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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삼켜버린 혼군(#1) : 가황후의 꼭두각시 진혜제 사마충(司馬衷) - 국정농단 가황후와 8왕자의 난(下)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12월07일 16시22분
  • 최종수정 2016년12월07일 16시33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5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전호에서 계속>

<9> 사마륜이 조카 사마윤을 제거하다.(AD300년8월) 

 

가황후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사마륜은 사지절, 도독중외군사, 상국 및 시중이라는 최고 직책을 떠안고 군림했으나 실제로는 꾀 많고 음험한 중서령 손수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용렬했던 사마륜은 모든 결정을 직접 내리지 못하고 손수에게 의지했어야만 했다. 당장 급한 문제가 유폐된 황제 사마충의 후사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진혜제 사마충의 아들 황태자 사마휼이 장성하여 집권하게 되면 불리하다고 판단한 손수는 사마휼을 죽여 버리라고 해서 이미 가황후 측에게 타살되었다. 황위계승의 적통은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에게 있었으므로 사마장을 황태손으로 삼고 사마륜을 황태손의 스승(황태손태부)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황제 사마충의 동생 회남왕 사마윤(司馬允)이었다. 사마륜이 쿠테타를 일으키기 전에 사마윤을 황태제로 삼아 황권을 이어받기로 서로 약속을 했었는데 논란 끝에 이 약속이 뒤집어진 것이다. 사마윤 측은 사마륜 및 손수 일당의 속셈, 즉 허수아비 황제를 세워 정권을 독점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리고는 병사를 모집하여 대비하였다. 사마륜과 손수 일당도 그런 사마윤의 생각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선수는 먼저 사마륜이 쳤다. 사마윤에게 태위(수상)직을 제의한 것이다. 말이 수상이지 속셈은 사마윤의 병권을 제거하고 내보내자는 목적이었다. 사마윤은 거절했다. 손수는 어사 유기를 보내 사마윤을 불경죄로 탄핵했다. 그러나 탄핵조서는 황제가 내린 것이 아니라 손수가 직접 쓴 가짜였음이 밝혀졌다. 사마윤이 즉각 반발하고서 군사 700명을 이끌고 “조왕(사마륜)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외치며 사마륜의 관청을 포위했다. 사마윤의 정예군사는 사마륜의 군사 1천여 명을 즉각 현장에서 처형했다. 사마륜의 관청 내에서도 사마윤에게 호응하는 군사가 있었다. 전투는 8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전세는 사마윤에게 유리했다. 중서령 진회도 사마윤을 응원할 생각이었다. 친족 간의 내전을 막아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황제에게 “백호번을 내려 보내십시오.”라고 권했다. 그러나 전쟁 중지깃발은 추우번을 내리는 것이지 백호번은 전쟁을 계속하라는 깃발이었다. 진회의 생각은 백호번을 내려 보내 사마윤의 군사를 도와서 사마륜 일당을 제거하려는 생각으로 어리석은 황제 사마충을 우롱한 셈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백호군 기병 400명을 이끌고 장군 복윤이 궁궐을 막 나가려는 참이었는데 시중 여음왕 사마건이 다가와 속삭였다. “부귀함을 경과 함께 하겠습니다.” 황제와 진회의 명령과 달리 사마윤을 제거하라는 말이었다. 복윤이 마침내 사마윤에게 가서 말했다. “황제께서 조서를 내리셔서 회남왕 사마윤을 도우라 군대를 보내셨습니다.” 전혀 의심하지 않은 사마윤이 조서를 받기 위해 말에서 내리는 순간 복윤의 기병이 사마윤을 살해하고 그 가족과 군사를 처형하였다. 사마윤의 반란군이 한 순간 무너졌다.

