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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66> 불만의 현실과 시적 응전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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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3월23일 16시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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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나무가 새들을 깃들이듯

저녁부터 새벽까지 어둠이 되듯

침묵하겠다. 

풀들이 장수하늘소를 숨긴 채 

풀씨를 기르듯

봄부터 가을까지 침묵하겠다. 

이빨도 발톱도 어둠에 섞여 깜장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말뚝 가까운 자리에 엎드려

바람소릴 듣겠다. 

떨어진 가랑잎들을 몰고 가는 

바람소릴 듣겠다. 

불 꺼진 골목처럼 어둠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밤새도록 깨어 있겠다

             - 이건청 「황야의 이리.2」

 

  내가 시를 쓰게 되는 것은 표현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될 때이다. 표현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 않을 때 나는 시를 쓸 수 없다. 일상의 질서 속에 침잠해 있어서 익숙한 자리에 서 있게 될 때, 그리하여 자아의 위상 자체를 변별적 자리에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지 않을 때 표현에 대한 갈망을 지닐 턱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어떻게 해서 자신을 낯선 자리에서 발견하며 변별적 개체로서의 자신의 의미를 찾아내느냐 하는 문제는 항상 난제(難題)가 되게 마련인 것이다. 결핍과 단절, 위축과 소외는 내가 시를 쓰기 위해 지녀야 할 필수요소이다. 결핍과 단절 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직시하게 될 때 참된 자아와 만난다. 위축되고 소외된 자아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참모습이 말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게 된다. 표현에 대한 강한 욕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자리로 달려가 결핍과 단절을 만나고 위축되고 소외된 자아를 바라보는 나의 시 창작 과정은 그래서 괴롭고 힘든 것이 되기 마련인 것이다. 나의 시 「황야의 이리. 2」를 예로 한 편의 시를 쓰기까지의 과정을 말해 보기로 하겠다. 「황야의 이리」는 ‘불만의 현실을 앞에 둔 자의 응전 양식’을 표현해 보여주고 있다. 현실은 언제나 막강한 것이고 자아는 왜소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적어도 현실에 수용되어 버리거나 함몰되어 버리는 것을 그냥 용납해 버리지 않는 한 자아가 현실에 대해 지니는 느낌은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인 ‘황야의 이리’는 이리로서의 본성을 의도적으로 포기하고 있다. ‘침묵하고’, ‘짖지 않으며’ ‘깜장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불만의 현실을 앞에 두고 완전히 무장해제를 선언해 버린 그런 자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가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방식은 그러므로 매우 비극적인 것이 되어 있다. 탱자나무가 새들을 깃들이듯 저녁부터 새벽까지 어둠이 되듯 침묵하겠다. 풀들이 장수하늘소를 숨긴 채 풀씨를 기르듯 봄부터 가을까지 침묵하겠다. 이빨도 발톱도 어둠에 섞여 깜장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말뚝 가까운 자리에 엎드려 바람소릴 듣겠다. 떨어진 가랑잎을 몰고 가는 바람소릴 듣겠다. 불꺼진 골목처럼 어둠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밤새도록 깨어 있겠다. 

 

 이 시를 쓰게 된 것은 일상의 타성 속에 빠져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치롭지 않은 것, 적당히 타협적인 것, 때로는 때에 쩔어버린 사고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은 어떻게든지 나 자신을 변별적인 자리에 세워야 하겠다는 적극적인 노력의 소산이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가치롭지 못한 것을 가치롭지 못한 것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산다. 감각과 상상력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타협적인 세계에 깊숙이 빠져 있으면서도 내가 타협적인 세계에 깊이 함몰되어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일상세계에 길들여져 사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옳게 바라볼 수 없는 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위의 시의 화자는 ‘황야의 이리’로서의 본성을 마음껏 포효하거나 질주하면서 이리로서의 본능적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처지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이리’인 화자는 ‘이리’로서의 삶의 양식을 거부한 채 독자적인 자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이색적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 ‘이리’가 ‘이리’로서의 일상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은 변별적 자신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일 것이며, 최소한 일상과 타성에 따르기를 거함으로써, 자신을 바른 자리에 정립하려는 노력의 소산일 것이다. 이 시의 화자인 ‘황야의 이리’가 자신을 변별적 자리에 세우려 하는 시도는 두 개의 비유를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데, 그 하나는 ‘탱자나무’의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풀들’의 경우이다. ‘황야의 이리’는 지금 이리로서의 본성을 모두 버리고 침묵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리’의 침묵은 ‘탱자나무’와 ‘풀들’이 침묵하는 그런 방식을 택하고 있다. ‘탱자나무가 새들을 깃들이듯/저녁부터 새벽까지 어둠이 되듯’ 그리고 ‘풀들이 장수하늘소를 숨긴 채 풀씨를 기르듯’ 침묵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탱자나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지닌 나무로 울타리나 방책이 되는 것이 고작인 나무이다. 그러나 탱자나무는 그 날카로운 가시 사이에 새들을 받아들여 따사로운 잠자리를 내준다. 언뜻 보면 그냥 질펀하고 보잘것없어만 보이는 풀들이지만 안 보이는 어딘가에 장수하늘소를 숨긴 채 까만 씨앗을 기르고 있다. 그냥 어둠인 것 같지만 그 속에 편안함과 너그러움을 지닌 그런 어둠 같은 침묵으로 입을 다물고 말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침묵하는 ‘이리’ 그것은 그러니까 그냥 일상의 타성에 젖거나 인습에 빠져가지 않으려는 적극적 의지의 천명이고 선언인 셈이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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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3월23일 16시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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