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0> MBO의 원조, 철저한 목표 관리(기원전 29~서기 14)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5월10일 17시30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메타정보

  • 29

본문

 

기원전 29년 8월, 승리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사흘 동안 웅장하고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당시 개선식에서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큰 소리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외치게 했다. 이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오늘 승리했다고 개선식을 치르지만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에서 생겨난 전통이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철부지라고 놀림받았던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세계의 최고 권력자로 역사의 전면에 우뚝 섰다. 그 광경을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카이사르가 기대한 대로 후계자로서 반석 위에 올라섰다. 만약에 후계자 선정이 잘못되었다면 카이사르는 역적으로 남아 불우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지 모른다. 후계자가 성공했기에 카이사르의 역사도 성공한 역사가 된 것이다. 

화려한 개선식은 끝났다.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1인자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는 무엇일까?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야만족으로부터 로마 세계를 보호해야 하는 안전 보장의 문제다. 

제국 내에는 평화가 깃들었지만, 라인 강과 도나우 강 너머에서 부유하고 평화로운 제국 속주를 호시탐탐 노리는 야만족들로부터 변경 지역을 보호해야 했다. 

 

둘째, 50만 명의 군대를 적절한 수준으로 감축하는 문제가 남았다. 

야만족들보다는 오히려 제국 군대가 내부의 평화와 안정에 훨씬 더 큰 잠재적 위협이었다. 야심차고 무자비한 장군들의 지휘하에 그들은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국가를 전복시키고 분열시킬 수 있었다. 악티움 해전 이후에 옥타비아누스는 70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중에서 30개 군단은 유지하고 나머지 40개 군단은 해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군대 해산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역한 군인들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있었다. 

 

셋째, 정치체제와 행정 개혁을 단행하는 문제다.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고, 카이사르가 약화시킨 원로원의 위신과 권위를 회복시키고, 국가의 수장으로서 군대를 장악하고, 제국 행정 체계를 수립하고, 속주의 공공 재정과 행정을 조절하고, 외교 문제를 감독하고, 자신의 적절한 후계자를 발굴하여 키우고, 고대의 도덕률을 되살리고, 국가 종교를 재건해야 했다. 

 

이처럼 산적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갔을까? MBO(Management by objective), 즉 목표 관리였다. MBO는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말한다. MBO에는 장기 목표와 단기 목표가 있다. 장기 목표는 5년, 10년, 20년도 걸릴 수 있다. 장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기 목표, 중기 목표를 설정하여 목표를 달성해나가야 한다. 오늘날 경영에서 중시하는 MBO의 원조가 바로 옥타비아누스라고 할 수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에 의한 평화를 정책의 방침으로 내걸었다. 카이사르의 클레멘티아에 이어 팍스 로마나를 제시한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6권에서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육신은 죽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정말로 죽은 것은 기원전 30년이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옥타비아누스의 시대가 열린다. 아니,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카이사르가 타도한 공화정 로마를 대신하는 제정 로마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주도하는 공화정으로 돌아가려는 회귀주의자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홀로 모든 개혁을 구상하고 기반을 닦아놓았다.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깔아놓은 마스터플랜 위에서 카이사르가 꿈꾸었던 세계를 구현해나갔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와 비교할 때 두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회고주의자들이 내전이 계속된 14년 동안에 대부분 죽거나 노쇠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났다는 점이다. 

 

둘째,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라는 동년배의 협력자를 얻어 팍스 로마나를 기치로 신생 로마제국을 굳건하게 출발시킨 점이다. 

카이사르는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보여주려 노력했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보고 싶어 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현실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면서 치밀한 목표 관리를 통해 목표를 달성해나갔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도달하는 수단은 각각 달랐다. 왜 그랬을까? 옥타비아누스가 처한 환경이 카이사르와 달랐기 때문이다. 

 

첫째, 옥타비아누스는 신중한 성격을 타고났다. 그는 몸이 약했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기에 매사에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스타일이었다. 대신에 치밀하고 기획력이 뛰어났다. 

 

둘째, 카이사르의 암살을 통해 살해당하면 목표 자체가 물거품이 된다는 교훈을 터득한 까닭에 카이사르처럼 급진적으로 개혁을 서두르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때 카이사르의 나이는 51세이고, 옥타비아누스는 33세였다. 카이사르는 55세에 암살당했고, 아우쿠스투스는 76세까지 장수했다. 

 

2세기 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비교한 내용이 흥미롭다. “아우구스투스는 유일한 승자가 된 뒤에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오랜 시간을 들여 한 가지씩 권력을 수중에 넣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카이사르는 유일한 승자가 되자마자 당장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고 억지로 혁명을 추진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정치가로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보다 적절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 

29
  • 기사입력 2018년05월10일 17시30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