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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 얻을 것 하나, 버릴 것 하나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7월15일 17시35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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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키토 케쳐

‘얻을 것 하나’에 대한 얘기부터 먼저. 

쉐우민의 숙소는 2인 1실이 기본이다. 룸메가 가고 채워지지 않은 방에서 혼자 지내는 경우는 있지만, 원칙은 승속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방에는 2개의 침대가 양쪽으로 배치돼 있다. 침대 머리맡과 발치의 천장 쪽으로 모기장을 치는데 쓰는 긴 철봉이 있다. 상식적이고 루틴한 풍경인데, 여기에 퍽 이질적인 물건이 방마다 하나씩 꼭 있다. 모양은 어릴 적 들고 들판을 쏴 다니던 잠자리채인데, 자루가 테이스 라켓 정도로 짧다. 쉐우민에 처음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물건의 용도를 궁금해 한다. 혼자서는 이 수수께끼를 풀기 어렵다. 

  나도 그랬다.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룸메에게 물었더니, ‘모스키토 케처’란다. 불살생의 계를 지키기 위해 모기를 체포(?)해서 추방하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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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뺑끼가 지나치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물건으로 모기를 체포하는 장면을 몇 차례 목격한 뒤론 생각을 바꿨다. 남방의 스님들은 모기를 쫓을 뿐 손바닥으로 내리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모기에 대한 적개심은 가히 천부적이다. 모기에 대한 공격성의 발로는 거의 반사적이고 기계적이다. 한국의 불교신도들 가운데 모기에게까지 불살생계를 지키는 경우는 거의 못 봤다. 아무튼 모스키토 케처는 모기가 눈에 띠면 반사적으로 두 손바닥을 조준해서 박수칠 준비(?)를 하던 내 습관을 반성하는 계기가 된 물건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기본적으로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이 도사리고 있다. 붓다의 통찰이다. 이 세가지를 ‘삼독’이라고 하기도 하고 ‘번뇌’라고 부르기도 한다. 평소 번뇌는 사람의 마음 속에 아주 작은 불씨로 있다가 한 순간에 ‘모두’가 되고 ‘전부’가 되는 괴물이다. 수행의 목표는 번뇌의 퇴치이다. 번뇌의 불씨를 키우지 않으려면 계율을 지켜야 한다. 계율의 첫 번 째가 곧 불살생계이니, 모기라 할지라도 곱게 모셔 밖으로 내보내드려야 한다. 홀로코스트도 사실은 아주 작은 미움의 불씨에서 시작된다. 생각이 다르면 미워지고, 미움이 증폭되면 죽이고까지 싶어지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 속에 모든 것을 넣고 싶어 한다. 생각, 지적 용어로는 사상이라고 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돼야 한다는 강박증을 사람은 갖고 있다. 그래서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모인다. 새가 깃털에 따라 모이듯. 생각이 같은 사람 속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금방 눈에 띤다. 그리고 따돌림 당한다. 인간의 잔인성은 여기에서 어김없이 발휘된다. 유태인에 대한 사소한 미움에서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시작되었다. 

  인간의 내면은 삐질삐질 밖으로 스며져 나온다. 자신만이 그것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냄새다. 인간의 심연 속에 감춰진 잔혹함, 기만성, 폭력성은 표정에서 행동거지에서 심지어 걸음걸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은 치장을 한다. 멋지게 서고 멋지게 걷고 멋지게 말하고, 그도 잘 안될 땐 무언가를 몸에 걸친다. 

  그렇다면 너는? 얼마 전 비로소 맡았다. 내게서 풍기는 냄새, 내게서 드러나는 잔인성 폭력성을. 나의 내면에서 스며져 나오는 번뇌의 악취를. 그래서 갖기로 했다. 업장이 두터워 실천이 쉽지 않겠지만 그 정신만큼은. 모스키토 캐쳐. 그 불살생의 자비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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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프롬 모바일

  다음은 ‘버릴 것 하나’에 대한 얘기다. 

  누구나 센터에 들어가는 즉시 여권과 통신기기를 맡겨야 한다고 들었다. 출국 전 공항에서 휴대폰을 정지시켰다. 센터에 도착하니 여권은 맡기라는데 휴대폰 얘기는 없다. 요즘 휴대폰이 기능이 다양해서 여러모로 쓸모가 있으니 법문 녹음 등에 사용하라는 센터 측 배려로 여겼다. 전원을 꺼서 한 동안 가방 속에 넣어두었다. 휴대폰으로부터의 해방, 프리덤 프롬 모바일. 이렇게 마음이 편할 줄이야. 잊고, 털고, 버리는 일은 어렵지만, 일단 행하고 나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평생 ‘무소유’를 외치다 입적하신 법정 스님 생각이 났다. 그런데 서울과 연락할 일이 생겼다. 무단이탈을 고민하다가 룸메에게 도움을 청하자 방안을 알려준다. 오피스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면 국제전화를 쓸 수 있다고 했다. 1분에 4천원. 비싸기도 하지만 번거로워 그만 두었다. 센터생활에 익숙한 다른 수행자들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센터 안에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이 있다는 것. 와이파이가 되면 카톡도 된다는 얘기. 인터뷰 시 사야도의 모바일 서치 장면이 떠올랐다. 사야도의 오피스 맞은편 선방 2층 베란다에서 와이파이 검색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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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잡힌다.’ 

‘쳇! 암호입력.’

실망. 

하지만 심기일전. 

결국 암호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베란다에서 잡히는 와이파이 신호는 매우 미약했다. 인터넷 검색은 거의 불가하고 카톡도 되다말다, 어떤 땐 완전불통. 하지만 서울과의 급한 소통문제는 해소되었다.

  어느 날 고참 수행자가 알려준다. 와이파이 잘 터지는 장소가 있다고. 사야도 오피스 외벽 아래가 바로 그곳. 그랬다. 팡팡 터졌다. 입소문은 빠르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행시간이면 그곳에 3-4명은 꼭 모인다. 서양과 한국의 수행자가 주 고객이다. 서양 요기들은 커다란 아이패드를 갖고 온다. 한국에서 온 젊은 스님 한분도 단골이었다. 어느 덧 그곳은 쉐우민의 인터넷 카페가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카톡이 급해 인터넷 카페를 찾았더니 고객이 한 사람도 없다. 와이파이가 아예 뜨질 않았다. 정보통 고참 수행자에게 물으니 사야도께서 휴식차 며칠 동안 어디론가 가셨다고. 인터넷 카페의 단골고객들이 각자의 언어로 한 마디씩 한다. 파롤은 다른데 랑그는 같다. “허전하다”였다. 

  다행히 휴업은 길지 않았다. 사야도께서 돌아오시자, 다시 와이파이가 팡팡 터졌다. 모바일은 인간의 삶과 생각을 뿌리까지 바꿔놓았다. 기존의 기초주의, 중심주의는 해체되고 다핵주의로 대체되었다. 더 이상 사람 사는 세상은 계란처럼 노른자와 주변을 둘러싼 흰자위와 껍질의 구조로 이해되지 않는다. 세상은 그물이고 개인은 그물코이다. 인간 이해의 키워드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 사회에서 소통은 욕구이면서 생존 그 자체이다. 

  하지만 소통을 포기했을 때의 편안함을 새겨봤다. 소통은 욕구이면서 욕구의 충족이지만, 외부와의 소통은 내부를 빈약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 수행은 철저히 내부에 관심을 갖는 일이다. 적어도 수행처에서 지나친 소통은 그래서 유보 내지는 ‘버릴 것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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