 

 

<10> 황제가 되는 사마륜(AD301)    

    

강력한 경쟁자 사마윤이 제거되자 사마륜은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내어 거짓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선제(사마의)의 말씀에 사마륜은 일찍이 서궁(황궁)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아버지 사마의의 생각은 형님 사마소와 조카 사마염으로 이어지는 황통이 아니라 사마소 다음에 동생인 사마륜에게로 이어진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시중이자 아첨꾼인 종실 사마위는 유폐된 황제 사마충을 윽박질러 황위를 선양한다는 조서를 쓰게 하여 황제자리를 빼앗았다. 장림은 모든 황궁을 닫아걸고 황군의 진입을 차단하였다. 사마충은 태상황으로 올려 영창궁에 가두었다. 황태손 사마장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사마과를 황태자로 삼았다. 사마륜의 실세측근 손수는 표기장군이 되어 군권을 장악하였고 장림은 위장군이 되어 황제호위 군권을 잡았다. 그리고 손수는 황위에 도전할 우려가 있는 제왕 사마경(황제 사마충의 사촌형), 성도왕 사마영(사마충의 동생) 및 하간왕 사마옹(사마충의 7촌 당숙)의 군사를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을 세 왕의 참모로 심어두었다. 나아가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마경에게는 진동대장군, 사마영에게는 정북대장군의 호칭을 내려주고 각각 군부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11> 사마경의 반란(AD301) : 8왕자 난의 3막

 

그러나 제왕 사마경은 황제자리를 빼앗은 종조부 사마륜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마의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황권은 아버지 사마사와 사마소와 사마염으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특히 중국 통일의 대업은 사마염이 이룬 것이므로 사마륜이 황제가 되는 것은 황위찬탈에 틀림없었다. 사마경은 군사 1만 명을 모았다. 사마륜은 명을 내려 관습이라는 자를 제왕 사마경의 군사(軍司), 즉 참모부장으로 임명해 내려 보내면서 제왕 사마경의 군사모집을 주동한 왕성과 처목을 참수하게 하였다. 격노한 제왕 사마경이 관습을 처형하고 예주자사 하옥과 동애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동시에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과 상산왕 사마예, 그리고 신양공 사마흠에게 편지를 보내 반란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성도왕 사마영은 측근참모 노지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노지는 사마륜을 타도하는 것은 하늘의 순리이므로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자문했다. 사마영은 20만 군사를 일으켜 성도에서 당시 수도 낙양을 향해 동쪽으로 진군했다. 상산왕 사마예도 태원에서 사마경을 지원하기로 했다. 신야공 사마흠은 망서렸다. 조왕 사마륜은 사마흠에게 친숙부인데 제왕 사마경은 사마흠에게 당질이었으므로 가깝기로는 사마륜이 더 가까웠다. 측근 왕수A(王綏)는 가까운 조왕을 택하자고 했다. 그러나 참모 손순이 크게 외쳤다. “조왕은 흉악한 역적이니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이지 어찌 가깝고 먼 것을 따지십니까?” 사마흠이 마침내 사마경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때 양주자사 치륭은 어디에 붙어야 할지 모르고 당황했다. 측근 심복 조유와 우담은 조왕 사마륜이 패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니 먼저 군대를 이끌고 허창으로 직접 가는 것이 상책이고, 그렇지 않으면 군사와 장수를 사마경의 군대로 파견하는 것이 중책이며 적은 군사를 보내 돕는 척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자문했다. 확신이 가지 않은 치륭이 별가 고언에게 묻자 그는 조유가 말하는 하책이 상책이라고 답했다. 치륭이 결정을 내렸다. “ 나는 두 황제(진혜제 사마충과 현재 황제 사마륜)로부터 은총을 입었으니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소.” 곁에 있던 유승이 깜짝 놀라며 치륭에게 물었다. “ 여우처럼 상황을 엿보시다가 장차 큰 변혁이 오게 되면 어떻게 가족을 보전하시겠습니까?” 미적거리고 망설이는 것에 대해 분노한 치륭의 장군과 군사들은 참군 왕수B(王邃)를 받들고 치륭 부자를 살해하여 그 목을 사마경에 보내면서 반란에 동참을 선언하였다. 

 

