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마흔 번째 이야기 사띠, 수행의 키워드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사띠 없이 수행 없다
많은 영적 스승들의 가르침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있다. ‘지금 여기를 살아라’라는 가르침이다. 쉽사리 알아들을 것 같은, 그러나 이게 도무지 간단치 않다. 도대체 어떻게... 지금 여기를 살 것인가? 열심히만 살면 지금 여기를 살 수 있을까?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반성하는 삶을 살라는 뜻인가? 지금 여기를 사는 구체적 노하우는 없을까? 사띠(sati)에 대해 이해하면 이 물음에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띠의 프라이머리 미닝은 ‘기억’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기억이라는 일상적 의미 외에 수행과 관련된 매우 테크리컬한 미닝을 갖고 있다. 사띠는 한자로는 ‘念’으로, 우리말로는 ‘마음챙김’ 또는 ‘알아차림’으로, 영어로는 ‘mindfulness’로 번역된다.
사띠는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설하고 있는 ‘아나빠나 사띠 수트라’가 ‘安般守意經’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守意’는 ‘마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사띠는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 정신, 통찰지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게으름으로 치우치는 삼매(定)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이 사띠는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것에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사띠는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고 세존께서 설하셨다. 무슨 이유인가? 마음은 사띠에 의지하고, 사띠는 보호로써 나타난다. 사띠 없이는 마음의 분발과 절제함이 없다.”
(청정도론 ⅳ 49)
사띠 없이 수행은 불가능하다. 수행은 사띠에서 시작하고 사띠에서 끝난다. 테라바다 스승들은 한결같이 “사띠를 이어지게 하고, 사띠의 힘을 키우라”고 가르친다. 사띠는 그래서 수행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은 사띠를 의지해 선다’
“마음을 보호하고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띠? 그런 게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구체적으로 잘 이해가 안 되네. 예를 함 들어서 설명해주시면 안될까?” 그렇다. 수행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물어야 한다.
마음은 항상 대상을 갖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은 알아차리는 일을 하고 알아차림은 대상을 갖는다. 그런데 알아차림은 두 개의 차원을 갖는다. 눈 귀 코 혀 피부의 다섯 가지 감각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알아차림은 마음이 하는 일이지만, 이를 ‘사띠’라고 하지는 않는다. 사띠는 이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작용인데, 직접적인 감각내용을 대상으로 하는 알아차림이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대상을 ‘소리’라고 한다. 소리는 감각내용이다. 감각내용은 감각내용일 뿐 ‘사띠’가 아니다. 감각내용인 소리를 한 차원 더 높여 아는 작용이 있고, 이것을 ‘사띠’라고 한다. 소리를 대상으로 아는 작용이 ‘사띠’이다.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이 설명을 문장의 형태로 정리해보자.
‘X가 듣는다’ (감각의 작용)
‘X가 들음을 안다’ (사띠의 작용)
‘들리는 소리가 새소리다’ (산야의 작용)
그러니까 사띠는 감각적 알아차림보다는 한 차원 더 높은 알아차림이다. 논서에서는 이를 여섯 번 째 감각 마노(Mano 意根 마음)의 작용이라고 설명한다.
“바라문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노를 의지한다. 마노가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노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노는 사띠를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사띠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사띠는 해탈을 의지한다.”
(상윳따 니까야)
이 전거에 의하면, 사띠는 마노를 거친 알아차림이며, 마음과 해탈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초기불교에서 왜 사띠를 그토록 중시하는지, 사띠를 왜 수행의 키워드로 삼는지의 이유이다.
사띠의 네 가지 대상
마음은 알아차리는 일을 한다. 마음을 통한 알아차림은 두 개의 차원을 거친다. 마노(意根)을 거치는 두 번 째 차원의 알아차림이 사띠이다. 바로 이 사띠를 통해 대상을 깊숙이 알아차리는 일이 명상이요, 수행이다.
“사띠는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사띠는 대상을 통해서 불선법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다. 사띠는 대상을 거머쥐는 것이다. 사띠는 대상에 대한 확립이다. 사띠는 마음을 보호한다.”(청정도론)
사띠의 대상이 되는 것이 넷 있는데 이를 ‘사념처’라고 부른다. 그 네 대상은 ‘身受心法’, 즉
몸, 느낌, 마음, 법이다. 수행자들은 그 네 가지 대상 중 하나를 택해서 명상을 수련하는데, 그 수련방식마다,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라는 명칭이 붙는다. 한 가지 유념할 것은 그 넷 가운데 다른 것보다 더 좋고 우월한 수행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수행자의 성향과 인연에 따라 각자에 맞는 수행법을 만난다는 생각이 든다.
