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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삼켜버린 혼군(#1) : 가황후의 꼭두각시 진혜제 사마충(司馬衷) - 국정농단 가황후와 8왕자의 난(上)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11월30일 17시5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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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暗君)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군이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이면서,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이고,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 후한이 망하고 진(晉)나라가 통일하다.

 

후한(AD25-AD220)이 망할 즈음 중국은 조조의 위(魏)나라와 손권의 오나라와 유비의 촉나라로 삼국이 분열되었다. 조조 아들 조비가 AD220년 후한 황제자리를 강제로 빼앗자 다음해(AD221년) 유비가 독립하고 9년 뒤(AD229) 오나라 또한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중국은 사실 상 위, 촉, 오 세 나라의 삼국시대(AD229-AD280)가 열린 것이다. 유비가 세운 촉한은 42년 뒤인 AD263년 위나라 정서장군 등애에게 멸망당함으로써 중국은 위와 오 두 나라의 양립 상태가 되었다. 촉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등애와 종회는 각각 태위와 사도로 승진했지만 교활한 종회가 군권을 장악한 등애를 시기하여 무고로 제거시킨 다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죽었다.(AD264) 결국 촉한을 정벌한 두 공신이 서로 싸우다가 자멸한 셈이 되었다. 정적이 사라진 위나라 조정은 이제 완전히 사마소가 장악하였고 스스로 지위를 진공(晉公)에서 진왕(晉王)으로 올렸다(AD264). 그러나 다음 해에 사마소가 죽자(AD264년 8월9일) 세자 사마염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위나라를 윽박질러 원제(元帝) 조환으로부터 황제자리를 물려받아 진무제가 되었다.(AD264년12월13일) 진나라 무제 사마염은 4년 뒤인 AD279년 대도독 가충의 지휘아래 대군을 내려 보내 오나라의 혼군 손호를 멸망시키고 AD280년 중국을 다시 통일한다.  

    

 

<2> 사마염의 사망(AD290)과 가황후의 국정농단

 

중국을 통일한 진무제 사마염은 AD290년 연초부터 위독하더니 결국 3월 20일 54세를 일기로 죽었다. 황태자 사마충(AD259-AD307)이 31살의 나이로 자리를 이어받아 진혜제(晉惠帝)가 되었지만 진혜제 사마충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병중인 사마염 곁에서 홀로 병 수발을 들던 황후 양지의 아버지 양준이 정치를 완전히 장악했다. 황제 사마충의 부인은 가황후로써 대장군 가충의 딸이었다. 그러나 가황후는 너무 난폭했고 질투가 심해 시아버지 사마염이 한 때 폐위를 하려고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가황후는 심복 환관 동맹과 결탁하여 양준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가황후와 동맹은 형주도독이자 황제의 이복동생인 사마위의 도움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사마위는 이복형제 양주도독 사마윤(이 또한 황제 사마충의 이복동생)와 함께 황제알현을 요청했고(AD291년 2월 20일) 약 보름 뒤(3월 8일) 사마위와 사마윤이 입조하는 것을 계기로 안팎에 계엄조치를 내려 양준을 무고죄로 얽어매고 가택 연금시켜 버린 뒤 사마요와 400군사를 보내 양준의 일족은 물론 장소, 이빈, 단광 무무 등 수 천 명의 양준 무리를 족멸시켰다. 양준이 차지하던 국정 최고자리 태재는 사마황실의 최고 연장자인 사마염의 삼촌인 사마량이 낚아챘다. 양준 축출 쿠테타의 겉면에는 사마량과 사마위가 있었지만 그 깊은 배후는 가황후와 동맹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조종한 것이다. (AD291년 3월8일>

 

 

<3> 가황후와 동맹의 사마량 제거(AD291년 6월12일) :  8왕자 난의 서막

 

태재 사마량이 집권하자 그의 정치는 과거 양준의 정치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민심을 얻기 위해 1000명이 넘는 사람에게 공훈을 수여하여 국고를 바닥냈고 특히 진무제 사마염의 부인 가문인 양씨 대신 진혜제 황후 가씨 친척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가황후의 오빠 가모, 외삼촌 곽창, 남동생 아들 가밀 등이 정치실세가 되었다. 이번 거사에 큰 공을 세운 황족 초왕 사마위나 동안왕 사마요도 만만치 않은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문제는 가황후의 포악함이었다. 가황후는 제일 먼저 눈엣가시와 같은 양태후를 유폐시킨 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서인시켰다. 가황후의 포악함이 날로 더해가자 가황후 폐위를 모의했으나 가씨 실세들의 반발이 걱정되었다. 

