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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2> 내부 분열(C.끝)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0월15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10월15일 09시4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8

본문

성(盛)하면 반드시 쇠(衰)한다. 개인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다. 제법 오래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빨리 그렇게 된다. 왜 모든 것은 반드시 쇠할까. 중국역사를 통틀어 오호십육국과 이어지는 남북조시대처럼 많은 나라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던 적은 없다. AD301년 전량에서부터 AD589년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다시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약 290년 동안 수십 개 크고 작은 나라들이 명멸했다. 길든 짧든 이들 나라의 패망사를 보면 그것을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철칙이 있는데 두 번째 법칙은 국가분열이다.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는 국가내부가 얼마나 빨리 분열하는가에 달려있다. 내부에서 등애와 종회가 분열하면서 삼국을 통일했던 조조의 위나라가 멸망했고 사마염의 친족이 8왕의 난을 일으키면서 서진은 10년 만에 멸망했다.

 

⑪ 사마예의 사마경 제거(AD302년12월) : 8왕자 난의 5막

 

제왕 사마경은 평소에 재당숙 하간왕 사마옹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하간왕의 장사 이함을 징소하여 궁궐로 등용시켰다. 그런데 이함은 사마경의 심복부하 조양 및 양주자사 황보상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정에 들어 온 이함은 거짓조서를 만들어 사마옹에게 보여 주었다. 

“ 사마경을 타도하라. 황제의 명령이다.” 

 

그러면서 평판이 좋은 성도왕 사마영과 연대하기를 사마옹에게 독촉했다. 사마옹이 동조하면서 성도왕 사마영, 신야왕 사마흠, 범양왕 사마효에게 군사를 일으켜 낙양으로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장사왕 사마예는 사마경을 폐출시키고 모든 권한은 성도왕 사마영이 잡는다고 선포했다. 사마경에 대한 반란군의 선봉에는 이함과 장방이 나섰다. 사마영은 참모 노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란군사를 일으키는데 동조했다. 놀란 사마경이 내부회의를 열었다. 상서 왕융과 같은 한 쪽에서는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인데다가 감당할 수 없는 대군이므로 물러나야 옳다고 했고 갈여와 같은 강경론자들은 거짓조서에 의한 반역에 해당하니 토벌해야 한다고 했다. 반대하는 자는 목을 베어야 한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왕융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배탈을 흉내내고서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다.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사마경은 “조서를 위조한 반역이다.”고 했고 사마예와 사마영 측에서는 “사마경이 황위를 찬탈했다.“ 주장했다. 전쟁은 싱겁게 끝났다. 대사마 사마경의 부하 조연이 사마경의 측근 하욱을 살해한 뒤 사마경을 체포해 버린 것이다. 사마경은 곧바로 항복했고 황제 사마충은 풀려났다. 황제 사마충은 사마경을 살려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분노한 사마예는 사마경을 끌고 가서 멋대로 죽여버렸다(AD302년12월). 사마경은 집권 1년 9개월 만에 죽은 셈이다. 이것이 8왕자 난의 4막이다. 사마예는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모든 대소사를 업에 있는 동생 사마영과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세간의 평판은 사마영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⑫ 사마영의 사마예 제거(AD304년 1월) : 8왕자 난의 6막

 

