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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2) 측근비리와 기강해이로 무너져 내린 97년의 봄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09월22일 17시04분
  • 최종수정 2016년09월22일 19시13분

작성자

  • 최양부
  •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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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금욕과 절제의 청교도적 삶”을 산 YS

 청와대는 공간적으로 대통령 집무실(본관)과 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비서관 사무실(별관)이 분리 격리되어있어 대통령에 대한 접근이 자유롭지 못하다.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렇다고 한다. 대통령과 수석들 간의 공식적인 만남은 매주 한 차례 본관 ‘집현실’이라 부르는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국정전반에 걸친 정책현안들에 대해 수석별로 보고하고 중요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나 지시사항이 이어졌다. 비공개로 이루어지는 말 그대로 수석비서관 회의였다. 

 지금처럼 대통령이 정책현안에 대해 대 국민 메시지를 발표하는 곳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국정현안에 대한 입장을 수석비서관회의를 통해 발표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와 국민, 그리고 정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청와대 대변인 발표나 아니면 장관회의에서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석들은 정책사안의 중요도나 긴급성에 따라서는 수시로 대통령을 만나 직접대면보고를 하고 대통령의 결심을 받았다. 그래서 수석들 사이에도 다른 수석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안들이 많았다. 매일 아침 비서실장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체로 모든 국정현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토론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사안들도 많았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비서실장이나 다른 수석도 모르게 은밀하게 추진되는 일들이 있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정무적 일들이 그랬다.

 YS는 수석들과의 소통을 위해 수시로 오찬을 같이 했다. 매주 한 두 차례 정도는 했던 것 같다. 오찬메뉴는 언제나 우리밀로 만든 칼국수였고 간혹 설렁탕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YS는 두서너 달에 한번 정도 재야 시절 즐겨 찾았던 한정식 집에 조촐한 회식자리를 마련하고 수석들을 불렀다.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김영삼을 알고 배우는 자리가 되었으며 그가 겪은 한국정치사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YS는 청와대 생활을 시작하면서 청교도적 삶을 살기위해 부단히 자신과 싸웠다. 청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YS는 하나님 중심의 순결, 정직, 헌신의 경건한 삶과 문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신한국 건설’이란 사명으로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취임직후 대통령집무실에 설치된 대형금고를 뜯어냈고, 청와대 경내에 있는 골프연습장과 관저의 노래방기기도 철거했다. 골프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공직자들의 골프장 출입도 금지했다. 청와대주변에 있었던 권력자들의 밀실정치가 이루어졌던 안가 12채를 모두 헐고 그 자리에 청와대를 찾는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을 만들었다. 

 YS는 수석들과의 오찬이나 회식자리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감사기도로 시작했다. YS는 기독교인으로 ‘주일성수’를 지키기 위해 주일이면 외부에서 목사들을 청와대로 초청 가족예배를 보았다. YS는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5년 동안 금욕과 절제의 생활을 하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외국을 방문했을 때를 포함 해 한 주일도 빠짐없이 주일예배를 보았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적고 있다. 

 

“YS는 아무도 못 말려” 

  YS는 ”재임 중 정치자금을 한 푼도 받지도 주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YS는 재산공개를 앞두고는 가족회의를 열고 ”절대 이권이나 인사 등에 끼어들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했다. 수석들에게도 “돈 받지 말라”는 말을 수석비서관회의 석상에서 자주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컸고 수석과 비서관들은 활동경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홍인길 총무수석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홍 수석은 공식적인 경비로 수석들에게 매월 300만원 한도의 현금카드를 지급했고 비공식적으로 금일봉을 수석실 별로 추가 지원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YS와 수석들을 보호하고 혼자서 큰 고역을 치른 홍 수석에게는 고맙고 항상 빚진 마음이다. 

 YS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성역 없는 권력형 비리척결로 문민정부를 깨끗한 정부로 만드는데 심혈을 기우렸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YS는 취임 후 첫 번째 국무회의에서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고 수석을 비롯한 모든 고위공직자들이 재산등록을 하도록 의무화 했다. 장관과 국회의원, 고위공직자들의 재산이 공개되면서 YS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YS와 가까운 정치거물들이 재산공개 후 의원직을 사퇴하게 되면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나돌았고 200여명이 넘는 고위공직자들이 옷을 벗었다. 공직자 재산공개에 뒤이어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YS는 권력형 부정부패 척결에 나섰다. 슬롯머신 비리, 율곡비리, 동화은행장 비리 등이 검찰수사로 들어나면서 다수의 여권인사들이 다쳤다. 이일은 민자당 내 민정계(노태우계)와 공화계(김종필계), 그리고 YS 민주계간의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었고   훗날 대선실패의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민여론은 YS편이었다. 

 취임이후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YS는 아무도 못 말려”라는 말을 낳았다. YS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열화 같았다. 돈 안 받는 깨끗한 정부는 문민정부와 YS의 자존심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기억하는 YS는 ‘깨끗하고, 솔직 담백하고, 거짓말을 싫어하는 정직한 대통령’이었다.    