 

쿠테타 실력자 중의 하나인 초왕 사마위는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여 가황후 만큼이나 주변의 원성을 높이 사고 있었다. 태재 사마량과 태보 위관이 초왕 사마위의 병권을 빼앗아 배외에게 주려고 사마위를 봉지로 내쫓으려고 시도했다. 크게 반발한 사마위는 참모 공손굉과 기성을 통해 가황후를 움직여 봉지로 가지 않도록 조치했다. 나아가 가황후를 설득하여 이 기회에 사마량과 위관을 몰아내도록 계략을 꾸몄다. 즉, 사마량과 위관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사마량이 그 자리를 차지할 역모를 꾸몄다고 참소했다. 가황후는 황제를 움직여 조서를 내려 “사마량과 위관을 파면하라.” 명령을 내렸다. 사마량을 집으로 보낸 뒤 군사를 보내 사마량의 가택을 포위했다. 사마량의 참모 유준이 ”싸워 볼만 하다.“고 했지만 사마량은 ”나의 붉은 마음을 쪼개어 보여주고 싶다.“고 하며 무력저항을 포기했다. 결국 사마량의 전 가족은 이조의 손에 죽었다.(AD291년 6월 12일) 이 사건이 20년에 걸친 진나라 ‘8왕자의 난(AD290-AD310)’의 첫 서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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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황후와 동참의 사마위 제거(AD291년 6월13일)

 

이제 군권은 사마량에게서 초왕 사마위로 옮겨왔다. 사마위를 잡으려다가 오히려 사마량이 잡힌 꼴이 되고 만 셈이다. 그 이면에 가황후와 동맹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마위의 참모 기성은 사마위에게 가씨의 실세인 가밀과 곽창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위는 망설였다. 사마위와 가씨 세력이 갈등을 내보일 즈음에 황태자(사마휼) 소부(스승)인 장화가 내관 동맹을 불렀다. “가서 가황후에게 말하시오. 초왕 사마위가 두 대신(사마량과 위관)을 죽였으니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천하의 권위가 그에게 쏠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제와 황후는 어찌 편안하시겠소? 그를 서둘러 다스려야 합니다.” 가황후도 같은 생각이었다. 장화와 가황후와 동맹이 나서서 아둔한 황제 사마충을 설득하였다. 황제가 마침내 조서를 내렸다. “초왕 사마위가 조서를 위조했으니 그의 말을 듣지 마라.” 이 조서 한 마디에 초왕 사마위의 모든 병사들이 칼을 놓고 도망쳤다. 군사들이 초왕을 사로잡고는 목을 베었다.(AD291년 6월 13일) 사마위의 참모 공손굉과 기성의 삼족도 이멸되었다. 이것이 진나라 8왕자 난의 제2막이다.

 

 

<5> 가황후 독재정권의 무능함과 곳곳의 반란과 재난(AD292-AD297) 

 

이제 가황후와 동맹의 독재를 막는 가로막는 세력은 모두 제거되었다. 진혜제 사마충은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 또 원로훈구공신들은 이미 진무제 사마염이 죽기 전에 다 죽었으며 사마염의 형제나 종친들 중에 세력을 형성할 만한 자들은 거의 소탕되었다. 이제 가씨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가모가 산기상시 및 시중이 되었고 배외는 시중을 맡았으며 배해는 중서령이 되었고 왕융은 우복야가 되었다. 자치통감의 사마광은 장화의 노력으로 안팎의 정치가 잘 다스려져 큰 문제가 없이 나라가 굴러가는 듯하다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가황후와 동맹 등의 내관들이 전횡이 숨겨져 있었으며 소리 없이 진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유폐된 양황후는 가후의 박대에 못 이겨 곡기를 끊고 버티다가 죽었다.(AD292년 2월1일) 가황후는 양태후의 원혼이 하늘로 올라가 사마염에게 원망할 것이 두려워 시체를 엎어 장례를 치렀다. 우박이 내려 패인 땅의 깊이가 3척이나 된다고 했고(AD293년) 창고에 큰 불이 나서 모든 무기가 불타기도 했다.(AD295) 저족, 강족, 호족의 반란이 끊임없이 변경에서 일어났고(AD296) 관군은 반란군에게 연전연패했다.(이들 반군은 모두 자립하여 5호16국의 뿌리가 된다.) 무능한 왕융과 같은 사람을 국정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는 바람에 정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사도가 되어서 시대의 병폐를 고치기보다는 가무와 유람을 즐기고 탐욕과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며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두장사를 하면서 종자를 가지고 나무를 기를까 걱정이 되어 자두의 씨를 파내고서 팔기도 했다. 사람을 뽑을 때의 질문은 “도교와 유교에 차이가 있는 거요?”라고 물었고 “다르지 않을까요?(將無同)“ 라고 대답하면 합격시켰다고 해서 뽑힌 사람을 ‘세 마디 관리(三語椽)’ 라고 빈정댈 정도였다.(AD297)