이제 실권은 사마예에게 있었다. 그러나 사마경 제거의 핵심전략은 원래 사마옹의 참모 이함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이함의 생각은 원래 이랬다. 먼저 사마경과 사마예가 붙으면 약한 사마예가 질 것이고 동시에 사마경도 피폐해 질 것이다. 그런 틈을 타서 사마경을 타도하고 사마영이 집권하게 되면 사마옹이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므로 사마옹의 참모 이함도 득세한다는 계략이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오히려 사마예가 사마경을 처단하면서 정권이 사마영과 사마예에게로 간 것이다. 사마옹에게는 아무런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 닭 쫓던 개 격이 된 셈이다. 특히 이함과 사이가 나쁜 황보상을 사마예가 참군으로 중용하고 그의 형 황보중을 진주자사로 임명한 것이 이함에게 뼈아픈 일이었다. 이함이 황보상-황보중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 먼저 사마옹에게 다가가서는 황보중을 진주자사에서 내직으로 발령한 다음 들어오는 길에 자객을 풀어 죽이자는 계획이었다. 황보중이 그 계획을 알게 되었고 군사를 일으켜 이함을 토벌해야한다고 상소하며 나섰다. 사마예는 황보중의 군사행동을 저지시키는 한편 이함을 하남윤으로 전출시켜 무마하려고 했다. 이함은 징소에 응했으나 황보중은 거부했다. 사마옹이 군사를 풀어서 명을 어긴 황보중을 공격했다. 조정 에서는 이함과 풍손과 변수가 짜고서 사마예 살해계획을 세웠다. 황보상이 그 계획을 사마예에게 알렸다. 사마예는 이함 등 살해음모를 세운 자를 처형했다. 사마옹은 그 처단이 자신에 대한 도발이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사마예를 토벌한다고 선언했다. 사마옹은 사마영을 끌어 들였다. 사마영의 참모 노지는 참전하지 않으면 더욱 평판이 좋아질 것이라며 말렸다. 사마영의 참군 소속도 형제(사마예, 사마영의 두 살 위 형)를 죽이는 것은 다른 한 손을 자르는 것과 같다며 말렸다. 사마영은 노지와 소속의 권고를 듣지 않고 사마예 토벌에 나섰다. 

 

사마영의 군사 20만은 업에서 낙양으로 남하하고 사마옹의 군사 7만은 함곡관에서 낙양으로 동진했다. 낙양에서는 허수아비 황제 사마충과 사마예의 군사 1만이 방어에 나섰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사마옹의 부장 장방이 사마예의 황보상 군사를 격파하고 낙양을 약탈했다. 황제 사마충은 사마영과 사마예의 휴전협정을 중재하려 했다. 사마영은 황보상의 목을 베면 군사를 돌리겠다고 했으나 사마예는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중재가 실패했다. 전쟁에서 사마예는 훌륭히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사마예 또한 황제에게 예를 다해 모셨으므로 군사들의 사기나 민심 또한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마옹의 군사 장방 또한 사마예 토벌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사마옹-사마영의 반란군은 실패하는 것이 확실했다. 이 때 반전이 일어났다. 동해왕이자 황제의 재당숙 어른인 사마월이 갑자기 사마예를 체포하여 가두어 버린 것이다.(AD304년 1월25일) 여러 장수들은 사마예를 추대하기를 원했으나 사마월이 후환을 두려워하여 사마예를 죽이려고 하였다. 황문시랑이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자 사마월도 주춤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장방에게 들어가자 장안으로 후퇴하려던 계획을 돌려 낙양을 급습하여 사마예를 체포하고 불에 구워 죽여 버렸다. 장방의 군사들까지 사마예의 죽음에 눈물 흘렸다고 기록되어있다. 결국 사마예는 집권 1년 2개월 만에 죽음으로 막을 내린 셈이다. 8왕자 난의 5막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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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사마영 제거(AD304)와 사마옹의 정권 장악(AD304년 11월)  : 8왕자 난의 7막

 

이제 정권은 사마옹과 사마영이 쥐었다. 사마옹은 사마충의 황태자 사마담을 폐위시키고 사마영을 황태제로 삼을 것을 주장하여 관철했다. 그리고 자신은 태재와 대도독으로써 정치와 군사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마영이 과거의 민심과는 달리 사치하고 오만하며 측근들이 정치를 문란하게 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크게 잃었다. 당연히 동해왕 사마월은 사마영을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마월은 사마영에게 폐위된 황후 양씨와 황태자 사마담을 복원시킴과 동시에 충신 혜소를 징소하여 등용하고 주변에서 소집한 10만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대동하고 사마영을 토벌하기 위해 업성을 포위했다.(AD304년7월)  