동쪽에서는 제왕 삼경의 군사가 몰려오고 북쪽에서는 성도왕 사마영의 군사가 몰려오자 사마륜의 군사는 궁지에 몰렸다. 거짓으로 표문을 만들어 사마경에게 보내어 말했다 “어떤 군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용히 봉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겁에 질린 사마륜과 손수는 밤낮으로 엽승제사(비방을 써서 저주로 적을 물리치는 굿)를 올렸으며 전쟁 날짜를 무당에게 물었을 뿐만 아니라 몰래 깃털 옷을 입은 사람을 풀어서 신선(왕교)이라고 칭하게 하면서 ‘사마륜이 오래 재위’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궁궐내부에서 조차 반란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사마륜의 군대는 허물어졌다. 손수, 허초, 사의의 목이 반란군에게 날아갔고 손기, 손필, 사담도 피살되었다. 황제호위 장군인 좌위장군 왕여가 조정 8대신을 꿇어앉히고는 사마륜에게 강제로 다음과 같은 조서를 쓰게 하였다. “ 내가 손수에게 잘못을 저지르도록 방치하여 세 왕에게 노여움을 샀으나 이제 손수를 이미 주살하였다. 다시 태상황(사마충)을 모셔서 복위시킬 것이고 시골로 돌아가 평생 농사만 지을 것이다.” 사마륜은 약속대로 사저로 돌아갔다. 그러나 반란군에 동참한 양왕 사마융은 표문을 올렸다. “ 조왕 사마륜은 흉악한 역적이니 살려둘 수가 없다.” 결국 사마륜과 그 아들 사마과, 사마복, 사마건 등이 모두 주살되었다.(AD301년5월13일) 사마륜이 등용한 모든 관료들은 쫒겨나 조정 모든 부서에는 관리들이 거의 없게 되었다. 8왕자의 난의 3막이 끝났다.   

   

 

<12> 사마경의 폭정과 충신의 경고

 

AD301년 6월 제왕 사마경이 10만 대군과 함께 낙양에 입성했다. 사마경은 당연히 최고위 직인 대사마(군권) 및 9석을 수여받고 성도왕 사마영은 그 아래인 대장군, 그리고 하간왕 사마옹은 시중과 태위직을 얻었다. 상산왕 사마예(司馬乂)는 무군대장군에 봉해졌다. 이번 반란 초기에 망설였던 신야공 사마흠이 봉지로 떠나면서 대사마 사마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도왕 사마영은 황제의 친동생이므로 정치만을 보좌하게 하고 병권을 뺏어야만 후환이 없

 

을 것이요.” 

상산왕 사마예는 성도왕 사마영에게 

 

“천하는 먼저 돌아가신 황제(진무제 사마염)의 대업이므로 당연히 적통인 대왕께서 잡으셔야지 재종형님인 사마경이 잡아서는 안 됩니다.” 

 

최측근 참모 노지 또한 사마영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영웅은 함께 설 수가 없는 법입니다. 건강이 나쁜 생모 성(成)태비를 모신다고 하면서 성도로 물러나 계시다가 사해의 인심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상책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사마영은 노지의 말을 따라  군대를 돌이켜 성도로 돌아가면서 형인 황제 사마충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재종형님 사마경의 공이며 신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사마영의 겸손한 마음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사마영은 사마경 세력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자신의 군사 근거지인 업성(하북 임장현)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그리고 노지의 권유에 따라서 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관 8천개를 마련하여 전사한 사람을 후히 장사지냈으며 죽은 사마륜의 군사 1만 4천명도 잘 매장하도록 도왔다. 

 

대사마 제왕 사마경은 정권을 잡자 바로 교만하고 사치하며 포악해졌다. 시중 혜소가 간곡히 상소했다. 

 

  “주역에 말씀하시기를 살았을 때 망할 수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했습니다.

   (存不忘亡 易之善戒)” 

 

소용없었다. 매일 연회를 즐겼고 황제를 알현하여 조정 일을 돌보지 않았으며 교만하게 조관을 대했고 사람을 고르게 뽑아 쓰지 않고 오로지 아끼는 사람들 하고만 가까이 했다. 남양의 처사 정방이란 자가 황제의 잘못을 꾸짖는 상소를 올렸다.

 

“ 연회에 빠져서 즐기는 일에만 탐닉하니 첫째 잘못이고,

  골육종실과는 터럭의간격도 없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함이 둘째 잘못이고,

  변방의 이민족의 낌새가 범상치 아니한데도 개의치 않으니 세 번째 잘못이며,

  전쟁으로 폐한 백성을 전혀 돌보지 않으니 네 번째 잘못이고,

  공은 있어도 상이 없으니 다섯째 잘못입니다.“ 

 

민정책임자 손혜도 다섯 가지 어려운 일과 네 가지 불가능한 일(五難四不)을 사마경에게 올렸다.

 

 “  천하에는 다섯 가지 어려운 일과 네 가지 불가능한 일이 있습니다.

