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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9B) : 아미구용(蛾眉苟容)에 놀아난 성한(成漢)의 이수-이세 부자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6월06일 09시02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10일 15시3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8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⑷ 범장생과 서여의 도움과 이웅의 성도왕 즉위(AD304)

 

서진 조정은 확대되는 이웅 세력을 견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 차례 군사를 보내 이웅 세력을 토벌하려 했으나 매번 성공하지 못했다. 서진 군사가 이웅 토벌에 실패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호북성 양양을 중심으로 장창이라는 거대한 반란 세력이 활약하고 있었고 또 다른 이유는 지역을 나누어 맡고 있는 여러 황실(사마씨)의 왕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며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AD303년 당시 조정의 실력자는 사마예였지만 이에 대항하는 하북지역의 사마영, 관중(서안)지역의 사마옹, 그리고 산동성 지역의 사마월 등이 서로 견제하며 할거하고 있었으므로 반란세력들을 통합하여 토벌하지 못했다.     

이웅의 주도하에 적조지역에서부터 세력을 계속 넓혀가는 동안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주민들은 계속되는 전쟁을 피해 장강을 따라 남쪽지역으로 도망가 버렸으므로 군대를 먹일 식량이 매우 부족했다. 이류와 이웅의 무리들은 노략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또한 고산지역이 대부분인 이 지역 특성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군사들은 주리고 궁핍했고 사기는 떨어졌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나상의 부하 평서참군 서여가 나상에게 문산태수를 시켜주면 이류를 즉각 토벌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서여의 생각은 자신의 고향 부릉(사천성 중경)출신인 범장생의 도움을 얻어서 식량을 공급받으면 쉽게 이류를 토벌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나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화가 난 서여는 이웅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그 에게 범장생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이웅은 범장생이 촉지역에서 명성은 물론 덕망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그를 초빙하여 군주로 삼고 자신이 스스로 신하가 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범장생은 극구 거절했다. 제장들이 굳게 존위에 나아가기를 권하였으므로 이웅은 할 수없이 받아들여 성도왕이 되었다.(AD304)     

 

왕이 된 이웅은 일단 서진의 형법체제를 폐기하고 일곱 조목으로 줄였다. 돌아가신 아버지 이특을 성도경왕으로 추존하고 생모 나씨를 왕태후로 올렸다. 숙부 이양을 태부로 삼고 사촌 이리를 태위, 이국을 태재로 임명했으며 이운은 사도, 이황은 사공, 염식은 상서령, 그리고 양포를 복야로 삼았다. 이웅은 사촌동생(즉 숙부 이함의 아들) 이국과 이리의 재능을 매우 높이 사서 항상 그의 의견을 들어 결정을 내렸고 이국과 이리 또한 이웅을 대하는 것이 깍듯하고 엄중했다. 

 

⑸ 범장생 초빙과 이웅의 황제 등극(AD306)

 

팔 왕자의 난 한 가운데 있었던 AD303-AD306년 저간에 서진 조정의 실력자는 사마예에서 사마영을 거쳐 사마옹과 사마월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냥 순차적으로 옮겨 간 것이 아니라 연대하여 동지였던 사이가 적으로 바뀌기를 반복하며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정권 수뇌세력들이 한 해가 멀다하고 교체되는 상황에서 이웅을 포함한 지방 토호세력들은 자신의 영역을 착실히 확장해 나갈 수가 있었고 그 시초가 이웅의 성한(成漢)과 유연의 전조(前趙)인 셈이었다. 성도에서 성한을 건국한 이웅은 부릉(중경)에 있는 범장생을 정중히 초빙했다. 범장생이 성도에 도착하자 이웅은 성문 밖까지 나아와 영접했고 손수 홀판을 주면서 승상이라는 벼슬을 내리면서 범현(范賢)이라고 불렀다. 박학하고 다재다능한 범장생은 AD318년 약 100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촉나라 사람들은 그를 거의 신처럼 받들었다고 했다. 이웅은 신하들의 권고를 받아 곧바로 황제에 등극하고 국호를 대성(大成)으로 정했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범장생에게는 천지태사(天地太師)라는 직책을 하사했으며 상서령 염식의 권고에 따라 한나라와 진나라의 예에 따라 백관을 설치했다.(AD306년6월) 

