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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6) 정치교범이 된 ‘창(昌)’의 ‘질수 없는 선거를 지는 법’(상)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10월19일 17시42분
  • 최종수정 2016년10월20일 14시40분

작성자

  • 최양부
  •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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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은 “정치적 판단력이 미숙” 

 1997년 15대 대선은 ‘창’과 DJ의 한 판 싸움이었지만 선거가 진행되어가면서 ‘창’과 ‘YS간의 싸움으로 변질되어갔다. 그동안 YS의 권위에 도전하여 인기를 얻은 ‘창’은 TK의 반YS 정서에 기대어 잃어버린 지지율 만회를 위해 이미 고립무원이 되어있는 YS의 권위에 또 다시 도전했다. ‘창’은 지는 해인 현직 대통령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권위마저 무시했다. 

 9월 1일, ‘창’은 1979년 전두환, 노태우 주도로 일어난 ‘12.12군사반란’과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당시 시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하여 제정된 ‘5.18민주화운동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각각 무기형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추진하겠다” 고 언론에 전격 발표했다. ‘창’의 느닷없는 발표는 YS를 자극했다.  YS는 즉각 성명을 내고(9.2) “그럴 계획이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 날 밤 황급히 관저로 찾아온 ‘창’에게 YS는 불쾌감을 표시하고 “사면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임을 상기 시키고,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선거후 임기 중에 한다는 것이 자신의 일관된 방침임을 밝혔다”고 했다. YS는 “선거전 사면은 공정한 선거관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선거판을 전두환 노태우 선거로 변질 시킬 수 있다”며 불가하다고 했다고 당시 자신의 반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YS는  ‘창’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며 “후보교체론까지 대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인제를 비롯한 당내 비주류를 추스르고 끌어안지 못하고 이런 엉뚱한 발상을 해낸 이회창씨의 미숙한 정치적 판단력이 한심스럽기 까지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창’의 참모 중 한 사람이었던 서 상목 전 의원은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사면론은 경상도 표를 모을 수 있다는 참모들의 건의였는데 사전에 청와대와 조율하지 못한 체 급하게 이 후보가 발표했다”고 했다. 그런데 언론보도이후 “YS가 사면은 자기가 하는 건데 건방지다며 노발대발했다”며, “그렇더라도 여당후보인데 YS가 봐 줄 수도 있었지”라고 눈감아주지 않은 YS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냈다. 서 전 의원은 이런 YS의 태도에 대해 “YS가 이 총재를 견제한 거지. 자기한테 인사도 잘 안하고 뻣뻣하니까.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자신을 감옥에 보낼 수도 있다고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설명과는 달리 ‘창’은 오히려 YS를 두려워했고, YS도 ‘창’을 불편해 했다는 것이 당시 청와대와 주변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서 전 의원의 회고를 보면 당시 ‘창’이 YS에 대해 무례하게 행동해 오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사면론은 결국 YS와 ‘창’간의 불신과 갈등만 더욱 증폭시켰다. ‘창’의 YS에 대한 태도는 특히 여권대선주자들이 현직 대통령과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 지에 대해 경계로 삼아야 할 매우 중요한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YS와 ‘창’의 갈등의 불씨가 된 ‘제’   

 YS는 그러나 그의 회고록에서 후보교체론으로 흔들리고 있는 ‘창’의 당내 입지강화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9월 8일 신한국당 주요당직자 76명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하여  “후보 교체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 후보의 당선과 정권재창출을 위해 당 총재직을 이 후보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했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총재직 조기이양은 당내 갈등을 진정시키고 ‘창’의 당내 입지를 확고히 하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창’을 중심으로 당의 단합과 대선 승리를 다짐하던 그날 ‘제’는 경기도 지사직 사퇴를 발표했다. 대선출마를 사실상 선언한 것이다. YS는 9월 11일 자정에 ‘제’와  긴급통화를 갖고 “절대 탈당은 안 된다”며 다시 경선승복을 촉구했고 ‘제’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고 했다. 그러나 ‘제’는 9월 13일 탈당기자회견을 했다. YS는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제’는 YS에게 전화를 걸어 “지지자들의 성화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 없다” 고 변명했고 YS는 화가 치밀어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제’는 YS와 ‘창’간의 불신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근원이 되었다. 특히 ‘창은 YS가 ‘창’을 견제하고 ‘제’를 돕는 다고 YS에 대해 근본적인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고 의혹의 불길은 갈수록 더 세차게 타올랐다.

