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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하는 교수직함, 멸시당하는 교수사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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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5년04월15일 20시06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1시28분

작성자

  • 김진해
  • 경성대학교 예술종합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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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하는 교수직함, 멸시당하는 교수사회

 

 교수 수난시대다. 요즘 언론에 걸핏하면 등장하는 것이 교수 성희롱 사건에다 연구비 횡령사건이다. 직업이 교수인 사람들 대부분이 창피해한다. 뭔가 모멸당하고 약간은 화가 난다는 감정을 토로하는 교수들이 많다. 한국의 대학교수는 전문대학을 포함해서 약 5~6만 명가량이라고 한다. 판검사 3~4천명에 비하면 20배가량 많은 숫자다. 판검사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마당에 그보다 숫자가 훨씬 많은 교수들은 오죽하겠냐는 비아냥거림도 듣는다. 숫자가 많을수록 불량품도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순도를 높일 필요는 당연히 있다.

 

교수들의 평균 연봉이 1억 원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강사,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교수직에 오르려면 인문예술계의 경우 50세가 넘어야한다. 50세 전후해서 정교수가 되는 셈이다. 개인 경력에 따라 연봉의 편차가 약 1~2천만 원 정도 나지만, 결코 적지 않은 액수다. 게다가 강연이나 원고료, 출판 인세,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교수들의 수입은 훨씬 많다. 또래 기업 임원이나 CEO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고 푸념하지만, 교수 급여는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임금수준으로 볼 때 불평할 수준은 아니다.

 

교수는 원래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학문을 탐구하고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직업이다. 이조 오백년 유교문화는 군사부일체를 강조해왔다. 글 읽는 선비문화는 청렴과 청빈을 강조한다. 그 전통이 아직도 남아 사람들은 교육자를 존중한다. 이제는 반대다. 교육자의 선비정신은 여지없이 퇴락했다. 초등학교의 경우 화장품, 지갑을 비롯한 각종 선물이며 관례가 된 ‘촌지’가 큰 문제가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 3년에 집 한 채 장만한다는 말도 있었다. 비슷한 시기 오토바이 순경 3년에 집 장만한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에 나돌던 얘기였다. 

 

세상이 달라졌다. ‘김영란법’이 통과되었다. 촌지나 뒷돈이나 접대가 사라질 것이다. 잘된 일이다. 우리 사회 최대의 악폐 중 하나가 뇌물과 부정부패다. 최근 수사 중인 방위산업 뇌물사건은 공직 비리의 일부일 뿐이다. 비단 이 뿐이랴. 관급공사를 수주한다거나 시청의 하도급 프로젝트 하나 따내기 위한 로비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투명성과 공정성을 내세우며 공개입찰을 표방하지만 비리는 횡행한다. 업체 선정 시 프레젠테이션과 공개심사가 병행된다. 하지만 선발된 심사위원들은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점수를 대충 매긴다. 담당 공무원은 업자가 미리 손을 쓴다. 이것이 현실이다.

 

심사위원 대부분이 교수다. 이중 한 명이 이견을 제시하거나 자신의 평가점수를 고집하면 금방 그는 까칠한 교수로 찍힌다. 공무원 사이에 까칠하다는 말이 나도는 즉시 차기 심사자 명단에서 제외된다. ‘좋은 게 좋다’는 게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좋은 게 좋다’는 이 말은 비위나 비리를 적당하게 눈감고 넘어가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좋은 게 좋다’가 때로는 도리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무리지어 대충 얼버무리고 이득을 서로 나누어 갖는다는 의미가 크다. 