 

⑹ 이웅의 세력 확장 (AD314)

 

양난적은 이민족인 저족(氐族)의 두목 양무수의 아들이다. 양자가 북쪽 양주(梁州:지금의 섬서성 남부와 사천성 북부지역)에서 장사를 하다가 몰래 양민 한 사람을 팔았다가 죄에 걸려 양주자사 장관에게 채찍으로 맞아죽었다. 양난적은 장광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 때 양주자사 장광은 양호(楊虎)와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서로 양무수 도움을 끌어들이려고 사신을 파견했다. 양무수는 양난적을 보내 장광을 구원하라고 했으나 양난적은 장광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양호를 지원하였다. 원한도 원한이지만 뇌물을 양난적의 뇌물요구를 장광은 거부했고 양호는 뇌물을 줄 뿐만 아니라 양난적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 동네 모든 진귀한 보물은 모두 장광이 가지고 있소.”

 

양난적과 양호는 협공하여 장광의 군사를 격파했다. 부하들이 장광에게 퇴각하여 뒷 날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하자 장광은 소리쳤다.

 

“ 내가 나라의 중책을 맡아 도적을 토벌하지 못하는 것도 분한데

  이 자리에서 죽어서 이름이라도 신선처럼 남길 지언정

  어찌 도망가라는 말을 내게 할 수가 있느냐?“

 

분에 넘친 장광은 말을 마치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양주 사람들은 장광의 어린 아들 장매를 익주자사로 옹립했으나 저족들의 공격을 받고 절멸되었다.

 

승세를 탄 양호는 양주의 치소 한중에서 사람과 물자를 약탈하자 양주주민 장함은 군사를 일으켜 양난적과 양호무리를 몰아내었다. 양난적 무리들이 떠나자 장함은 그 지역의땅을 통째로 들어서 평판이 높은 이웅의 대성에 귀부했다. 이로써 이웅의 대성은 양주지역, 영주지역(사천성 남부 및 운남성) 및 형주지역(호북성과 호남성) 일대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하였다.(AD314)   

 

이웅은 매우 겸손하여 자신을 비우고 똑똑한 인재를 특별히 우대하여 재능에 다라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하였다. 숙부이자 태부 이양 또한 안으로 정치를 잘 하여서 백성들을 잘 길렀으며 세금을 감면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형벌과 정치를 신속하고 간략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죄수가 별로 없었고 감옥에는 적체된 죄수가 없었다. 이웅은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고 사관을 두어 역사를 기록하게 하였다.

 

남자는 1년에 곡식은 3곡 세금으로 내었고 여자와 병이 있는 사람은 그 절반으로 낮추었다.지역 특산물 세금도 견은 몇 장(장), 포는 몇 량(량)에 불과하였으므로 비록 다른 지역은 전쟁이나 가뭄으로 궁핍하고 가난했으나 촉지역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닫아 걸지 않았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 거의 모든 이민족들이 다투어 대성의 이웅에게 귀부하였으므로 국력은 날로 강성해졌다.

 

서진 군사가 부릉지역에 나타났다고 보고하자 이웅은 놀라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 나는 낭야(동진의 사마예가 황제되기 전 낭야왕임)가 미약해서 

   석륵에게 잡혀 먹을 것을 걱정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군대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라니 

   사람을 기쁘게 하는구나! “

 

사마광은 그러나 이웅의 대성 정부는 절도와 위엄이 없어서 무분별하게 작록을 내렸고 국고가 넉넉지 않았으며 군대 또한 규율이 엄격하지 못한 것이 그들의 흠이었다고 자치통감에 썼다.(AD314년 1월)   

 

 

