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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5) 전설이 된 DJ의 ‘이길 수 없는 선거를 이기는 법’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10월13일 17시33분
  • 최종수정 2016년10월13일 20시49분

작성자

  • 최양부
  •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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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전설이 된 1997년 대선전쟁

 1997년의 대선은 우리 정치의 전설로 남아있다. 정치전문가들은 1997년 대선을 연구대상의 정치교과서라 부른다. ‘이길 수 없는 선거를 이기는 법’의 진수를 보여준 DJ와 ‘질 수 없는 선거를 지는 법’의 산 교과서가 된 ‘창(이회창)’이 보여준 선거 전략과 전술은 하나의 정치교본이라는 것이다. 당시 DJP연합은 39만 표 차이로 어렵게 ‘창’을 이겼다. ‘제(이인제)’가 얻은 492만 5000표는 사실 “역사적이라는 DJP연합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표” 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돌이켜 볼수록 “그 때 ‘창’이 그렇게만 하지 않았어도...이렇게만 했어도 이겼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곳곳에 남아있다. 어떻게 보면 15대 대선은 ‘창’이 스스로 자멸한 선거다. DJ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창’이 자멸하도록 선거판을 이끌어 간 것이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15대 대선은 “무엇보다도 오늘의 정치현장에서 배울 점이 너무 많은...‘정치교과서’에 실릴 만한 연구대상이 무수하게 널려있는 선거”라고 평가했다. 2017년을 준비하고 있는 여야 대선 잠룡들과 참모들, 특히 집권여당과 보수진영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지금 돌아가고 있는 정치판이 20년 전의 1997년을 너무 많이 닮아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1997년 대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DJ의 ‘디스공격’은 1997년 대선의 최대 히트작   

 요즘 젊은이들의 노래로 자리를 잡은 힙합의 한 장르를 지칭하는 말로 ‘디스(diss)’ 가 있다. 영어의 ‘disrespect‘의 줄인 말로 상대를 경멸하거나 상대의 비밀을 폭로하거나 모욕을 주며 상대를 깎아내리는 공격적 행동 등을 음악적으로 풍자하면서 랩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직설적인 표현에서부터 은유적이거나 비유적인 내용을 담거나 때로는 과장하거나 사실이 아닌 의혹을 랩으로 쏟아내기도 한다. 힙합에서 디스는 하나의 배틀 형식으로 경쟁하는 두 사람이 서로상대방에 대해 디스공격을 한다. 디스공격 배틀을 이어가지 못하면 패한다. 자기스스로의 결점 등을 드러내는 자학적이거나 성찰적인 ’셀프디스‘도 있고 꿈과 희망, 각오를 다지는 ’착한(좋은) 디스‘도 있다.  

 생각해 보면 디스 배틀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도 아닌 것 같다. 우리 정치판의 어른들에게  디스 배틀은 관행이기 때문이다. 특히 선거 때만 되면, 선거가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세상은 온통 ‘디스’가 난무한다. 특히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각종 폭로와 의혹제기, 각종 루머와 마타도어, 흑색선전, 정치공작 등등이 그것들이다. 정치판의 디스는 일종의 ‘노이지 마케팅’ 역할도 한다. 2016년 가을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도 크게 보면 내년으로 다가온 대선을 겨냥한 여야 간 디스 배틀 이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대선에서도 결국은 ‘창’과 DJP연합이 벌린 디스베틀에서 DJP연합이 승리하면서 DJ가 대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특히 DJ가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구사 ‘제’를 끌어내어 ‘창’과 싸움을 시키고, YS와 ‘창’을 이간질 시키고, YS에 대한 의혹을 일으키고, JP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집권여당과 보수진영을 사분오열시켜 자중지란에 빠지게 한 디스공격과 정치공작은 1997년 대선의 최대 성공작이었다. DJ는 ‘병풍’이란 이름의 디스공격 한방으로 YS와 ‘창’, ‘제’, 그리고 JP를 엮는 보수대연합을 깨부수고 보수진영 전체를 풍비박산시켜 스스로 자멸하도록 정치판을 뒤집고 결국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병풍’이란 ‘DJ의 디스공격 한방’   