네 가지 대상의 카테고리를 더욱 세분하면 몸에 관련된 대상 14가지, 느낌에 관련된 대상 9가지, 마음과 관련된 대상 16가지, 법과 관련된 대상 5가지 등 44가지가 되는데, 느낌과 마음을 한 가지 주제로 간주하면 21가지로 분류한다. (대념처경)
이런 세밀한 분류를 여기에서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다만 호흡을 대상으로 한 ‘아나빠나 사띠’가 신념처에 속하고 ‘사성제’ 등 교리를 사띠의 대상으로 하는 수행이 법념처에 속한다는 정도를 이해하고 넘어가자. 느낌과 마음을 대상으로 수행하는 수념처와 심념처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사띠의 대상이 왜 이 네 가지인가? 이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은 매우 중요하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붓다가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상기해야 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명과 색, 마음과 몸이다. 사람을 이해하려면 마음과 몸을 이해해야 한다. 그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한 붓다의 방법은 ‘해체’이다.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가 개념일 뿐 실체 없음을 보이기 위해 色受想行識의 오온으로 해체해서 無常, 苦, 無我를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사띠 역시 ‘나’라고 불리는 마음과 몸, 명색, 좀 더 해체하면 오온을 대상으로 한다. 사념처는 ‘나’를 몸, 느낌, 마음, 법으로 해체하고, 이에 속하는 주제 중 하나를 사띠의 대상으로 선택해서 통찰하여 이것들의 무상, 고, 무아를 체득하는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띠에 대한 세 가지 비유
붓다의 설법은 많은 비유를 통해 이루어졌다. 지혜가 부족한 중생들에게 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사띠 역시 매우 테크니컬한 개념이어서 이해가 쉽지 않다. 사띠에 대한 더 철저한 이해와 사띠 빠따나(사티의 확립)수행에 도움이 되는 경전의 비유를 정리해 본다.
❶ 밧줄과 기둥의 비유
사띠를 밧줄에, 사띠의 대상을 기둥에 비유한다. (상윳따 니카야의 여섯 동물 비유 경) 여섯 동물은 六識의 비유다.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을 밧줄로 기둥에 묶어두면 제각각 이를 벗어나려고 요동을 치다가 지치면 앉거나 눕게 되고, 결국 길이 들 것이다. 기둥과 밧줄이 튼튼해야 동물들을 길들일 수 있다.
❷ 덧문의 비유
여러 경전에서 사띠는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는 덧문에 비유된다. 감각기능들이 컨트롤되지 않으면 욕심과 짜증 등 나쁜 법들(不善法)이 침범한다. 사띠는 이렇게 여섯 문을 단속하고 문을 통해 들어오는 나쁜 법들은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❸ 고향마을의 비유
상윳따 니까야의 ‘새매경’은 매에게 채여가는 메추리의 탄식을 적고 있다. 메추리가 자신의 활동영역을 벗어났다가 매에게 잡혔다는 탄식이다. 사띠는 고향마을이고, 고향마을을 벗어나면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고향마을을 벗어나 행동하지 말라. 고향마을을 벗어나는 자에게 마라(魔)는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마라는 대상을 얻지 못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다니고 행동할 수 있는 고향마을인가? 바로 이 네 가지 사띠의 확립이다.”(새매경)
개념을 버리고 법을 보라
왜 사띠를 이어지게 하고 왜 사띠의 힘을 키워야 하는가?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이다. 중생이 겪는 괴로움은 ‘있는 그대로’ 못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이 ‘해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해체의 대상은 ‘빤냣띠(pannatti 개념적 존재)’이다. 산, 강, 들 등의 자연적 존재에서부터 비행기, 자동차, 배 같은 인공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개념적 존재들은 마치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철학에서는 이런 개념들을 ‘보편자(universal)’라고 부른다.
어떤 철학적 전통에서는 여기에 존재적 지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불교철학은 그러나 ‘개념’은 개념일 뿐 존재성을 갖는 실체가 아니라고 본다. ‘나’, ‘자아’, ‘아트만’ 등 개념은 마치 존재성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해체해서 보면 그것은 빤냣띠일 뿐이다.
중생들은 이런 사실들을 알지 못하고 ‘나’를 ‘있는 무엇’으로 보고 그것에 집착한다. ‘나’에 대한 집착은 모든 집착 가운데 가장 커다란 집착이다. 개념적 존재에 대한 집착을 끊으려면 반드시 그것을 해체해서 봐야 한다. 개념적 존재의 정체가 밝혀지면 ‘있는 그대로’인 법이 드러난다. 있는 그대로인 법이 빠라맛따이다.
무상, 고, 무아는 빠라맛따의 세 가지 속성이다. 해체하여 법을 보고, 법의 속성인 무상, 고, 무아를 구체적이고 투철하게 통찰한다. 이로써 대상을 지겨워하고 싫어하는 마음(厭惡)이 일어난다. 그리하면 집착과 탐욕을 끊고(離欲) 해탈에 이르러 구경해탈지를 체득한다. 사념처의 수행 구도는 바로 이것이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사띠의 확립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그것은 염오로 인도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욕망의 빛바램 경)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