 

 

<6> 제1차 가황후 폐출 모의(AD299년 6월)

 

자치통감은 가황후가 매우 음란 포학하였다고 했다. 태의령 정거와 사통했고 길 가는 사내를 납치하여 궁궐로 들이기도 했으며 들킬까 봐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고 했다. 이런 가황후에 대해 가씨 종친마저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실세였던 가모, 배외, 장화가 가황후 폐출을 모의 했다. 그리고 그 후임에 황태자 사마휼의 생모인 사(謝)씨를 세울 계획이었다. 다만 황제 사마충이 반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걱정이었다. 

배외가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가후의 악행이 점점 더 심해지니 그렇다고 마냥 서서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소?” 

 

장화가 배외(가후의 이종사촌)와 가모(사촌오빠)에게 이렇게 제안을 했다. 

 

“그대는 그래도 가황후의 가까운 인척이시니 조신하시도록 설득해 보시지요.” 

 

배외와 가모는 가황후의 생모 곽성군을 찾아가 훈계의 말씀을 드려 달라고 부탁했고 곽성군역시 친 딸 가황후를 찾아가 간곡히 설득해 보았다. 그러나 가후는 어머니 곽성군 말을 듣지 않았으며 잔소리가 많은 사촌오빠 가모를 오히려 배척하며 멀리했다. 가모는 화병으로 죽었다.(AD299년 6월) 진혜제 사마충은 배외를 가모의 후임으로 상서복야에 임명했다. 배외는 강력하게 사양했지만 소용없었다. 다들 임명을 거부했으므로 별로 시킬 사람도 없었지만 꼭 믿는 외척 외에는 시킬 생각도 없었다. 가황후의 가씨와 곽씨(가후의 외가)의 전횡으로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부패는 극치에 달했다. 

 

 

<7> 황태자 사마휼과 가황후의 갈등(AD299년)과 황태자 타살(AD300년 3월)   

 

무능한 황제 사마충의 유일한 아들 황태자 사마휼(AD278년생)이 스무 살이 넘어 태자비를 맞을 때가 되었다. 가황후의 어머니 곽성군은 또 다른 딸 가오와 한수 사이에서 낳은 외손녀를 태자비로 세우기를 원했지만 놀랍게도 생모인 가오와 가황후는 그것을 반대했다. 속으로 황태자를 폐위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가황후의 심복 가밀이 가황후에게 황태자 폐위를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했다. 황태자가 즉위하면 그들의 세상도 순식간에 끝나는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똑똑한 황태자 사마휼이 가황후와 가씨 및 곽씨 일족의 폭정을 매우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황후는 스스로 임신했다고 거짓으로 떠들면서(장차 황태자로 세울 생각) 한수의 아들 한위조를 궁으로 몰래 데려와 키우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이 가황후의 속내를 깨닫기 시작했다. 황태자 사마휼을 폐위시키고 한위조를 황태자로 세워서 차기 정권을 장악한다는 계산임이 분명했다. 황태자 측근들은 태자를 졸라서 가황후를 서둘러 폐위시키도록 주청을 올리라고 재촉했다. 그동안 진나라 정권을 받들고 왔던 대신 장화(사마충의 스승이었다)의 생각이 중요했다. 황태자 측근 유변이 장화에게 은근히 다가와 가황후 폐위모의를 들었냐고 물었다. 장화가 모른 척했다. 유변이 나를 못 믿는 거냐고 장화에게 다그치며 물었다. 그제야 장화가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유변이 대답했다. ”동궁에는 인재가 많습니다. 공께서 명령만 하시면 가황후 폐위는 황문(=환관) 두어 명의 일거리 일 뿐입니다.“ 이 두 사람의 밀담을 누군가 밀고했다. 유변은 음독자살했지만 장화는 죄를 받지 않았다. 장화가 밀고했다는 설이 나오는 이유이다. 