 

양심과 정의에 따라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소신 있는 의견을 제시하는 심사자에게는 까칠하다는 말 한 마디로 ‘그들만의 리그’로부터 그를 격리시킨다. 왕따를 시킨다는 표현이 옳을 지도 모른다. 공직사회, 교수사회, 직장사회, 동창모임, 계모임 등 어디에나 왕따 문화가 존재한다. 왕따가 비단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 전반은 무언의 정언명령이 지배하고 있다. 기득권 내지는 권력자들의 이익과 입장이 정언명령인 것이 문제다. 그들 편에 서지 않으면 배신이다. 정언명령의 지도자가 줄을 세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굽실거리는 아부자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말 듣지 않는 강골들은 ‘까칠이’란 말로 부정적 이미지를 덮어씌운다. 까칠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일부로 고분고분한 척, 일부로 둥글게 타협하는 척 한다. 현실에서 살기가 이처럼 힘들다. 까칠함을 경원시하고 배제시키는 사회는 절대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까칠함은 법원의 소수 의견일 수 있고 우리사회의 소수 의견일 수 있다. 또 그 의견은 다수결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곰씹어보고 진실일 경우 특히 존중되어야 한다. 법관이나 교수 집단이 그래도 양심의 보루인데 그것이 무너지고 있는 징조가 만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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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사회가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대학은 교수를 교육, 봉사, 연구 등 세 분야를 기준으로 평가한다. 이중 외부 자문이나 강연 등이 봉사에 해당한다. 교수들이 정부기관의 심의위원, 자문위원 등에 목메는 이유는 알량한 봉사 점수 몇 점 더 얻으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작 그들은 정부나 각종 위원회에 직함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마치 그것이 교수 자신의 능력을 대변하는 척도의 상징인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교수의 능력은 교육과 학문의 깊이와 논문 생산의 질적 수준에 있다. 외부 기관의  타이틀을 많이 가질수록 정작 자신의 전공 연구에는 소홀할 수 밖 에 없다. 

 

국가나 공공기관에서 교수들의 도움이 필요해서 자문위원, 전문위원 제도를 두지만 이 제도 역시 담당 공무원들 손아귀에서 놀아난다는 점이다. 조그만 타이틀 하나 때문에 명예로움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교수들이 행정공무원들 앞에서 굽실거리게 된다.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자존감이 없으면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창피를 당한다. 창피스러움은 스스로 느끼지 못한다. 아니 느끼지 않는다. 창피스러움은 동종의 직업을 가진 동료나 지식인들이 느낀다. 우리 집단에 저런 사람이 있다는 데에 대한 교수 스스로의 자괴감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창피한 줄 모른다. 이미 그들은 정치인만큼 낯이 두꺼워졌는지 모른다.

 

대학은 교원 채용에서도 비리가 여실히 드러난다. 교수나 학교 관계자들이 금품을 수수하고 교수를 채용했다가 문제가 되기도 했고, 신임교수 채용에 있어서 자기 사람 심기로 종종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종 교배가 아닌 근친접목으로 학과 구성원을 꾸리면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선배 교수의 업적이나 이론에 대한 비판이 금기시 되는 풍토가 조성되기 때문에 그렇다. 게다가 대학이 급증하다 보니 교수님 하고 부르면 열에 일곱은 뒤를 돌아본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린다. 예전에는 사장님 하고 부르면 모두 뒤를 돌아본다는 말과 닮아있다. 교수의 이름값이 많이 떨어진 셈이다.

 

교수의 칭호도 너무 많다. 대학 강사인 외래교수를 비롯해서 겸임교수, 초빙교수, 특임교수, 산학교수 등 교수의 종류도 다양하다. 여전히 교수라는 직함의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라는 사실의 반증이다. 특히 정치인이나 관료들은 선거 홍보나 입신용으로 겸임교수나 초빙교수 타이틀을 따려고 애쓴다. 예능이 대세인 요즈음 탤런트나 배우, 개그맨 역시 교수 직함을 달고 교단에 선다. 정식 대학이 아닌 학점 은행제 형태의 학원도 대학 노릇을 한다. 그래서 모 예술종합직업학교는 앞에 ‘직업’자를 떼고 대학인양 겉모습을 갖추기 위해 입법 로비를 벌이다 국회의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공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아직도 학벌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돈 잘 버는 직업학교 이사장이나 학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떠드는 연예인 지망생 그들도 속으로는 명예가 필요한 모양이다. 직업예술학교는 연기나 예능 교육에 충실하면 될 것인데 굳이 대학임을 흉내 내고, 이사장은 잘 나가는 탤런트, 대중가수들을 고상한 교수 타이틀을 미끼로 그들을 유혹한다. 이렇게 채용된 유명 연예인 교수들의 이름을 보고 학생들은 줄지어 입학한다. 그러다 보니 정규대학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한 예술직업학교들은 성업 중이다. 일종의 암거래 관계가 대학 교육에 만연되는 느낌이다.