    예리한 칼날을 들고 일서서는 일과,

    영웅호걸을 불러 모으는 일과,

    장사들과 동고동락하는 것과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기는 것과

    황제를 다시 복위시키는 일이 다섯 가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이 다섯 가지 어려운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네 가지 불가능한 일이 있습니다.

    위대한 명성은 오래 짊어질 수가 없고,

    커다란 공로는 오래 맡을 수가 없으며    

    커다란 권세도 오래 지닐 수가 없고

    커다란 위엄도 오래 머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어려운 일을 행하시면서 그것을 어렵다 생각지 않으시고

    해서는 안 될일을 하시면서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니 

    신 손혜는 걱정이 앞서는 것입니다.

    공을 이룬 다음에는 물러나는 도리를 생각하셔야 하며

    황제와 친한 사람을 두루 높이 등용하시고

    황제와 가까운 사람을 추천하여 장사왕 사마예나 성도왕 사마영에게 중책을 주시여 

    등용시키고 대왕께서는 번국으로 물러나심이 아름다움을 오로지 하는 길입니다.

    지금 높은 자리에 있음이 오히려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잊고서

    오로지 권세와 욕심과 향락에 빠지시고 계시니

    비록 높은 누대와 겹겹이 쌓인 울타리 안에 계신다 해도

    영천이나 양적에 계실 때(이 때 사마경이 매우 어려웠음)보다 

    더 위험한 위치에 계심을 깨닫기 바랍니다.“

     

사마경은 손혜의 말을 무시했다. 손혜는 병을 핑계로 사마경을 떠나버렸다. 다른 충신들도 많이 떠났다. 왕표도 사마경에게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 더 나아간다면 후회할 것이고(進則亢龍有悔)

  물러선다면 질려의 고통에 처할 것(退則据于蒺藜)입니다.“

 

이쯤하고 본인과 여러 왕들이 대충 물러나는 것이 좋다는 뜻이었다.  

장사왕 사마예가 황족을 이간질하는 왕표를 죽여야 한다고 편지를 올렸다. 죽게된 왕표가 유언을 남겼다.

 

“ 내 머리를 대사마(사마경)의 대문에 걸어두어  

  군사들이 제왕을 몰락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

 

 

<13> 사마예의 사마경 제거(AD302년12월) : 8왕자 난의 4막

 

제왕 사마경은 평소에 재당숙 하간왕 사마옹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하간왕의 장사 이함을 징소하여 궁궐로 등용시켰다. 그런데 이함은 사마경의 심복부하 조양 및 양주자사 황보상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정에 들어 온 이함은 거짓조서를 만들어 사마옹에게 보여 주었다. 

“ 사마경을 타도하라. 황제의 명령이다.” 

 

그러면서 평판이 좋은 성도왕 사마영과 연대하기를 사마옹에게 독촉했다. 사마옹이 동조하면서 성도왕 사마영, 신야왕 사마흠, 범양왕 사마효에게 군사를 일으켜 낙양으로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장사왕 사마예는 사마경을 폐출시키고 모든 권한은 성도왕 사마영이 잡는다고 선포했다. 사마경에 대한 반란군의 선봉에는 이함과 장방이 나섰다. 사마영은 참모 노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란군사를 일으키는데 동조했다. 놀란 사마경이 내부회의를 열었다. 상서 왕융과 같은 한 쪽에서는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인데다가 감당할 수 없는 대군이므로 물러나야 옳다고 했고 갈여와 같은 강경론자들은 거짓조서에 의한 반역에 해당하니 토벌해야 한다고 했다. 반대하는 자는 목을 베어야 한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왕융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배탈을 흉내내고서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다.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사마경은 “조서를 위조한 반역이다.”고 했고 사마예와 사마영 측에서는 “사마경이 황위를 찬탈했다.“ 주장했다. 전쟁은 싱겁게 끝났다. 대사마 사마경의 부하 조연이 사마경의 측근 하욱을 살해한 뒤 사마경을 체포해 버린 것이다. 사마경은 곧바로 항복했고 황제 사마충은 풀려났다. 황제 사마충은 사마경을 살려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분노한 사마예는 사마경을 끌고 가서 멋대로 죽여버렸다(AD302년12월). 사마경은 집권 1년 9개월 만에 죽은 셈이다. 이것이 8왕자 난의 4막이다. 사마예는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모든 대소사를 업에 있는 동생 사마영과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세간의 평판은 사마영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14> 사마예 제거(AD304년 월) : 8왕자 난의 5막

