생각으로 북위군사를 끌어들이고는 모용성에게 사신을 보내 북위군대가 너무 강성하여 급히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모용성은 북위군이 노룡까지 갔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사신을 엄히 추궁한 결과 이랑의 음모를 알게 되었다. 이랑의 모든 가족이 몰살당했고 보국장군 이한을 보내 이랑을 토멸하게 하였다. 
   

(105) 북으로 뻗는 남연의 모용덕(AD399)

 

모용덕은 2만 군사를 모용종에게 주어 북쪽 땅을 경략시켰다. 모용덕은 낭야(산동성 임기)를 점거했다. 서주와 연주 지역 사람들이 모두 모용덕에게 복속하니 군사는 10만을 넘게 되었다. 모용법을 연주자사로 임명하고 양보(산동성 태안)까지 나아갔다. 거성(산동성 거)를 지키고 있던 동진장수 임안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반총을 서주자사로 삼고 거에 주둔하게 하였다. 난한의 난 때 발해태수로 임명된 봉부가 모용덕에게 귀부하자 그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 내가 청주를 얻어도 기쁘지 않았지만
    경을 얻으니 오로지 기쁠 뿐이다.“

 

북지왕 모용종이 산동성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투항을 권하자 후연의 유주자사 벽려혼은 8천여 호를 광고로 옮겨 튼튼히 지키고 사마 최탄과 평원태수 장활에게 방비를 부탁했으나 이들은 모두 모용덕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벽려혼은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북위에게로 달아났다. 모용덕이 유장을 보내 그를 추격하여 결국 거성에서 벽려혼을 베었다. 벽려혼의 아들 벽려도수가 나와 자신도 죽여 달라고 요청하니 모용덕이 감탄하며 말했다.

 

  “ 아버지는 불충하였지만 아들은 효성이 지극하구나.“

 

벽려도수를 살려주었다. 벽려혼의 참군 장영이 벽려혼을 위해 훌륭한 표문을 지었는데 그 문장이 모용덕을 몹시 불손하게 비방하는 것이었다. 모용덕이 그를 질책하자 그가 이렇게 대꾸했다.

 

  “ 벽려혼에게 신이 있음은
    한신에게 괴통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괴통은 한조(유방)를 만나 살았으나 저는 폐하를 만나 죽게 되었으니
    옛 사람과 비교하면 마음으로 불행하다고 여길 뿐입니다.“

 

모용덕이 아까운 마음으로 그를 베었다. 모용덕은 광고(산동성 청주)에 도읍을 새로 정했다.그리고 그 다음해(AD400)DP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건평으로 했다. 모용종을 사도, 모여발을 사공, 봉부를 좌복야 그리고 모여호를 우복야로 임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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