⑺ 혼란 속에 속속 건국하는 지방 군웅(AD315-AD320)

  

AD311년 3월 팔왕자 난의 마지막 주인공 사마월이 병사했지만 이미 서진 조정은 국정 장악능력을 상실했다. 유총이 수도 낙양을 함락시켰고 사로잡힌 회제(懷帝) 사마치는 평아공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전조를 세운 유연이 죽자 발생한 유예의 쿠테타 틈을 타서 유총이 등극했고 유총이 죽자(AD318) 근준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유요가 황제가 되었다. 탁발의로는 지금의 대동지역에서 대(대)나라를 건국했고(AD315) 남쪽 건강으로 도망간 낭야왕 사마예는 동진을 건국했으며(AD317) 석륵도 지금의 하북 업지역을 중심으로 후조를 건국하였고(AD319) 장식이 피살되자 동생 장무는 음원의 지지를 얻고 전량을 건국하였다.(AD320) 비록 건국을 한 것은 아니지만 지방 세력으로 웅거하고 있는 형주의 도간, 천수지역의 사마보, 태원지역의 유곤, 청주지역의 조억, 유주지역의 단필제, 요동 금주 지역의 모용외를 포함하면 AD320년 중엽에 이미 중국은 십 수 갈래 조각으로 쪼개져 있은 셈이었다.

 

이웅의 대성은 태부 이양과 임회를 보내 남쪽과 남동쪽의 동진 영토를 침략해 나갔다. 전조의 주군 유요는 동쪽의 석륵을 피해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가면서 남안지역(감숙성 농서)을 치고 들어왔다. 그 지역을 지키고 있던 동진의 진안은 농성(감숙성 장가천 회족자치구)으로 도망갔다가 결국 잡혀 죽었다. 유요가 진안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 지역 강족과 저족(강씨 및 양씨)들은 다투어 유요에게 귀부하고 항복하였다. 유요는 감숙성 동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양난적은 진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양난두와 함께 구지(감숙성 농남 및 서화)를 버리고 남쪽 한중으로 도망갔다. 양난적은 대성의 이웅에게 인질을 보내고 항복을 요청했다. 양난적의 뇌물을 받은 대성의 안북장군 이치는 양난적으로 성도로 호송하지 않고 자신이 억류하였다가 유요의 군대가 물러가자 즉시 풀어 주었다. 양난적은 바로 무리를 이끌고 무도(감숙성 성현)를 장악한 뒤 웅거하였다.

 

이치는 자신의 판단 실수를 깨닫고 곧바로 이웅에게 양난적으로 공격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웅은 이치의 형 이함(李琀), 이함의 동생 이오를 파견했다. 여러 신하들이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반대했으나 이웅은 듣지 않았다. 이함과 이치는 너무 깊이 들어 간데다 뒤를 이어주는 후원군도 없었다. 양난적이 후미를 끊어버리자 갇힌 이함과 이치는 수천 군사와 함께 전멸하였다. 이웅은 후계자로 생각했던 장조카 이함(李琀)이 죽자 슬픔에 잠겨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⑻ 이웅의 후계자 선택 이반(AD324)

 

이웅은 본처 임씨에게 아들을 얻지 못했다. 첩에게서만 10명의 아들을 얻었다. 이웅은 어리기도 하고 정실 소생도 아닌 아들보다는 영특하고 효성이 깊은 형 이탕의 아들 이반을 후계자로 정했다.

 

“ 형이 아버지 이특의 적통이기도 하고  

  이반 또한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며 

  학문을 좋아한다.“

 

삼촌이자 태부인 이양과 사도 양달이 반대하고 나섰다.

 

“ 반드시 아들을 세워야 하는 것은

  분수를 분명하게 밝히고

  찬탈을 막기 위함입니다.

  춘추시대 송나라 선공(宣公)과 오나라 여채(餘蔡)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웅은 듣지 않았다. 이양이 이렇게 한탄했다.

 

“ 나라의 혼란은 이 일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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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6월06일 09시02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10일 15시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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