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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4) 표만 쫓는 그들에게 나라는 없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10월04일 16시42분
  • 최종수정 2016년10월05일 06시58분

작성자

  • 최양부
  •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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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렇게 2017년이 오는 것이 겁이 난다 

 한국경제는 벌써 몇 년째 2%대 저성장을 하며 경기침체를 겪고 있고, 수출은 감소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청년실업은 10%대에 달하고 있다. 2015년 8월 앞으로 3-4년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는 우리 경제를 회생시킬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게 4대 (노동, 금융, 공공, 교육) 구조개혁입법을 통과시켜줄 것을 국회에 호소했다. 그러나 야당은 국회선진화법을 앞세워 개혁입법의 국회 본회의 상정마저 막았고 지난 4월 국회가 여소야대로 바뀌면서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이제 4대개혁입법은 실종위기에 처했다. 

 개혁입법이 좌절되자 정부는 우회적으로 가능한 개혁으로 공공부분에 대한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도입을 추진했다. 이에 반발해온 공공부문 노조가 총파업을 선언하며 공공부문 노동개혁을 가로막고 나섰다.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귀족노조들이 성과연봉제절차상의 문제와 쉬운 해고를 이유로 자신들의 철밥통 사수에 나선 것이다. 9월 23일 금융노조의 파업을 시작으로 27일 공공운수노조, 28일 보건의료노조, 29일 공사 공단노조 공공연맹 등 줄 파업이 예정되어있다. 때맞추어 26일에는 현대차노조가 임금인상을 이유로 전면파업에 나섰고 기아, 삼성차도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대우조선해양과 한진해운사태 해결 지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여야 정치권은 이미 내년 대선을 의식한 정치싸움을 서슴지 않고 있다. 만에 하나 대우조선해양과 한진해운사태수습과 노동계 파업이 장기화되어 내년으로 이어지고 대선을 의식한 정치권과 대선주자들이 눈치를 살피다가 기회를 보아 개입하고 나선다면, 그리고 고위공직자들이 여야와 청와대의 눈치를 살피며 시간을 끌며 사태해결을 위한 정책결정을 미룬다면, 정말 20년 전의 상황이 재현될 수도 있다. 이렇게 2017년을 오는 것이  겁이 난다.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그러다가 기아사태와 같은 또 다른 대형 사건이라도 터지면 날이면 나라도 경제도 치유가 어려운 치명상을 입게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 경제는 정말 하루하루가 살얼음 판위를 걷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1997년 여름, 그 때 그들이 기아사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5년마다 도지는 관료사회의 ‘5년차 병’

 1997년 7월 21일 이회창 대표가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결정되면서 천하는 이 후보와 DIP, 그리고 청와대의 YS로 3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인제 후보까지 등장하면서 그야말로 4분5열의 시대가 열렸다. 국민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YS의 말보다 이 후보나 DJ의 말을 더 믿었고 관료들도 청와대 보다는 떠오르는 실세들의 눈치를 더 살폈다. 

 시간에 비례하여 대통령 임기 말년이 되면 대통령과 청와대는 권위를 잃고 빛을 잃어간다. ‘승진의 맛’으로 사는 관료들은 제대 말년 정부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끊어지면 면종복배(面從腹背)하고 후언(面從後言)한다. 지는 권력보다는 떠오르는 권력을 잘 잡아야 자신들의 승진을 위한 미래가 열리기 때문이다. 여야 대선후보가 정해지면 자신들의 미래를 건 움직임이 심해진다. 관료사회는 시간 가면 떠나갈 정부와 이별 준비를 한다. 그리고 여야 대선 후보 진영과 은밀한 거래들을 시작한다. 정부 내의 고급정책정보들을 여야진영에 제보한다. 기회주의와 몸보신, 줄서기, 등 5년마다 도지는 관료사회의 ‘5년차 병’이 번져 나가면서 5년마다 관료사회는 마치 주인 없는 집단이 되어 각자도생(各自圖生)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그렇게 되는 것이 5년 단임 대통령과 정부의 운명이고 이를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 임기 5년차 대통령과 청와대의 숙명이다. 이런 관료사회의 5년차 병과 기아사태에 대한 정부의 일관성 없는 그리고  늦장대응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 

 

 ‘기아살리기’ vs ‘나라(경제)살리기’

 새롭게 빛을 발하는 여야 대선후보들 앞에 놓인 우리 현실은 무너지고 있는 한국경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기아사태에서 나라와 경제보다는 표를 보았다. 

 한보부도(1.23)에 대한 처리가 늦어지면서 삼미(3.20), 진로(4.18), 대농(5.20), 한신공영(6.2)등 대기업의 연쇄부도로 이어졌고 7월 15일 기아부도가 발생했다. 동남아시아의 금융시장도 흔들리고 있었다. 7월 2일에는 태국 바트화가, 8월 14일 인도네시아 루피아가 폭락하면서 아시아 금융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한국 금융시장도 한보, 삼보부도이후 급격히 얼어붙기 시작했고 세계는 한국경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아사태의 처리를 주시했다. 시중에서는 이미 ‘금융위기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10조원을 넘은 부채를 안고 있는 기아부도는 그야말로 우리경제에는 핵폭탄이 터진 것과  같았다. 더군다나 종업원 56,700여명, 38개 계열사와 1만 7천여 협력업체의 직원과 가족을 포함하면 수십만 명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다. 