  

훼손된 YS의 ‘깨끗한 청와대’ 이미지

 그런데 1996년 3월 문민정부의 도덕성에 먹칠을 하고 YS 자존심을 구기는 사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4월로 예정된 15대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YS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장학로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부정축재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장 실장은 YS가 민주화 투쟁시절 동고동락을 같이하며 YS곁을 지킨, YS가 믿는, 요즈음 표현대로라면 청와대의 ‘문고리’ 비서관이었다. 그런 그가 기업인과 정관계인사들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들어났다. YS는 정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심정이었다. 당시 DJ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기자회견을 열고 그동안 자신들이 은밀하게 탐문조사해온 장실장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만 깨끗하다고 큰소리 칠 게 아니라 주변 단속부터 하라” 고 힐난했다. 언론들도  “‘한 푼도 안 받는 사람’을 지근(至近)에서 모시는 사람이 부정축재를 했다”며 YS의 깨끗한 정부를 조롱하듯 비웃었다. YS는 충격과 분노 속에 인간적인 모멸감, 억울함, 배신감, 비통함으로 큰 상처를 받았고 정말 많이 괴로워했다. 

 사건이 터진 직후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YS는 취임 후 자신이 그토록 청교도적인 생활을 하면서 부정부패와 싸워온 문민정부의 도덕성과 청렴성이 큰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해 아쉽고 안타깝고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YS는 강한 어조로 “앞으로 임기가 끝날 때까지 부패척결은 계속할 것이며 부패와 관련된 사람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법대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수석비서관들은 어떤 경우든 부정부패와 결부된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을 강조하고 “나는 내 자신의 친인척, 그리고 나의 측근에 대해 더 엄한 사람”이라고 했다. YS는 “어느 누구도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 나의 정치철학”이라며 “법대로 엄중이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이 기회에 청와대가 심기일전해서 “깨끗한 청와대”를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장 실장 사건은 YS에게는 애증이 교차하는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그러나 YS는 제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사건을 처리했다. 즉각 장실장의 사표를 받고 검찰 조사를 받게 했고 사법처리하도록 했다. 검찰은 장 실장이 받은 돈은 27억이며 그 가운데 21억은 평소 지병을 앓고 있는 불편한 몸으로 대통령 모시느라 수고한다며 정관계인사들이 준 ‘떡값’을 모은 것이고, 나머지 6억에 대해 뇌물죄를 적용 기소했다. 야당은 축소 수사라고 비판했지만 야당의 공천헌금비리문제가 터지면서 장 실장 사건은 정치적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15대 총선을 코앞에 두고 터진 장 실장 사건은 정부와 여당에게는 선거에는 '악재'였지만 YS의 신속한 대처로 악영향을 최소화하고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사실 청와대 부속실장 사건은 정치 권력자들의 최측근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이며 몸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사건이다. “권력은 권력자로부터 거리에 반비례 한다”는 것은 일종의 ‘권력의 일반법칙’이다. 대통령집무실에서 멀어질수록 권력이 약해진다는 말이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신다는 것 하나 만으로 문고리 측근과 대통령비서실장과 수석들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생겨난다. 그래서 대통령과 멀리 떨어져 있는 (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없는) 장관들은 수석의 권력에 미치지 못한다. 수석들의 장관과 부처에 대한 장악력이 생겨난다. 장관들은 수석의 지휘를 받으며 정치적 의미가 큰 정책사안일수록, 그리고 소신 없는 장관일수록, 청와대의 눈치를 살핀다. 그래서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정책의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장관들은 자신에게 올지도 모를 정책결정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어찌 하오리까”식으로 그 결정을 청와대로 떠넘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정치만이 아니라 기업이나 직장, 단체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모든 권력의 속성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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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둥댄 한보사태 처리 … ‘한진해운 사태’와 닮았다

 1997년 1월 23일 노동계 총파업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을 때 나라를 뒤흔드는 대형사건이 터졌다. 5조원의 특혜대출을 받은 대재벌기업인 한보철강이 부도가 난 것이다. 한보사태는 정경유착의 대규모 권력형 대출비리사건이었다. 한보사태로 한보관련 하청 중소기업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대기업 연쇄부도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국민은 혼란에 빠졌고 경제당국도 손을 쓰지 못했다. 그 정치권은 초토화 되었다. 결국 한보사태는 삼미, 삼립, 대농, 진로, 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부도로 이어졌고 한국경제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고 더 큰 금융위기를 불러와 결국은 나라를 환란의 위기에 빠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한마디로 한보사태로 나라가 풍비박산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한보를 최종적으로 부도처리하기로 결정을 내린 이석채 경제수석과 경제당국은 과연 한보가 몰고 올 정치경제적 파장을 종합적으로 예상하고 그에 대한 충분한 대책을 준비하고 내린 결정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당시 YS는 한보사태에 대한 사전준비부족과 부도후 처리과정의 미숙함에 대해 분노하며 경제수석을 질타했다. 