 

위급한 사마영이 당숙 동안왕 사마요에게 방도를 묻자 사마요는 갑옷을 벗고 상복으로 갈아 입은 뒤 친히 나가 석고대죄하기를 주청했다. 사마영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석초에게 5만 군사를 보내 방어하도록 했다. 황제 사마충은 화살에 뺨을 다쳤고 수행하던 충신 혜소는 석초군에게 잡혀 죽었다. 황제는 석초에게 붙잡혀 업성으로 끌려갔고 동해왕 사마월은 군사를 물리고 동해로 돌아가 버렸다. 일단 사마영이 이긴 것처럼 보였다. 사마영은 항복하라던 당숙 사마요를 죽여 버렸다(AD304년 8월). 그리고 군대를 보강하기 위해 흉노족인 유연과 그 아들 유총을 영입하였다. 이 때 안북장군 왕준과 사마등이 사마영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왕준과 사마등의 군사는 사마영의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다급한 사마영은 황제 사마충을 모시고 업에서 낙양으로 도망갔다. 사마영이 지키던 업성은 붕괴되었다. 장안을 지키고 있던 사마옹의 부하 장방은 낙양에 들이닥쳐 황제와 사마영을 윽박질렀다. 실권은 이제 장방과 그의 멘토 사마옹이 쥐게 되었다. 장방은 황제와 사마영을 장안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사마옹은 3만 기병을 대동하고 이들을 패상(장안 동남쪽 섬서성 남전현)에서 영접하였다.(AD304년 11월) 그리고 황태제 사마영은 폐위시킨 다음 사저로 내려 보냈다.(AD304년 12월) 황태제이던 사마영 대신 사마영의 동생 사마치를 황태제로 책봉하였다. 사마옹은 태재로써 군권 및 정권을 독점하였고 사마월에게는 사공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왕자의 난 6막이었다.

 

⑭ 사마옹 제거(AD304)와 사마월의 실권 장악(AD305년 월)  : 8왕자 난의 8막

 

성도왕 사마영이 이미 폐출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불쌍하다고 여겼다. 예전에 부하였던 공사번이 장군을 자칭하면서 사마옹에게 대항하며 군사를 수만을 끌어 모아 업 지역 부근에서 일어났다. 석륵(나중에 후조의 건국시조)이 이때 공사번 군사에 동참한다. 공사번이 업성을 포위하자 사마옹은 사마영에게 1천 군사를 주어 공사번을 토벌시켰다. 그리고 사마월과 같은 군벌들에게 각자 자기의 봉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 대 봉국인 동핵국을 떠나 남쪽을 순회하며 강소성 소현에 있던 사마월은 거부했다. 사마옹은 유홍, 유준 및 사마석에게 황제의 조서를 내려 10만 군사로 사마월의 우호세력인 유여 형제(유곤 및 유번)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AD305년 10월18일) 

 

이제 사마씨의 세력은 태재 사마옹의 집권세력과 동해왕 사마월의 두 세력으로 크게 갈라졌다. 사마월은 사마옹에게 사람을 보내 하남성 성현을 기준으로 나라를 양분하여 나누어 가지자고 제의했다. 사마옹은 긍정적이었으나 핵심참모 장방이 거절했다. 

 

“나라는 부강하고 군사는 막강하며 천자를 끼고 있는데 어찌 두 손을 모으고 두 사람의 통제를 받으시려 하십니까?” 

 

사실은 장방이 지난 번 낙양 약탈 때 황제에게 난폭한 짓을 한 것이 두려워 반대한 것이었지만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장방에게 평소에 모욕을 많이 당했던 필원이 사마옹에게 다가가 말했다. 

 

“장방의 뜻은 반란에 있습니다. 군사를 패상(남전)에 주둔시키고 움직이지 낳는 것이 바로 그런 때문입니다. 그의 측근 질보가 그 계획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공원의 참모 묘파와 묘연도 나서서 사마옹에게 말했다. “장방만 제거한다면 효산 동쪽의 영토는 금방 안정적으로 확보될 것입니다.” 사마옹이 못 미더워 질보를 소환했다. 사마옹에게 가려는 질보를 필원이 불러서 이렇게 가르쳤다.

