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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M)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9월18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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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55> 을혼의 등장(乙渾, AD465)

 

탁발준이 죽고 아들 탁발홍이 즉위하면서 실권을 잡은 사람은 당시 시중이면서 거기대장군인 을혼이었다. 이 사람은 교활하고 음흉하면서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황제의 조서를 고쳐서 평소 사이가 먼 상서 양보년과 가애인과 장천도를 가둔 뒤 죽였다. 시중이면서 사도이자 평원왕 육려는 그 때 온천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을혼이 사위감 목다후를 통해 급히 그를 조정으로 불렀다. 당연히 살해할 목적이었다. 목다후가 은밀히 육려에게 말했다.

 

 

  ” 을혼이 군주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간신들이 평원왕을 시기하는 마음이 있으니 

    조금 기다렸다가 조정이 안정된 뒤에 들어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육려가 이렇게 말했다.

 

  ” 지금 군부(주군)가 죽었다는데 어찌 우환을 걱정하여

    달려가지 않겠는가?”        

 

을혼은 매사 육려와 다투었는데 육려와 목다후는 결국 을혼에게 죽임을 당했다.(5월 16일) 다음날 조정은 을혼에게 태위, 녹상서사를 내리고 사도에는 동안왕 유니, 사공에는 상서좌복야 화기노를 임명했다. 황족 탁발욱이 을혼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였다.  

 

 

 

<56> 을혼의 국정농단(AD466) - 풍후의 친정

 

그 해 7월 태위 을혼은 승상으로 직위를 올려 여러 왕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주었다. 조정의 모든 대소사는 그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을혼은 공포정치를 계속하면서 조정 관리들에게 자신의 아내를 공주라고 부르라고 요구했다. 이조업무를 관장하던 가수라는 사람이 평민의 성을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공주라는 칭호를 부칠 수가 있냐고 거절하자 가수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시중 탁발비가 풍태후에게 을혼이 반란을 꾀한다고 보고했다. 이 당시 24세이던 풍태후는 탁발준의 부인이었다. 풍태후가 을혼을 체포하여 죽였다. 풍태후는 스스로 황제라고 하면서 중서령 고윤과 중서시랑 고려와 가수를 초빙하여 국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57> 유송의 내분과 설안도의 북위 항복(AD466) : 회서 7현 획득

 

당시 남쪽에서는 AD464년 집권한 무능하고 패륜적인 군주 유자업을 몰아내려는 AD465년 유욱의 쿠테타가 성공하자 그에 반대하는 AD466년 유자훈의 쿠테타가 이어지면서 내분이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회하지역을 방어하던 유송의 군사들 중에 유자업을 지지하던 서주의 설안도, 익주의 소혜개, 양주의 유원호, 연주의 필중경과 같은 세력들이 먼저 유송의 새 실력자 유욱에게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유욱은 이미 내부 혼란이 수습되었다고 생각하고 갑사 5만명을 보내 설안도 등의 무리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상서좌복야 채흥종이 나서서 말했다.

 

  “ 지금 설안도의 항복은 진심입니다.

    군사를 5만을 딸려 보내실 것이 아니라

    한 장의 편지와 한 명의 사신만 보내면 됩니다.

    많은 군사를 보내면 반드시 겁을 먹게 되어 북쪽으로 기울 염려가 있습니다.

    설안도는 이끄는 병력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잘 설득하고 타일러 확실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황제 유욱은 채흥경의 권고를 듣지 않고 정북장군부 사마 행남서주자사 소도성을 불러 물었다.

 

  ” 이 번 기회에 군대를 이끌고 나가

    북벌을 계획하려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소도성이 이렇게 말했다.

 

  ” 설안도는 교활하고 계략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지금 그를 몰아붙이면 아마 국가에 도움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유욱은 소도성의 부정적인 대답에 몹시 불쾌해했다.

 

  ” 지금 우리 여러 부대가 강하고 날카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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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이기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거요.

    경은 여러 말을 하지 마시오.“

 

설안도는 유욱이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한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사신을 북위에 보내 항복을 요청했다. 그리고 아들을 북위에 인질로 남게 하였다. 북위는 울원, 공백공 등의 장수를 보내 유송의 북벌군을 막도록 하였다.

 

설안도가 북위군에 항복하자 회서지역의 여러 군들이 앞 다투어 북위에 항복했다. 상채, 언성, 여남, 신채, 상수,항성, 심구 및 부양 지역이 이때 북위에게로 넘어갔다 

 

 

<58> 위의 남정(제 6차 위송전쟁, AD467)

 

회화 이서 지역은 북위의 영토가 되었지만 회하 북동쪽 지역은 여전히 유송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팽성(강소성 서주)의 설안도가 항복해 옴으로써 북위의 울원과 공백공은 팽성을 중심으로 유송군대를 밀어내는 작전을 펼쳤다. 유송의 장영의 부대를 격파하여 전사자 1만 여명이 발생하고 시체는 60여리에 걸쳐 늘어졌다. 장영은 심유지와 함께 목숨은 건졌으나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다 떨어졌다.