“김심은 누구 편?”

 마이 웨이를 선언한 ‘제’는 YS 최측근이었던 서석재 의원 등 신한국당내 민주계 의원들을 규합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만들고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결집했던 보수진영은 이제 이회창, 이인제, 김종필과 YS로 사분오열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YS가 적극적으로 나서 ‘제’의 독자출마를 막아야 하는데 무기력하게 사태를 방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창’은 이러한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YS가 암묵적으로 ‘제’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당시 민정수석은 청와대 수석회의 석상에서 YS에게 “민주계를 이렇게 놔두는 것은 각하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이라는 여론이 있다고 직언했다. 민정수석은 또 다른 수석회의에서 “각하 행동이 불분명하다”는 여론이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점과 관련 박관용 전 의장은 “YS가 한마디만 하면 주저앉을 IJ(인제)가 경선 불복자라는 비난도 감수하며 뛰어든 배경은 따질 필요가 없다”며 YS의 ‘이인제 지원설’을 기정사실화하고 YS가 “교사(敎唆)를 넘어 훈수(訓手)한 흔적도 도처에 널려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고록에서 YS는 자신의 약속대로 ‘창’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실천하기 위해 9월 30일 신한국당 전당대회를 열고 ‘창’에게 총재직을 이양하면서 ‘창’을 중심으로 정권 재창출을 역설했다고 적고 있다. ‘제’에게도 독자출마는 안된다며 경선승복을 요청했다고 했다. 그러나 ‘제’를 중심으로 모인 민주계사람들은 지속적으로 “YS의 의중은 이인제에게 있다”는 ‘설’을 유포했고 끊임없이 ‘이회창-이인제 단일화’를 막았다고 박관용 전 의장은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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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정치공작 빛을 발하다  

 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진영의 적전 분열은 결국 DJ중심의 진보진영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보수진영의 사분오열을 고착화시키기 위해 DJ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DJ는 JP와 연대에 속도를 내는 한편 ‘제’의 완주를 위한 정치공작을 강화했다.    

 그렇다면 당시 “김심은 이인제 편”이라고 속삭이며 YS와 ‘창’과 ‘제’사이를 이간질 시켰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박 전 의장은 “DJ의 선거 전략 최우선은 IJ의 완주였다. DJ의 IJ 중도포기 저지시도는 주효했다”고 했다. ‘제’는 DJ가 만들어 놓은 분열의 프레임에 빠져 상황을 오판하면서 ‘창’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의장의 증언처럼 만약 YS가 ‘제’에게 은밀한 지원의 손길을 보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YS도 DJ의 프레임에 빠지는 실수를 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YS는 그의 회고록에서 ‘제’의 행보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당시 심경을 적었다. 그리고 YS는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고립무원이 된 YS를 더 이상 아무도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YS는 자신의 이중적 행보를 이렇게 변명한 것일까, 아니면 지치고 무너져 의욕을 잃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말한 것일까? 

 만일 후자라면 한보-기아사태와 차남의 문제 등으로 지쳐 무너진 YS가 무기력하게 사태를 방임하는 사이 청와대 수석이나 비서관들 가운데 ‘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YS의 암묵적 동의를 암시하며 은밀하게 ‘제’를 지원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은 아니었을까 유추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사실 청와대 내부는 ‘창’을 지지하거나, ‘제’를 지원하는 다른 움직임들로 혼란이 일었다. YS와 청와대, ‘창’과 ‘제’가 갈등과 불신의 늪에 빠져들어 가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단 한 사람 DJ의 공작정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DJ 비자금’ 디스공격에 나선 창

 ‘창’은 DJ와 ‘제’의 협공을 받으며 회복되지 않은 지지율 만회를 위해 DJ 디스공격에 나섰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비밀리에 입수한 ‘DJ 비자금 X파일’을 폭로했다. 이 후보는 3차례에 걸쳐 ‘670억 원의 비자금조성관리’(10.7), ‘10개 기업으로부터 134억 원 비자금 수수’(10.10), ‘가족 친인척 명의 차명계좌 300여개를 이용 378억 원을 분산⦁은닉하고 노태우로부터 200억 원 수수’(10.14) 등 총 1,300여 억 원 규모의 비자금 실체와 증거자료를 제시하고 10월 17일 DJ를 조세포탈 및 뇌물수수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 수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민정수석은 수석회의 석상에서 “한국 정치사에 가장 뜨거운 열흘”이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요약했다. 