 

“사마옹이 물으면 무조건 그냥 ‘그렇지요’라고만 대답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오.” 

 

사마옹이 질보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장방이 반란을 계획했소?” 

질보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마옹이 다시 물었다. 

“경을 보내년 장방을 잡을 수가 있겠소?” 

질보가 대답했다.“그렇습니다.” 

사마옹이 친필로 편지를 써서 장방에게 보냈다. 장방이 편지를 읽는 사이에 질보가 장방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사마월에게 장방의 목을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사마월은 화의를 거절했다. 사마영은 낙양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갔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사마옹도 패주하였고 황제만 낙양으로 돌아왔다. 과거 사마옹에게 귀속되었던 모든 영지는 도적의 손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사마월에게 복종하였고 사마옹에게는 장안만 남았다. 도망 다니던 사마영은 하남 기현에서 사마효에게 사로잡혀 구금되었다가 사마효가 죽자 거짓조서를 쓴 유여가 죽였다.(AD306년 10월) 사마월은 유여 유곤 형제를 매우 아껴서 동생 유곤을 병주자사에 임명하였다. 진혜제 사마충은 떡을 먹고 죽었다.(AD306년 11월17일) 48세 였고 재위 18년이었다. 독살 가능성이 높다. 태제 사마치가 황제자리에 올랐다 이 사람이 진회제다.(재위AD307-AD311) 태부 사마월은 사마옹을 사도로 징소했다. 사마옹이 조정에 나오자 남양왕 사마모가 사마옹과 세 아들을 교살시켰다.(AD306년 12월1일) 8왕자 난의 7막이 끝났다. 

 

⑮ 사마월의 최후와 서진(西晉) 조정의 종말 

             

사마월이 사마옹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20여 년에 걸친 서진 조정의 내분은 일단 수습되었지만 나라는 온통 찢겨져 있었다. 북경 부근 동북쪽에서는 석륵(후조창업, AD319)과 구희가 날뛰었고 서북쪽에는 등정과 굉저가 할거했으며 더 북쪽에서는 장식이 이미 전량(AD301)을 세워 대항하고 있었다. 서남쪽에는 이웅(성한 창업,AD306)이 국토를 분열해 가졌고 동남쪽에서는 진민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황족 사마예는 건업으로 도망가서 결국 동진이라는 나라를 세웠다.(AD317) 유연은 하북성 남부에서 전조라는 나라를 세웠고(AD304) 사마영의 우호세력 공사번은 사마영의 복수를 갚는 다는 명분으로 업성을 공략하여 열흘 이상 불이 났고 업성을 지키고 있던 사마등은 부하에게 암살당하였다.(AD307년) 서진 강토는 갈래갈래 찢겨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 조정안에서는 사마담의 황위계승 문제로 분열되었다. 게다가 서진 회제 사마치는 태부 사마월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황제가 심복 무파와 무윤을 중용하자 사마월의 측근 유여는 무파 무리를 죽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사마월은 무파 등을 모반 혐의로 무고하여 10여명을 처단하였다(AD309년 3월26일). 서진 조정의 혼란을 틈탄 유연은 작년(AD308년10월) 황제를 칭한 데 이어 남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서진군사는 유연의 전조에게 계속 패배하였다. 쫓기고 밀리던 사마월이 병사하고(AD311년 3월19일) AD316년 까지 명맥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허수아비에 불과한 조정이었고 최종적으로 전조의 유연의 아들 유총 때에 유요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AD316년11월11일) 전국을 통일한 사마염이 죽은 지 꼭 26년만이었다.  <끝>

 

< 진(晉)나라 황실 가계도와 8왕자 난의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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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시는 진 황제   

①,② 등의 번호는 8왕자 난의 실권 장악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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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10월15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10월15일 09시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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