 최근에 발생한 한진해운 부도처리가 국내외에 일으키고 있는 경제적 파장에 대해 허둥지둥 대는 모습이 20년 전 한보 때와 판박이다. 한보사태는 설 연휴와 겹치면서 국민 불안으로 이어졌고 민심이반이 일어나면서 국민은 문민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번 추석 연휴와 겹쳐 대우조선과 한진해운 사태가 우리경제의 앞날에 대한 국민적 불안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되는 대목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경제는 또 무슨 일이 터지는 것은 아닌지 앞날이 불안 불안하기만 하다. 

 

‘깃털’ ‘몸통’ 논란에 ‘비서실 기강 해이’까지

 한보부도처리 이후 특혜대출에 대한 검찰조사 과정에서 몇몇 은행장들과 YS가 그토록 믿었던 민주계 정치인들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아끼는 홍인길 의원의 이름도 나왔다. 야당과 언론은 당시 홍인길 의원이 한 ‘깃털’ 발언으로 한보사태의 ‘몸통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당시 홍 의원은 자신을 권력실세라고 하는 언론에 대해 자신의 평소 지론인 “권력이란 허무한 거다. 정치라는 게 권력에서 손 놓으면 날아가는 깃털과 같다”는 취지로 청와대를 떠난 지금 “자신은 무게가 없어 깃털보다 가볍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그의 말을 “나는 깃털이고 몸통은 따로 있다”라는 말로 받아썼다. 언론과 야당은 대통령 차남 김현철을 한보대출비리의 몸통으로 지목하고 각종의혹을 제기하며 국정농단을 문제 삼아 물고 늘어졌다. 야당은 국정을 마비상태로 몰아갔다. 정부도 손을 놓았고 국정은 표류하고 있었다. 언론은 물 만난 고기가 되어 되는 말 안 되는 말을 마구잡이로 써댔고 청와대는 대언론 기피증에 걸리다 시피 했다. 

 YS는 부끄럽고 개탄스러운 일이나 썩은 것은 도려내고 가자며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자고 했다.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이 두려울 정도라며 “가장 가까이 있는 수석들이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며 “나라를 구한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자성론이 터져 나왔다. 노동법이나 한보사태는 일부수석실의 독단적인 판단과 행동이 화를 불렀다는 비판론과 함께 수석실간의 갈등이 일었다. 비서실장의 영(令)이 안서고, 실장과 사전협의 없는 수석들의 대통령 직보와 일부 수석 간 비밀회동과 정보공유차단, 대언론 정보 유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청와대가 대통령을 보좌하며 국정을 관리하기 보다는 관계부처이익을 대변하는 ‘앞잡이’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성토가 꼬리를 물었다. YS는 심기일전을 위해 비서실을 개편하고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문제가 된 정무, 경제수석 등을 경질했다.  

 

YS “재임기간 중 가장 괴롭고 고독한 시간”

  노동법과 한보사태를 당하여 YS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YS는 아들의 허물은 곧 자신의 허물이라며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YS에게 차남은 혈육 이상의 험난한 민주화의 길을 같이 걸었던 정치적 동지에 가까웠다. 주요한 정치적 사안이나 인사 등에 대해 YS는 차남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15대 총선에서 공천이나 선거전략 수립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야당은 4월 한 달 동안 한보청문회를 열고 차남과 홍수석 등 정관계인사들을 증언대에 세웠다. 청문회는 차남의 국정농단에 대한 성토장이 되었다. 야당은 대선을 의식 각종 ‘의혹설’을 만들어 유포하며 한보사태를 즐기고 있었다. 여당은 당내에 잠복해 있던 민정계와 민주계간의 갈등이 터지면서 차남을 YS로부터 격리시키며 YS를 흔들었다. 한보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우리경제에 대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지 등 후속조치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YS는 정치적 기반이 분열되고 흔들리면서 힘을 잃기 시작했다. 나라경제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결국 야당의 정치공세와 여당의 묵시적 압박, 그리고 여론에 굴복한 YS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속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1997년 5월 차남의 구속을 검찰에 지시했다. 차남은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 한보관련 혐의가 없어 구속이 안 된다는 검찰에게 YS는 “혐의를 만들어서 라도 구속시키라”고 다그쳤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검찰은 결국 한보와는 무관한 1992년 대선자금과 관련한 사항을 문제 삼아 차남을 구속했다. 이로서 YS는 차남마저 잃게 되었다.  

 노동법과 한보 사태의 와중에 불거진 차남문제로 여야의 정치공세와 성난 여론에 시달렸던 YS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었다. YS는 당시를 “도저히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 계속되었다”고 회고하며 “나의 재임기간 중 가장 괴롭고 고독한 시간들 이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당시 청와대 내에서는 YS가 국정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경제는 요동치고 있었고 여야는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나라는 마치 태풍이 휘몰아치는 검은 밤 거센 파도를 맞으며 표류하는 ‘선장 없는 배’가 되어가고 있었다. 1997년의 잔인한 봄날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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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09월22일 17시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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