 

유송 황제 유욱이 패전의 소식을 듣고 채흥종을 불러 말했다.

 

  ” 내가 경에게 몹시 부끄럽소.“         

 

장영의 관직을 좌장군으로 낮추었고 심유지 또한 면직시켰다. 이로서 회하 서쪽과 함께 회하 이북의 네 개 주(청주, 기주, 서주, 연주)를 모두 잃었다. 

 

 

<59> 풍후가 정치를 돌려 줌(AD467)

 

AD467년 8월 29일 북위 주군 탁발홍의 부인 이씨가 아들 탁발굉을 낳았다. 관습에 따라 생모 이씨는 독약을 먹고 죽었으며 풍태후는 낳은 그 아이를 데리고 직접 길렀다. 그리고 탁발굉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되었으므로 정권을 탁발굉에게 넘겨주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탁발굉은 부지런히 국사를 처리하였고 상과 벌은 엄격하고 공정했으며 깨끗하고 절개있는 인물들을 등용시켜 도움을 받았다. 부패한 인물들을 내몰았고 특히 각 주의 목과 태수 중에서 청렴하지 않은 이들을 내쫓았다. 그래서 위나라 지방 관리들은 매우 깨끗하다는 정평이 소문이 자자했다.

 

유송의 장수 심문수가 동양(산동성 청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북위의 모용백요가 삼년 가까이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던 동양을 AD469년 1월에 함락시켰다. 심문수는 패배를 인정하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부절을 들고 재실에 앉아서 모용백요를 기다렸다. 북위 군사들이 그를 붙잡아 옷을 벗기고 끈으로 묶어서 모용백요에게 보내 강제로 절을 하게했다. 심문수가 말했다.

 

  ” 그나 나나 각 나라의 대신일 뿐인데 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용백요는 당장 묶었던 끈을 풀어주고 음식을 먹인 뒤 수도 평성으로 압송했다. 북위 탁발홍이 그를 풀어주고 하객으로 대우했다. 심문지는 뜻을 굽히지 않고 유송에 충성심을 나타내자 가상하다고 여기고 좋은 옷과 높은 직책을 주어 예우하였다. 북위에서는 큰 공을 세운 모용백요에게 도독청제동서삼주제군사, 정남대장군, 개부의동삼사라는 높은 직책을 내리고 제남왕으로 책봉하였다. 모용백요는 매우 깨끗하고 절도있는 정치를 펼쳤으므로 주민들이 매우 존경하고 따랐다.(AD 467)  그러나 을혼이 국정을 농단할 때 모용백요가 그에게 많이 의존했던 책임을 물어 탁발홍은 모용백요와 그의 동생 모용여의를 죽였다.(AD470)   

 

당시 위에는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으므로 탁발홍은 백성을 부유함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누고 각 등급별로 삼품으로 나누어 세금을 물도록 했는데 상등의 삼품 세수는 모두 수도로 보내되 중등의 삼품은 어려운 다른 주로 보냈고 하등의 삼품은 자체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잡다한 15개의 세금을 모두 없애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때부터 백성들의삶이 윤택해졌다. 그리고 유송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AD469) 

 

 

<60> 북위의 이부와 이흔(AD470) 

 

북위의 남부상서 이부와 의조상서 이흔은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내던 사이로 모두 재능이 뛰어나서 탁발도와 탁발홍에게 총애를 받고 신임이 두터웠다. 그러나 이흔이 상주자사로 있는 동안 뇌물사건에 휘말리자 이부가 그것을 은폐해 주었다. 탁발홍이 그 정보를 듣고 이흔을 불러들여 다시 조사한 결과 사형에 해당하였다. 

 

이 때 이부의 아우 이혁이 풍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황제는 이미 풍태후와 사이가 많이 멀어져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흔에게 다가가서 황제에게 이부 형제의 은밀한 행동을 밀고하여 죽임을 면하라고 귀띔하였다. 이흔이 사위 배유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이부와는 비록 먼 친척뻘이지만

    그 동안에 은혜를 입은 것은 동기간 그 이상이었다.

    나더러 이부에게 이렇게 하라고 권하지만 그 내막도 잘 모르거니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뇌물 건으로 자살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내 죽지 못했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배유가 이렇게 말했다.

 

  ” 풍천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평소 이부에게 큰 피해를 입어서

    그 가족들을 깊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물어보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이흔이 그렇게 하도록 했다. 마침 다른 사람도 이부의 잘못을 서른 가지나 열거하였다. 탁발홍이 크게 노하여 이부 형제를 죽였다. 이흔은 사형을 면하고 매를 맞고 머리카락이 잘려 노역을 하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태창상서가 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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