 기아사태는 신한국당의 대선후보경선이란 정치일정과 겹치면서 정부와 청와대는 해법 찾기로 수습의 시기를 놓치고 있었다. 제때 수습을 하지 못하면 ‘금융대란’이 올수도 있다는 경고도 있었지만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기아부도처리의 정치적 파장이 너무 커 정부도 선뜻 결론을 내리지 했다. 그래서 정부의 신속한 초기대응 실패가 사태를 키웠다는 지역이 많이 나온다.  정부와 청와대간, 수석실갈 정치적 해법이냐 경제적 해법이냐를 놓고 갈등만 깊어졌다.  수석회의 자리에서 YS는 공무원들의 느슨해진 복무 자세를 언급하면서 “수석들이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을 가지고 챙기라”는 당부했지만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부와 청와대는 8월 초에 들어서야 기아사태를 경제논리로 처리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강경식 부총리가 기아를 삼성에 갖다 바치려한다”는 “제3자 인수설”이 터져 나오고 이 때문에 정부가 기아사태처리에 늦장대응하고 있다는 음모설이 퍼지면서 기아문제는 정치화의 길로 들어서며 더욱 꼬였다. 기아 측에서는 기아사태발생이전인 1997년 3월경부터 삼성의 기아인수 작전이 있었고 이 때문에 기아가 부도사태를 겪게 되었다는 음모설을 유포했다. 청와대는 3자인수는 절대 없을 수 없다고 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믿었다. 기아사태가 갈피를 못 잡고 표류하면서 이러다 한국경제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왔다. 기아사태의 와중에 쌍방울(10.15)과 해태(11.1)가 부도를 맞았다. .     

 기아에 대한 부도유예협약이 발표되자 기아노조는 “정부와 삼성의 밀약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정치적 음로론을 제기하며 '기아살리기'에 나섰다. 당시 기아노조는 민주노총의 ‘핵심 강성노조’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1996년 1월 노동법 날치기에 항의하는 총파업을 주도하면서 기아노조는 강성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노조는 제3자 인수는 있을 수 없다며 고용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기아를 살려야 한다고 했다. 노동조합은 '기아살리기'라는 이름으로 1000억원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8월 9일일까지 600억원을 모금했다고 한다.  

 당시 기아는 김선홍 회장과 노조가 사실상 회사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노조는 김 회장 등 경영진들의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기 보다는 공생을 위한 정치적 해법 찾기에 나섰다. 자신들은 노동자로서가 아니가 주주로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김 회장과 기아 노조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모범적인 국민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억지논리’를 만들어 언론 광고 등을 통해 대대적인 대 국민 홍보전에 나섰다. 

 기아노조는 당시 기아주식의 9.4%를 포드가 가지고 있었고, 7.5%를 포드가 지배하는 일본 마쓰다가 소유하고 있어 기아의 최대주주는 포드였다는 현실을 왜곡하고 노동자들로 구성된 우리 사주조합을 통해 기아주식의 13.8%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며 ‘모범적인 국민기업이미지’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대선정국을 활용한 김 회장과 노조의 “기아살리기운동”은 성공적으로 시민단체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급기야 60여 재야시민단체들이 참여한 ‘기아살리기범국민운동연합’이 발족하고 기아사태를 경제적으로 해결하려는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모두가 나라경제 살리기보다는 기아살리기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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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만 쫓는 그들에게 나라는 없다”   

 8월 중순이 되면서 사태추이를 관망하던 이 후보와 DJ는 노조 표를 의식 경쟁하듯 기아공장을 방문하고 “기아를 국민기업으로 살리겠다”며 기아사태를 대선 판에 끌어들였다. 사태는 기아와 노조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었다. 자녀들의 병역특혜문제가 불거지면서 국민지지도가 급락하자 이 후보는 당황하며 국민적 관심사가 된 기아문제에 뛰어들었다. DJ와 국민회의도 눈치를 살피다가 기아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정부를 항의 방문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의 기아지원을 촉구하고, 기아 공장을 방문 노조대표와 면담하고 기아살리기를 약속했다. 대권후보의 지원사격을 받은 기아는 대국민홍보에 더욱 열을 올렸다. 정부의 기아에 대한 법적조치에 제동이 걸렸고 기아사태는 더욱 악화일로에 빠졌다. 정치권의 지지를 받은 기아는 정부를 사태해결방안에 저항하며 비협조로 시간 끌기에 나섰다.  

 검찰수사로 5조원이 넘는 분식회계와 임직원들의 비리, 과도한 단기차입과 문어발식 기업 확장 등 경영실패가 들어나면서 10월 22일에 가서야 정부는 기아사태 수습방안으로 법정관리를 최종결정했다. 

