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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식민지 조선이 겪어야 했던 전시 성폭력, 여성인권의 문제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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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5년05월29일 20시01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09시48분

작성자

  • 정현주
  • (사) 역사ㆍ여성ㆍ미래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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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일본군 ‘위안부’, 식민지 조선이 겪어야 했던 전시 성폭력, 여성인권의 문제

 

 최근 한국과 일본의 가장 첨예한 외교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이다. 핵심은 일제강점기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갔는가와 이러한 여성동원과정에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개입했느냐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와 우익들은 여성동원은 민간업자들이 한 일이며, 일본군 ‘위안부’는 일종의 공창이며 상행위라는 주장이다.

 

1990년대 김학순의 증언 이후 ‘위안부’문제 세상에 알려져… 일본정부 고노담화 통해 일본군 개입 인정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1년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이 증언을 하면서이다. 김학순의 증언 이후 국내외 피해자들이 잇따라 증언하였고, 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불러왔다. 여기에 1992년 일본의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일본군이 군위안소를 설치 운영에 관여했다는 군 문서를 발굴하여 알림으로써 더 이상 일본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후 일본 정부의 자료조사가 있었고 당시 고노(下野洋平) 관방장관이 담화를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깊이 해쳤던 문제이다”라고 인정하였고,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하여 이와 같은 문제를 영원히 기억하는데 머물지 않고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굳은 결의를 다시 표명한다”고 공표하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한국의 관련 단체들은 1992년부터 유엔과 다양한 국제기구를 통해 꾸준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고, 그 결과 유엔의 인권보고서와 권고를 이끌어냈다. 한국 정부에도 압박을 하여 법률을 제정하여 일본군 ‘위안부’의 생활 지원하게 되었다. 나아가 관련 운동가, 학자들이 참여하는 아시아연대회의를 조직하였다. 2000년에는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을 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일본정부와 우익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나 군차원의 개입이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한일간 외교문제가 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도 비난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일본군 ‘위안부’문제는 해방후 오늘날에도 한일간의 현안이 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는 역사문제가 대중운동으로 또 국제운동으로 확산된 대표적인 사례인데, 수요일마다 열리는 수요집회가 유명하다.(아래 박스기사 참고) 

 

적절하지 않은 '위안부'란 용어… 성노예가 국제적인 용어

먼저 '위안부'라는 용어는 일본군이 붙인 용어인데, 국제사회에서는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면 일본군 '위안부'는 어떤 여성들이, 어떻게 징집되었는가?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해 위안부를 본격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부터였다. 군‘위안부’가 된 조선인 여성들은, 정부에 신고한 여성을 중심으로 보면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이 다수인데 취업사기, 유괴, 약취, 인신매매 등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가 많았다. 민간업자 일종의 성매매 알선업자들이 '위안부'들을 동원, 이들을 군위안소로 배치하고 군의 이동에 따라 이들도 이동했다. 위안소의 '위안부'들이 하는 일은 일본군의 성적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본군의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위안소의 수도 늘었다. 일본군은 점령지역이면 거의 어김없이 '위안소'를 설치했다. 일본군의 전선이 만주, 소련의 접경지역, 동남아, 태평양지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위안부’도 전선을 따라 이동하였다. 이런 지역은 최전방지역으로 군의 허가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조선인 '위안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것이 바로 ‘위안부’ 모집과 관리에 군이 적극 개입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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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전선으로 이송’되는 일본군 ‘위안부’ 사진으로 사진의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채로 여기저기에 인용되었던 유명한 사진임. 지난 5월8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이었던  ‘무라세 모리야스 사진전’에 출품되어 출처가 밝혀지게 됨. 우측 상단에 모자를 눌러쓴 일본군(점선 안)이 보임. 동아일보 2015년 5월 11일자)

 

조선인 '위안부'가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공문서나 일본군 회고담에 나오는 '위안부'에서 조선인의 수가 상당히 많고 최전선지역까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자료가 있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수, 수만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이들은 버려지거나 집단 학살을 당하거나 간호부로 바뀌어 일하다, 연합군의 지원 등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 '위안부'도 있고, 돌아와서도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식민지나 점령지 혹은 일본에서 당시 어려운 계층의 여성들이 여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군이 만든 군‘위안소’에서 반복적으로 성적 학대를 당한 여성인권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전쟁시기에 생긴 것이지만 여성, 계급, 민족문제가 결합된 것으로서 반드시 전쟁기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므로 이 문제제기를 통해 일본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얼마나 인권문제에 성숙한 대응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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