 DJ 진영은 초상집이 되었고 지지 세력들은 집단저항의 조짐을 보였다. 반DJ 쪽에서는 엄정한 검찰수사를 촉구했다. 검찰은 여야 정치권과 청와대의 눈치를 보며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충격적인 DJ 비자금 디스공격은 2개월 여 남은 선거판에 떨어진 핵폭탄이었다. DJ만이 아니라 선거판 자체를 날려버리고 대선정국을 파국으로 몰아갈 메가톤 급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DJ와 ‘창’, 검찰 그리고 국민들의 시선이 YS와 청와대로 향했다. 모두들 YS와 청와대를 상대로 사활을 건 치열한 로비전을 펼쳤다. YS는 당시 상황에 대해 ‘창’은 검찰수사를 촉구하며 면담을 요청했고, DJ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면담을 요청해 왔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DJ는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등 모든 가능한 채널을 통해 5차례나 면담을 요청했다고 했다. 청와대는 긴장했고 일거수일투족을 주시 받았으며 내부적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언동을 삼가라는 지시도 있었다. 

 

YS와 DJ의 근본적 차이 

 청와대 수석생활을 시작한 이후 4년 동안 수석들 끼리, 또는 YS와 함께, 한 수많은 회식자리에서 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대한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많이들은 것은 YS와 DJ간에 얽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일화들이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YS는 ‘어려운 것도 쉽게 말하는 사람’이었고, DJ는 ‘쉬운 것도 어렵게 말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YS는 평소 “머리는 빌리면 된다”는 말을 자주해 ‘단순 무식한 바람둥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DJ는 ‘아는 체하는 선생님’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JP도 그의 회고록 ‘소이부답’에서 “YS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는 순발력과 결단의 역량을 보였다. 그의 언어는 직관(直觀)에 근거한 직설적 표현을 보였다. 반면 DJ는 논리와 설득, 꾸준한 축적과 단계를 중시했다. 그의 주도면밀한 언어의 전개는 특출했다.”고 두 사람의 차이를 설명했다. 

 두 사람의 차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대목은 ‘거짓말’에 관한 것이다. YS가 자주 한 말 중의 하나는 “DJ는 ‘입만 열면 거짓말 한다’”는 말이었다. YS는 단순 명료하고 직설적인 만큼 ‘솔직 담백’했고 거짓말을 싫어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마주 앉게 되면 번번이 ‘거짓말 말라’는 YS의 일갈에 DJ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이다”라는 변명으로 상황을 피해갔다고 했다. 그런 DJ를 YS는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JP는 YS에 대한 첫인상을 “고집이 보통이 아닌 인물이구나, 외고집이 쇠심줄같이 세지만 거짓말은 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그의 회고록에 적었다. DJ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총재님(DJ)은 거짓말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맞습니까?’라고 대놓고 물어봤다” 고 했다. 이에 대해 DJ는 “‘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 약속을 못 지킨 적은 있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약속은 깨도 거짓말은 안 한다’는 말이 기묘하고 우스웠다.”고 JP는 적었다. 

 YS와 DJ는 정치자금에 대해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YS는 정치자금을 받으면 액수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그대로 참모에게 주었고 일체의 돈 관리는 참모가 맡았다고 했다. YS 정치자금을 관리했던 홍인길 전 총무수석은 한마디로 YS는 ‘돈을 몰랐다’고 했다. 그가 대통령 취임 후 일성으로 “일체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DJ는 받은 돈은 모두 자신이 보관했으며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참모들에게 꺼내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DJ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모두들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었고 천하의 DJ도 이번에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란 분위기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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