 기아사태는 거의 3개월여 동안 우리 경제를 극도의 혼란에 빠트리고 국정의 발목을 잡았다. 기아사태를 주시하던 외국자본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금융기관에 대한 국제신용도가 추락하면서 외화차입이 어려워지고 달러화에 대한 원화가 치솟으며 외환 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아사태는 결국 ‘환란’을 불러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기아사태의 정치화에 큰 역할을 하고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큰 몫을 담당한 이 후보는 낙선했고, DJ는 대통령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그들의 기아사태악화에 대한 책임에는 정치적 면죄부가 주어졌다. 모든 책임은 YS의 무능과 YS정부의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1998년 5월 기아차를 살리겠다던 DJ는 결국 김선홍 회장을 “회사 돈을 빼돌려 기아자동차 주식을 매입하고 부도직후 비자금 180억을 조성해 기아그룹의 제3자 인수를 막기 위해 정관계의 로비자금으로 사용한 혐의”로 구속했다. 김 회장은 분식회계혐의(횡령 등)만 적용받아 4년형을 선고 받았고 2년을 복역한 뒤 2000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0월 19일 기아차는 결국 국제 경쟁 입찰을 통해 현대차에 인수되면서 기아사태는 막을 내렸다.  

 YS는 그의 회고록에서 기아사태를 6페이지를 할애 소상하게 기록하면서 말미에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돌이켜 보건데 기아사태는 비리은폐에만 급급한 부도덕한 경영진과 강성노조의 집단이기주의, 국가경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표만 의식한 김대중, 이회창 등 대권주자들의 무분별한 개입, 권력 지향적 시민단체와 언론들의 가세로 그 처리가 지연되었으며, 임기 말 대선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신속하게 원칙대로 처리 한다’는 정부의 논리는 설자리가 없었다.” 표만 쫓는 그들에게는 나라도 경제도 없었다는 것이다. 결과는 나라도 경제도 기아도 살리지 못했고 나라와 국민에게 혹독한 고통만 남겼다. 

 

“타이밍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

 1997년의 기아사태는 “타이밍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 교훈을 남기고 있다. 경제문제를 경제원칙에 따라 제때 신속하게 해결 짓지 못하고 문제해결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면 사태는 악화될 뿐이고 이로 인해 모든 피해는 나라와 경제와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통령 임기 말 5년차에 대형사고가 터질 경우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되며 특히 여야 대선후보들이 정치적으로 개입할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비판만 하는 무책임한 야당만을 탓할 수는 없다. 여당과 청와대와 정부를 분리시켜 갈등을 조장하고, 대통령을 무능하게 만들고 정부를 실패하게 만들어 국정을 혼란시키는 것이 정권교체를 목표로 하는 야당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선 전략이고 전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당의 경우는 다르다. 만의 하나 야당과 같이 대통령과 청와대와 차별화를 위해 대통령과 청와대와 정부를 무능하게 하고 실패한 것으로 만드는데 동조할 경우 그 결과는 여권의 무능과 실패로 귀결되고 정권을 내 노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실패는 여권과 보수진영의 실패로 이어지고 이는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와 여권과 보수진영은 1997년의 기아사태가 남긴 정치적 교훈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우조선해양과 한진해운사태, 성과연봉제, 그리고 최근에 새롭게 떠오른 지진과 원전안전에 대한 국민 불신문제 등등의 문제해결의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특히 정치적 의혹이나 음모론이 발생하지 않도록 투명한 처리에 나서야 한다.  

 임기 말 대형사고의 발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과 청와대는 위기관리에 힘써야 하며, 만에 하나 대형사고가 발생한 경우는 청와대가 전면에 나서서 콘트롤 타워로서 신속하게 사태를 장악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등 정책조정기능을 다 해야 한다. 정부의 신속 정확한 대응이 필요하지만 관료들이 여야 대권후보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신속대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 역할은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하며 국정운영을 책임지고 관리해 나갈 청와대 수석들 밖에는 없다. 임기 말을 같이 하는 수석들은 대통령을 위해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하는 ‘순장조(殉葬組)’의 명예를 거역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 날 까지 대통령을 욕되지 않게 보좌해야할 책임과 의무를 가진 사람들은 결국 수석들 밖에는 없다. 1997년 당시 대통령 곁을 지키는 수석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 회한만 가슴에 서린다.    

 결국 임기 5년차를 맞이하면서 레임덕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는 숙명적으로 찾아오는 레임덕을 거부하고 오는 것을 막는데 힘쓰기 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최선의 방안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레임덕은 시간 같아 막는 다고 안 오는 것이 아니다. 청와대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역사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으로 국정관리에 최선을 다하면서 아름답게 권력을 내려놓는 준비를 하면서 레임덕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돌이켜 보면 기아사태가 1997년 나라경제를 환란에 빠뜨리고 정권교체를 가져온 주범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다. 기아사태라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 진행된 이회창과 DJP, 이인제, 그리고 YS간의 치열한 대선전쟁과 금융개혁을 거부한 금융귀족들이 나라를 파국으로 모는 또 다른 요인들이 되었기 때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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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0월04일 16시42분
  • 최종수정 2016년10월05일 06시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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