 한보사태와 기아사태로 경제가 흔들리는 속에서도 신한국당의 ‘창’에 대한 국민지지는 꺾일 줄 몰랐다. 그가 보여준 ‘대쪽판사’이미지는 여전히 빛을 발했다. 특히 YS라는 거대 권력에 저항하는 그의 모습에 YS의 거침없는 문민개혁(공직자 재산등록, 금융실명제, 하나회척결, 역사바로세우기 등)에 당하고 말 한마디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TK들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97년 7월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들에서 ‘창’에 대한 국민지지도는 40-50%대를 기록했다. 그러나 DJ는 정말 아무리 용을 써도 20%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극약처방이 필요했다. DJ는 ‘창’이 후보로 확정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7월 중하순 ‘창’에 대한 디스공격의 칼을 뽑아들었다. 우리나라 대선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디스공격’이라고 부르는 ‘창’의 두 아들의 병역기피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세상은 그 놀라운 위력 때문에 이 디스공격을 ‘병풍(兵風)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창’의 장남과 차남이 병무청 징병검사에서는 1급 판정을 받았다가 입영 전 정밀신체검사에서 체중미달로 5급 면제판정을 받고 귀향처리된 것에는 무엇인가 권력형 비리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요즈음 미르니 K-sport니 하며 의혹을 제기하는 것과 흡사하다. 확증은 없고 심증만 있었다.

 야당은 국회를 중심으로 국방부에 자료를 요청하며 각종의혹을 반복적으로 제기했다. 국방부는 두 아들 병적기록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부실하게 작성된 병적기록부는 의혹을 해소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부추겼다. 그 탓에 ‘병적기록부 변조설’이란 새로운 의혹이 만들어졌고 두 아들 징집면제판정에 대한 세상의 의혹은 심증이 확증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사실 병풍디스는 조직적인 ‘창’ 흠집 내기였다. ‘창’이 대쪽같이 두 아들에 대한 의혹을 처리했다면 해결될 수도 있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 의혹이 일어난 것 자체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관련자료 제출하거나 관계기관에 모든 의혹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신속한 조사나 수사를 의뢰했어야 했다. 

 그러나 창은 그렀게 하지 않았다. 대쪽판사가 자식문제 앞에서 우물쭈물했다.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국민적 의심을 키웠고 ‘창’의 두 아들 문제는 우리 국민정서에 가장 예민한 ‘권력형 병역비리’로 굳어졌다. ‘창’의 도덕성과 참신성은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대쪽이미지도 박살이 났다. 선거 막판까지도 병풍디스에 대해 ‘창’측은 적극적인 해명을 내놓지 못했고 수세에 몰렸다. DJ의 병풍디스 한방으로 ‘창’의 지지율은 15%대로 곤두박질쳤고 대선 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병풍디스는 ‘창’의 지지율 추락으로만 그치지 않고 신한국당을 내부분열로 내모는 촉매제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DJ의 병풍디스 공격 한방은 결과적으로 선거판을 ‘창’중심에서 DJ 중심으로 바꾸는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DJ에게는 ‘이길 수 없는 선거를 이기는 길’로 이끄는 ‘신의 한수’ 가되었다. ‘DJ의 한방’은 한국정치의 전설이 되었고, DNA가 되어 여야당을 가리지 않고 모두들 선거 때만 되면 ‘DJ의 한방 찾기’에 혈안이 된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2017년을 준비하는 잠룡들 가운데는 모든 채널을 동원하여 예상되는 상대방 후보와 친인척, 측근들의 ‘비리의혹 캐기’에 벌써부터 동분서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선잠룡들은 우선 자신과 가족, 친인척, 측근들이 의혹을 살만한 일이 없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검증부터 끝내고 전쟁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들썩이는 이인제’, 왜 보고만 있는가? 

 8월 말이 되어도 한번 떨어진 ‘창’의 지지율이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후보경선에서 2위로 탈락한 ‘제’의 인기가 갑작스럽게 치솟았고 ‘창’의 지지율을 넘어섰다. 신한국당 일각에서는 ‘후보 교체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들이 ‘제’가 나설 경우 DJ를 이길 수도 있다는 여론조사결과까지 내놓자 ‘이인제 독자출마설’이 고개를 들었다. DJ의 한방은 무서운 파괴력으로 신한국당을 초토화 시켰다. 당시 이러한 여론조사결과들은 왜곡된 것으로 ‘제’의 독자출마를 끌어내기 위한 DJ를 지지하는 언론들이 앞장선 작전이었다는 ‘설’도 있다. 선거

때가 되면 난무하는 선거여론조사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보아야 하는 이유다. 선거철만 되면 알 수 없는 여론조사들이 난무하는 것은 여론조사가 선거운동전략이 되었기 때문이다. 15대 대선부터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선거 전략의 하나다.   