 

이제 실권은 사마예에게 있었다. 그러나 사마경 제거의 핵심전략은 원래 사마옹의 참모 이함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이함의 생각은 원래 이랬다. 먼저 사마경과 사마예가 붙으면 약한 사마예가 질 것이고 동시에 사마경도 피폐해 질 것이다. 그런 틈을 타서 사마경을 타도하고 사마영이 집권하게 되면 사마옹이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므로 사마옹의 참모 이함도 득세한다는 계략이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오히려 사마예가 사마경을 처단하면서 정권이 사마영과 사마예에게로 간 것이다. 사마옹에게는 아무런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 닭 쫓던 개 격이 된 셈이다. 특히 이함과 사이가 나쁜 황보상을 사마예가 참군으로 중용하고 그의 형 황보중을 진주자사로 임명한 것이 이함에게 뼈아픈 일이었다. 이함이 황보상-황보중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 먼저 사마옹에게 다가가서는 황보중을 진주자사에서 내직으로 발령한 다음 들어오는 길에 자객을 풀어 죽이자는 계획이었다. 황보중이 그 계획을 알게 되었고 군사를 일으켜 이함을 토벌해야한다고 상소하며 나섰다. 사마예는 황보중의 군사행동을 저지시키는 한편 이함을 하남윤으로 전출시켜 무마하려고 했다. 이함은 징소에 응했으나 황보중은 거부했다. 사마옹이 군사를 풀어서 명을 어긴 황보중을 공격했다. 조정 에서는 이함과 풍손과 변수가 짜고서 사마예 살해계획을 세웠다. 황보상이 그 계획을 사마예에게 알렸다. 사마예는 이함 등 살해음모를 세운 자를 처형했다. 사마옹은 그 처단이 자신에 대한 도발이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사마예를 토벌한다고 선언했다. 사마옹은 사마영을 끌어 들였다. 사마영의 참모 노지는 참전하지 않으면 더욱 평판이 좋아질 것이라며 말렸다. 사마영의 참군 소속도 형제(사마예, 사마영의 두 살 위 형)를 죽이는 것은 다른 한 손을 자르는 것과 같다며 말렸다. 사마영은 노지와 소속의 권고를 듣지 않고 사마예 토벌에 나섰다. 

 

사마영의 군사 20만은 업에서 낙양으로 남하하고 사마옹의 군사 7만은 함곡관에서 낙양으로 동진했다. 낙양에서는 허수아비 황제 사마충과 사마예의 군사 1만이 방어에 나섰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사마옹의 부장 장방이 사마예의 황보상 군사를 격파하고 낙양을 약탈했다. 황제 사마충은 사마영과 사마예의 휴전협정을 중재하려 했다. 사마영은 황보상의 목을 베면 군사를 돌리겠다고 했으나 사마예는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중재가 실패했다. 전쟁에서 사마예는 훌륭히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사마예 또한 황제에게 예를 다해 모셨으므로 군사들의 사기나 민심 또한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마옹의 군사 장방 또한 사마예 토벌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사마옹-사마영의 반란군은 실패하는 것이 확실했다. 이 때 반전이 일어났다. 동해왕이자 황제의 재당숙 어른인 사마월이 갑자기 사마예를 체포하여 가두어 버린 것이다.(AD304년 1월25일) 여러 장수들은 사마예를 추대하기를 원했으나 사마월이 후환을 두려워하여 사마예를 죽이려고 하였다. 황문시랑이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자 사마월도 주춤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장방에게 들어가자 장안으로 후퇴하려던 계획을 돌려 낙양을 급습하여 사마예를 체포하고 불에 구워 죽여 버렸다. 장방의 군사들까지 사마예의 죽음에 눈물 흘렸다고 기록되어있다. 결국 사마예는 집권 1년 2개월 만에 죽음으로 막을 내린 셈이다. 8왕자 난의 5막이 끝났다.   

