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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영웅인가, 재앙인가? (기원전 49~44)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4월06일 09시51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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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5권 중에서 카이사르에 관한 내용을 두 권에 걸쳐 집필했는데, 4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5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로 이름 붙였다. 그는 카이사르에 대해 이탈리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글을 인용하면서 100점 만점을 주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의 5가지다.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녀는 카이사르에 심취하여 카이사르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카이사르를 “인류에게 가져다줄 재앙”이었다고 가혹하게 평가한다. 카이사르가 일으킨 내전의 마지막 전투로,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벌인 전쟁에서 카이사르는 저항하던 로마 군인 3만 명을 무참하게 살해한 후 거창한 개선식을 올렸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를 몰염치하고 부도덕한 인간으로 평가했다. 

 

“이것이 카이사르가 벌인 마지막 전쟁이다. 이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치러진 개선행진은 로마인들을 그 어느 때보다 불쾌하게 만들었다. 타국의 장군이나 이방 민족의 왕과 싸워 얻은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가 아닌, 로마 최강 집안의 아들들과 혈육들이 불행을 만나 처참히 절멸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조국의 재앙을 축하하며 개선행진을 한 행위는 카이사르답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핑계를 대는 것 외에 신들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나 도저히 항변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고도 카이사르는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카이사르의 관용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면 불구대천의 원수라 하더라도 기꺼이 화해를 청했다.” “카이사르는 천성적으로 원한을 품는 사람이 아니었다.” “폼페이우스가 공화국 편에서 카이사르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는 자는 모두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한 반면,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편으로 여기겠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실었다. “그가 암살될 만했다는 주장도 이런 말과 행동에 따라 정당화되고 있다”며 카이사르에게 주어진 영예와 특권을 나열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영예나 특권을 사양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마무리했다. 결국 카이사르의 교만이 불행을 자초했다는 뜻이다. 

 

카이사르에 관한 ‘빚쟁이 에피소드’도 카이사르 평가에 있어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법무관 임기를 끝내고 에스파냐 총독으로 떠나려는 카이사르에게 불상사가 생겼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빚을 갚지 않으면 못 떠난다”며 농성을 벌이는 바람에 임지로 떠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카이사르는 이미 30세 때부터 빚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카이사르가 회계감사관에 취임할 때까지 진 부채 총액이 1,300달란트나 되었다고 한다. 이 돈은 11만 명 이상의 병력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때부터 빚쟁이로 유명했던 카이사르는 계속해서 빚을 지고 있었고, 그러다가 총독으로 부임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다행히 그 시절 최고 부자인 크라수스가 빚을 갚아야 할 기한을 연장해주고, 다른 빚에 대한 보증까지 서줘서 간신히 떠날 수 있었다. 

 

빚이 소액일 때는 채권자가 강자이지만, 그 액수가 많아지면 관계가 역전되는 법이다. 하기야 우리 속담에도 “돈은 앉아서 빌려주고 서서 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카이사르에게 돈을 빌려준 크라수스는 채권자에서 재정 후원자로 그 위치가 바뀌었다.

 

그러면 카이사르는 왜 이렇게 많은 빚을 졌을까? 우선 책을 사느라 빚을 졌다. 또 친구들한테 아낌없이 돈을 썼고, 애인들에게 빚을 져서 선물했다.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엇갈리고 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저자인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카이사르 평가의 상반된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오늘날 학자들은 과거사를 연구할 때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지니도록 훈련받는다. 하지만 고대 역사가들 거의 대부분은 카이사르라는 인물에 대해 강한 개인적 견해를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감탄하고 그를 숭배했으며, 공화정이 직면한 거대한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한 통찰력 있는 이상주의자라고 평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그에게 지극히 비판적이었으며, 법률과 관습을 무시하고라도 권좌에 오르려 했고 그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에 대한 명확한 목표도 없었던 일개 귀족에 불과했다고 평했다. 그런 평론가들은 그가 기회주의적인 방식으로 권력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다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카이사르에게는 분명 기회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성공한 정치인들에게 공통적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천년제국 로마의 초석을 깔았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와 민중파 간에 피비린내로 얼룩진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시키고 클레멘티아(clementia), 관용을 외치며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점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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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4월06일 09시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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