 

배우나 탤런트의 대학교수 영입을 막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방송출연 등으로 너무 바빠 학생 교육을 제대로 못한다는 데에 있다. 연기라는 영역과 연기 교육이라는 영역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훌륭한 배우가 유능한 연기 지도자가 아닌 것처럼 유명한 영화감독이 교단에서 학생들을 잘 가르친다는 보장은 없다. 마치 훌륭한 야구감독이 선수시절 꼭 뛰어난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아닌 이유와 같다. 배우 출신 대학교수는 학교 전임교수들이 현장을 잘 모르면서 자신의 명예와 실력을 질투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전임교수들은 배우 생활과 교수를 겸하는 연기자들이 강의를 등한시 하고 교육에 이론적 체계가 없다고 은근히 무시한다.

 

대학의 요지경 현실 속에서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개혁이 진행 중이다. 2018년 대입 정원과 고교 졸업생 숫자가 같아진다니 정원미달 사태와 망하는 대학도 나올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대학은 엄청난 양적 팽창을 했다. 학교 법인도 자산을 많이 축적했다. 호황을 누린 셈이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인구가 늘어날 때 좋았던 대학과 교수들은 이제 시련을 맞이하고 있다. 대학은 학과를 통폐합하고 교수들의 행동강령도 만들었다. 자존심이 팍팍 상하고 사회로 부터 멸시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수 스스로의 부도덕성과 물질 추구의 가치관이 자초한 결과는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무릇 대학은 명예를 존중하고 학문을 숭상했다. 학문은 공학, 법과, 상과, 의학 등 등 먹고사는 산업형 학문이 전부가 아니다. 이들의 토대인 물리, 화학, 생물 등의 이과 기초학문이 있고 인문학의 토대인 문학, 사학, 철학이 있다. 우리 사회가 천박하다는 것은 먹고사는 문제에만 너무 치중한다는 사실이다. 대학이 제자리를 찾고 교수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자존감 회복이 필요하다. 학교의 열등한 학생들에게나 외치던 자존감 회복이 교수 스스로에게도 필요한 말이 되었다. 교수들이 언론에 더 이상 횡령이나 성추행 같은 낯 뜨거운 말을 듣지 않도록 하려면 도덕성과 자존감 회복이 최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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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으로 치여 심히 피곤한 교수들의 자존감 회복을 위해 예술을 권유한다. 예술은 먹고사는 데 지친 모든 이들의 영혼을 위로한다. ‘예술은 우리의 영혼에 놓는 주사’와 같다. 감동적인 영화 한 편은 보약보다 더 값진 영혼의 보약이다. <위플레쉬>. 삼류 영화이기는 하나 교수 자신이나 지도 학생을 최고의 일류로 만들기 위한 집념이 일품이다. 영화는 내용이 과장되고 억지 반전이 있어 삼류다. 그러나 내용 중 하나는 “예술교육, 어떻게 해야 하나”를 묻고 있다. 실기 지도 영역인 음악, 미술, 체육, 연기, 영화 관련 교수들에게 권한다. 일반 교수들은 <위플래쉬>란 곡명의 재즈 음악을 그냥 감상해보시길 바란다. 재즈도 클래식만큼 훌륭하다. 왜? 우리 감정을 요리조리 요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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