 

 

<15> 사마영 제거(AD304)와 사마옹의 정권 장악(AD304년 11월)  : 8왕자 난의 6막

 

이제 정권은 사마옹과 사마영이 쥐었다. 사마옹은 사마충의 황태자 사마담을 폐위시키고 사마영을 황태제로 삼을 것을 주장하여 관철했다. 그리고 자신은 태재와 대도독으로써 정치와 군사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마영이 과거의 민심과는 달리 사치하고 오만하며 측근들이 정치를 문란하게 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크게 잃었다. 당연히 동해왕 사마월은 사마영을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마월은 사마영에게 폐위된 황후 양씨와 황태자 사마담을 복원시킴과 동시에 충신 혜소를 징소하여 등용하고 주변에서 소집한 10만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대동하고 사마영을 토벌하기 위해 업성을 포위했다.(AD304년7월)  

 

위급한 사마영이 당숙 동안왕 사마요에게 방도를 묻자 사마요는 갑옷을 벗고 상복으로 갈아 입은 뒤 친히 나가 석고대죄하기를 주청했다. 사마영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석초에게 5만 군사를 보내 방어하도록 했다. 황제 사마충은 화살에 뺨을 다쳤고 수행하던 충신 혜소는 석초군에게 잡혀 죽었다. 황제는 석초에게 붙잡혀 업성으로 끌려갔고 동해왕 사마월은 군사를 물리고 동해로 돌아가 버렸다. 일단 사마영이 이긴 것처럼 보였다. 사마영은 항복하라던 당숙 사마요를 죽여 버렸다(AD304년 8월). 그리고 군대를 보강하기 위해 흉노족인 유연과 그 아들 유총을 영입하였다. 이 때 안북장군 왕준과 사마등이 사마영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왕준과 사마등의 군사는 사마영의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다급한 사마영은 황제 사마충을 모시고 업에서 낙양으로 도망갔다. 사마영이 지키던 업성은 붕괴되었다. 장안을 지키고 있던 사마옹의 부하 장방은 낙양에 들이닥쳐 황제와 사마영을 윽박질렀다. 실권은 이제 장방과 그의 멘토 사마옹이 쥐게 되었다. 장방은 황제와 사마영을 장안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사마옹은 3만 기병을 대동하고 이들을 패상(장안 동남쪽 섬서성 남전현)에서 영접하였다.(AD304년 11월) 그리고 황태제 사마영은 폐위시킨 다음 사저로 내려 보냈다.(AD304년 12월) 황태제이던 사마영 대신 사마영의 동생 사마치를 황태제로 책봉하였다. 사마옹은 태재로써 군권 및 정권을 독점하였고 사마월에게는 사공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왕자의 난 6막이었다.

     

 

<16> 사마옹 제거(AD304)와 사마월의 실권 장악(AD305년 월)  : 8왕자 난의 7막

 

성도왕 사마영이 이미 폐출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불쌍하다고 여겼다. 예전에 부하였던 공사번이 장군을 자칭하면서 사마옹에게 대항하며 군사를 수만을 끌어 모아 업 지역 부근에서 일어났다. 석륵(나중에 후조의 건국시조)이 이때 공사번 군사에 동참한다. 공사번이 업성을 포위하자 사마옹은 사마영에게 1천 군사를 주어 공사번을 토벌시켰다. 그리고 사마월과 같은 군벌들에게 각자 자기의 봉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 대 봉국인 동핵국을 떠나 남쪽을 순회하며 강소성 소현에 있던 사마월은 거부했다. 사마옹은 유홍, 유준 및 사마석에게 황제의 조서를 내려 10만 군사로 사마월의 우호세력인 유여 형제(유곤 및 유번)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AD305년 10월18일) 

 

이제 사마씨의 세력은 태재 사마옹의 집권세력과 동해왕 사마월의 두 세력으로 크게 갈라졌다. 사마월은 사마옹에게 사람을 보내 하남성 성현을 기준으로 나라를 양분하여 나누어 가지자고 제의했다. 사마옹은 긍정적이었으나 핵심참모 장방이 거절했다. 

 

“나라는 부강하고 군사는 막강하며 천자를 끼고 있는데 어찌 두 손을 모으고 두 사람의 통제를 받으시려 하십니까?” 

 

사실은 장방이 지난 번 낙양 약탈 때 황제에게 난폭한 짓을 한 것이 두려워 반대한 것이었지만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장방에게 평소에 모욕을 많이 당했던 필원이 사마옹에게 다가가 말했다. 