 

황태자 측의 음모를 알아차린 가황후는 황제가 몸이 불편하니 와서 문병하라고 부른 뒤 별실에 황태자를 가두어 버리고는 술을 강제로 마시도록 했다. 그리고 취중에 가황후가 불러 주는 대로 썼다. 

 

”황제폐하는 스스로 끝내십시오. 아니면 제가 들어가 제 손으로 끊겠습니다.“ 

 

가황후가 이 편지를 황제에게 전했고 황제 사마충은 이 편지를 모든 대신들에게 보여 주었다. 조서가 내려졌다.

 

”황태자 사마휼에게 죽음을 내리노라.“ 

 

온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조서의 진위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황태자 사형집행 반대 논의가 일어났다. 가황후와 동맹은 조정의 의논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불안해했다. 일단 황태자를 폐서인하자고 하면서 금용성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황문(환관)을 시켜 황태자와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고 거짓으로 위증하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황후의 잔인함에 분노하면서 가황후를 처단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 중심에는 조왕 사마륜이 있었다. 사마륜은 1차 8왕자의 난 때 죽은 사마량의 동복 동생으로 사마염에게는 삼촌이다. 그러나 사마륜의 간교한 심복 손수는 먼저 가황후를 폐위시킬 것이 아니라 가황후가 먼저 황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을 기다린 뒤 그 다음에 가황후를 폐위시키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자문했다. 그리함으로써 두 강적, 즉 황태자와 가황후를 동시에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조왕 사마륜은 가황후의 액션을 기다렸다. 그리고 황태자 폐위 소문을 은근히 퍼뜨려 가황후 측으로 하여금 초조하게 만들었다. 가후는 내연남 태의령을 시켜 황태자를 독살하려고 했으나 황태자가 들여보낸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러자 황태자 음식공급을 끊어버렸지만 이 또한 궁녀들이 몰래 음식을 넣어주어 실패했다. 결국 화장실에 들어 간 황태자 사마휼을 타살시켜 버렸다.(AD300년 3월)

     

 

<8> 사마륜의 쿠테타와 가황후, 동맹의 처형(AD300년 4월)

 

가황후가 황태자를 죽이자 기다렸던 조왕 사마륜 일당이 일어났다. 먼저 깊은 새벽에 가짜 조서를 만들어 이렇게 명령했다. 

 

“중궁(가황후)과 가밀이 모의하여 나의 태자를 죽였으므로 중궁을 폐위시키며 이 명령을 따르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나 만일 따르지 않으면 삼족을 멸할 것이다.” 

 

가밀을 몰래 소환한 뒤 처형했고 가황후를 체포하기 위해 가황후의 시동생 사마경을 보냈다. 가황후가 조서를 보고 놀랐다. 

 

“아니 조서란 나를 통하여 나가는 것인데 이건 거짓 조서가 아니냐!” 

 

그러면서 누가 일을 일으켰는지 물었다. 사마경이 대답했다. “조왕 사마륜과 양왕 사마융입니다.“ 

 

가황후가 통탄하며 말했다.

 

”개를 묶으려면 목을 묶었어야지 꼬리를 묶어 두었구나.“ 

 

가황후는 유폐되었다가 곧바로 위조된 조서에 의해 독살되었다.(AD300년 4월 9일) 동맹은 그보다 며칠 앞선 4월 5일 가황후가 폐서인되어 금용성에 갇히는 날 유진, 손려 정거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가황후도 곧 독살해버렸다. 사마륜이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가황후와 동맹의 시대는 끝나고 8왕자난의 3막이 열린 것이다. 사마륜은 황제자리를 찬탈하기 위해 신망있는 장화, 배왜, 해계 해결 등과 같은 조정대신의 삼족을 죽여버렸다. 군권을 장악하여 도독중외제군사, 상국 및 시중의 직책을 떠안았으나 사실은 측근 손수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AD301년 사마륜은 황제 사마충을 금용성에 유폐시켜 버리고 강제로 선양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아들 사마과를 황태자로 세웠다.(AD301)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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