 8월 27일 YS는 ‘제’를 청와대로 불러 ‘독자출마를 강력히 만류했다’고 그의 회고록에 적고 있다. 그러나 ‘제’는 결국 YS의 만류를 거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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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DJ에게 패한 뒤 경선에 승복하고 그가 DJ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던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경선불복종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짓밟는 일이라며 출마는 안 된다”고 ‘제’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YS는 1971년 대선후보경선에서 DJ에게 패한 후 경선결과에 승복했고 DJ 당선을 위해 선거운동에 나섰다. YS는 언행일치하는 용기 있는 정치인이 되었고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러나 ‘제’는 경선불복으로 우리 정치사에 ‘배반과 배신의 정치인’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YS의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YS의 정치철학을 배우지 못했고 YS에게 깊은 정치적 상처를 남겼다. 대선패배 후 오갈 곳 없게 된 ‘제’는 DJ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자신을 의탁했다.   

 YS는 ‘창’에게도 1992년 대선당시 당을 떠난 박태준 최고위원을 설득하기 위해 광양으로 내려가 하루 종일 기다려 그를 만나 설득했던 일화를 들려주며 “내가 (‘제’를)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앞으로 대통령이 될 사람이 직접 이인제 후보를 집으로 찾아가 만나 설득하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국무총리든 무엇이든 이인제가 원하는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하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고 했다. 그러나 이 후보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끝내 이인제 후보를 찾아가지 않았다”고 당시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창’과 ‘제’가 YS의 조언을 받아드리고 그의 조언대로 실행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YS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특히 ‘창’이 ‘제’를 찾아가 만나 그를 품었더라면, 그리고 당시 방황하며 연대가능성을 타진해온 JP까지 끌어안았더라면 보수진영의 4분 오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 후보는 대권의 꿈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창’은 ‘제’를 만나러 가지 않았을까. ‘제’는 왜 경선불복을 하고 출마에 나섰을까. YS는 이러한 사태에 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을까. 그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박관용 전 의장의 증언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창’를 돕고 있었다. 

 

‘YS와 또 다른 YS의 이중행보?’

 박관용 전 의장은 YS가 회고록에 남긴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그의 회고록에서 들려주고 있다. YS는 자신으로 ‘3김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젊은 피로 신한국의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이인제를 발탁하여 장관과 지사 등을 시켜 정치수업을 쌓도록 했다. 그러나 한보와 기아사태 속에서 터진 차남의 문제 등으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잃게 되면서 정치적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고립무원이 된 YS는 신한국당의 민정계에 밀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된 ‘창’의 대선후보 선출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박 전 의장은 그러나 병풍사건이 터지면서 ‘창’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제’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YS는 상황을 오판하고 ‘제’를 은밀하게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 전 의장은 “보수진영의 ‘창’과 IJ(인제)가 동시출마하면 구도 상 DJ를 도저히 꺾지 못한다는 선거판의 기초중의 기초를 잊었다. ‘천하의 정치 9단 YS’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고 당시를 회고했다. 

 박 전 의장은 “이런 가운데 DJ는 IJ의 중도하차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선거 막판 부산대 유세장에는 IJ를 ‘간접 응원’하기 위해 DJ 지지자들이 총동원되기도 했다. ‘YS의 막후 지원’에다 ‘DJ의 총력 지원’까지 업은 IJ는 당선을 자신, ‘창’쪽의 막판 협상제의를 걷어찼다.”고 적고 있다. 결과적으로 DJ의 디스공격과 정치공작으로 YS와 ‘제’는 상황을 오판하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고 DJ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박 전의장의 회고가 진실이라면 YS회고록에 나오는 YS와 박 전의장이 전하는 ‘또 다른 YS’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YS가 ‘창’과 ‘제’사이에서 이중적인 행보를 했다는 것이 된다. 솔직히 YS를 지근거리에서 4년을 모신 사람으로서 ‘YS는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회고록에 남기는 것과 같은 일을 할 그런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YS가 ‘창’에게 정치선배로서 조언하고, ‘제’를 불러 ‘정치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제’를 설득하고 질타 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YS가 은밀하게 ‘제’를 지원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YS 회고록’과 ‘박관용 회고록’에 나타난 ‘YS와 또 다른 YS의 이중행보’를 더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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