 

“장방의 뜻은 반란에 있습니다. 군사를 패상(남전)에 주둔시키고 움직이지 낳는 것이 바로 그런 때문입니다. 그의 측근 질보가 그 계획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공원의 참모 묘파와 묘연도 나서서 사마옹에게 말했다. “장방만 제거한다면 효산 동쪽의 영토는 금방 안정적으로 확보될 것입니다.” 사마옹이 못 미더워 질보를 소환했다. 사마옹에게 가려는 질보를 필원이 불러서 이렇게 가르쳤다.

 

“사마옹이 물으면 무조건 그냥 ‘그렇지요’라고만 대답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오.” 

 

사마옹이 질보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장방이 반란을 계획했소?” 

질보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마옹이 다시 물었다. 

“경을 보내년 장방을 잡을 수가 있겠소?” 

질보가 대답했다.“그렇습니다.” 

사마옹이 친필로 편지를 써서 장방에게 보냈다. 장방이 편지를 읽는 사이에 질보가 장방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사마월에게 장방의 목을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사마월은 화의를 거절했다. 사마영은 낙양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갔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사마옹도 패주하였고 황제만 낙양으로 돌아왔다. 과거 사마옹에게 귀속되었던 모든 영지는 도적의 손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사마월에게 복종하였고 사마옹에게는 장안만 남았다. 도망 다니던 사마영은 하남 기현에서 사마효에게 사로잡혀 구금되었다가 사마효가 죽자 거짓조서를 쓴 유여가 죽였다.(AD306년 10월) 사마월은 유여 유곤 형제를 매우 아껴서 동생 유곤을 병주자사에 임명하였다. 진혜제 사마충은 떡을 먹고 죽었다.(AD306년 11월17일) 48세 였고 재위 18년이었다. 독살 가능성이 높다. 태제 사마치가 황제자리에 올랐다 이 사람이 진회제다.(재위AD307-AD311) 태부 사마월은 사마옹을 사도로 징소했다. 사마옹이 조정에 나오자 남양왕 사마모가 사마옹과 세 아들을 교살시켰다.(AD306년 12월1일) 8왕자 난의 7막이 끝났다. 

 

 

<17> 사마월의 최후와 진(晉) 조정의 종말 : 8왕자 난의 8막

             

사마월이 사마옹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진조정의 내분은 일단 수습되었지만 나라는 온통 찢겨져 있었다. 북경 부근 동북쪽에서는 석륵(후조창업, AD319)과 구희가 날뛰었고 서북쪽에는 등정과 굉저가 할거했으며 더 북쪽에서는 장식이 이미 전량(AD301)을 세워 대항하고 있었다. 서남쪽에는 이웅(성한 창업,AD306)이 국토를 분열해 가졌고 동남쪽에서는 진민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황족 사마예는 건업으로 도망가서 결국 동진이라는 나라를 세웠다.(AD317) 유연은 하북성 남부에서 전조라는 나라를 세웠고(AD304) 사마영의 우호세력 공사번은 사마영의 복수를 갚는 다는 명분으로 업성을 공략하여 열흘 이상 불이 났고 업성을 지키고 있던 사마등은 부하에게 암살당하였다.(AD307년) 진나라는 갈래갈래 찢겨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안에서는 사마담의 황위계승 문제로 분열되었다. 게다가 진회제 사마치는 태부 사마월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황제가 심복 무파와 무윤을 중용하자 사마월의 측근 유여는 무파 무리를 죽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사마월은 무파 등을 모반 혐의로 무고하여 10여명을 처단하였다(AD309년 3월26일). 진 조정의 혼란을 틈탄 유연은 작년(AD308년10월) 황제를 칭한 데 이어 남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진은 유연의 전조에게 계속 패배하였다. 쫓기고 밀리던 사마월이 병사함으로써(AD311년 3월19일) 8왕자 난은 결국 종지부를 찍게 된다. 진 조정은 AD316년 까지 명맥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허수아비에 불과한 조정이었고 최종적으로 전조의 유연의 아들 유총 때에 유요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AD316년11월11일)     

 

 

<18> 혼군 진혜제 사마충(AD259-AD307)      

 

진(晉) 2대 황제 사마충은 중국을 다시 통일한 진무제 사마염의 적장자였다. 두 살 위인 형  사마궤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사마충은 나이 8세(AD267)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선천적으로 지적 결함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냇가에 개구리가 우는 것을 듣고서 사마충은 시종에게 이렇게 물었다. “ 저 개구리들이 저렇게 시끄럽게 우는 것은 관청에서 시킨 것이냐 저들이 스스로 그런 것이냐?” 또 한 번은 가뭄으로 사람들이 밥을 굶어 죽는 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 밥을 못 먹으면 고기를 먹이면 될 테인데 왜 고기를 먹이지 않는가?”라고 물었던 사람이다. 이런 황태자를 걱정한 사마염은 몇 번이나 교체할까 생각했었다. 황태자를 교체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대신(정북대장군 위관)이 없지는 않았으나 적통을 버리고 연소자를 채택한다고 하면 조정의 반발도 클 것이므로 선뜻 바꾸지 못하며 망설였다. 특히 사마충의 장인이 당시 실세 중에의 실세인 가충이라면 엄청남 반발을 살 것이 분명했다.

   

사마염이 황태자를 교체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영특한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 때문이었다. 비록 아들 사마충이 부족하더라도 손자가 똑똑하니 사직은 잘 지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 떼문에 사마충을 폐위시키지 않았다. 그 대신 당시 최고의 문인 이희와 이밀을 스승으로 붙여 주어 가르치도록 했다. 

 

본인의 지적 결함에 더해 사마충을 더욱 무능한 혼군으로 만든 것은 부인 가황후였다. 가황후(이름 가남풍)는 가충(賈充)의 딸이다. 가충은 사마염의 아버지 사마소집권 시절부터 총애를 받아오던 권신으로써 교활하고 아첨을 잘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순의, 순욱 및 풍담과 한 패거리가 되어 진무제 사마염이 동생 제왕 사마유를 제치고 태자로 책봉되는데 핵심역할을 한 공신이었다. 조정에서 흉노 출몰이 빈번한 진주와 양주(감숙성지역)도독으로 가충을 몰아내려고 하자 순욱의 제안을 받아 사마충 태자와 혼인함으로써 못 생기고 질투심한  딸 가남풍을 태자비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마염은 당시 조정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위관의 딸을 며느리로 삼을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위씨는 다섯 가지 장점(賢, 多子, 美, 良, 白)이 있고 가씨는 네 가지 흠(妬忌, 無子, 醜, 短, 黑)이 있소.” 그러나 가충의 처 곽외가 황금뇌물로 양황후를 꾀었고 순욱 등의 무리를 동원하여 집요하게 사마염을 설득한 결과 태자보다 세 살이나 많았고 추한 가씨를 태자비로 만드는데 성공했다.(AD271년)가비는 태자비일 때 이미 몇 사람을 죽인 일도 있고 임신한 남편의 시첩에게 창을 던져 낙태시킨 적도 있어서 황제인 사마염에게 유폐당하고 폐위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자치통감에는 태자가 두려워했다고 할 정도로 가비는 무서운 여자였다. 

 

사마염이 죽고(AD290) 31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지만 정치는 오로지 가황후 및 동맹 등 환관 일당이 전횡했고 그에 반발하는 황족과 외척과 환관 사이에 끝없이 이어지는 내전으로 국가는 황폐해져 갔다. 사마 황족 사이에 벌어진 20여 년 간의 8왕의 난(AD291-AD311)으로 중국통일의 대업은 산산이 부셔졌고 혁혁한 공을 세운 훈구공신들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나라를 받드는 문무 충신들이 모두 제거된 데다가 불만에 쌓인 황족과 외척과 환관과 간신이 조정을 가득 메운 상태에서 사마충과 같은 혼군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런 나라가 어찌 나라이겠는가? 진나라가 수명을 다하기(AD316) 이전에 나라 곳곳에서 분열이 일어나면서 전량(AD301), 전조(AD304), 성한(AD306) 및 대(315)의 여러 나라로 쪼개지고 있었다. 조조나 제갈량이나 할아버지 사마의나 아버지 사마소가 달성하지 못한 중국통일의 대업을 달성(AD280)한 사마염의 공업을 한 세대 만에 다 말아먹은 것은 진혜제 사마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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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2월07일 16시22분
  • 최종수정 2016년12월07일 16시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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