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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R)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0월23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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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89> 제나라의 혼란을 틈탄 남정(AD494)

 

AD493년부터 남쪽 제나라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복잡하고 불안했다. 연초에 태자 소장무가 35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이어 옹주자사 왕환의 반란이 있었고 또 중서랑 왕융의 쿠테타 시도가 있었다. 게다가 황제 소색은 병이 매우 위중하여 후사를 결정해야 했는데 아들로 이어줄지 아니면 손자인 소장무의 아들로 이어줄지를 고민하다가 겉으로 똑똑한 척하기만 하는 망나니 손자 울림왕 소소업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 다음해인 AD494년 황족인 서창후 소란이 반란을 일으켜 소소업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 소소문을 세웠다. 소장과 소자륭 등이 소란을 축출할 계획을 세우다가 실패했고 또 옹주자사 소자무 또한 군사를 일으켜 소란을 토벌한다고 하다가 실패하여 죽었다. 소란이 결국 황제자리를 찬탈했다. 소란은 죽은 황제 소색의 사촌 동생이었다. 

 

남쪽지역이 혼란에 빠진 차에 제나라 옹주자사 조호가 항복하겠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통일의 꿈을 가지고 있던 탁발굉은 AD494년 11월 대대적인 남침을 실행에 옮겼다. 크게 네 갈래로 나누어 내려갔는데 동쪽 봉부방면에는 탁발연, 남동부 신양방면으로는 유창과 왕숙, 서남방면 양양으로는 설진도, 그리고 서쪽 한중방면으로는 유조를 보냈다. 

 

그러나 투항하겠다던 옹주자사 조호의 사신이 오지 않자 탁발굉은 남정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일부는 내려가자고 하고 일부는 그냥 머물자고 했다. 진군장군 이충이 말했다.  

 

  ” 우리는 천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초창기입니다.

    사람들은 안정되기를 바라니 의당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 저들이 항복하겠다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가 없다.

    만약 거짓이라면 내가 군사를 이끌고 회하지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설득하도록 하겠다.

    만약 참이라하더라도 지금 그에 맞추어 대응할 수가 없으니 

    이미 때를 놓친 것이고 오로지 의로운 성의를 다하려는

    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뿐이요.“

  

탁발징이 간곡하게 말했다.

 

   ” 저들의 항복 의사는 거짓인게 분명합니다만

     옛 수도에서 옮겨온 백성들이 지금 매우 궁핍합니다.

     머물 집도 없고 음식도 충분치 못합니다.

     이제 곧 봄이 오면 농사준비도 해야 할 텐데 

     이렇게 전쟁으로 붙잡히는 것을 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만에 하나 항복해 온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미 이까지 내려 온 것이니 환영나오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사공 목량 등 많은 조정대신들은 전쟁을 계속하기를 바랐다. 탁발징이 그들에게 쏘아붙였다.

 

  ” 경들은 외직에 있을 때에는 하나같이 전쟁을 반대하더니

    황상을 대면하고부터는 곧바로 전쟁론자가 되었습니다.

    앞뒤가 다르고 일은 거짓되니 

    어찌 나라의 선비로써 대의와 의로움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일이 그르치고 기울어진다면 공과 같은 무리들 때문입니다. “  

 

이충이 거들며 말했다.

 

   ” 임성왕(탁발징)의 생각이야말로 사직에 대한 충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탁발징에게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을 불충하다고 하는 것이 작은 충성일 뿐이라고 질책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 신은 어리석고 아둔하여 작은 충성밖에는 모릅니다만 

    오로지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자는 것입니다.

    큰 충성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말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탁발징의 말을 듣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계속 내려갔다. 수양을 공략하고 남양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자양(하남성 방현)을 습격했지만 이 성 또한 빼앗지 못했다.

 


 

진현달

 

 

 유창

 

 

남제에서는 진남장군 왕광지로 하여 사주(하남성 신양)을 방어하게 하고 우위장군 소탄지를 서주방어, 심문계는 예주를 각각 막게 하였다. 그리고 진현달에게 사지절 도독서북토제군사라는 최고책임자 역할을 부여하여 북위 토벌의 책임을 맡겼다.   

 

AD495년 1월 29일 탁발굉이 회하를 건넜고 2월에 들어 수양에 도착했는데 약 30만 대군에 철기병 행렬이 끝이 없었다. 탁발굉이 수양을 지키고 있던 제나라 군사에게 나와 보라고 하자 예주자사 소요창은 최경원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탁발굉은 최경원에게 왜 소란이 반발을 일으켰는지, 정당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캐물었으나 최경원은 곽광의 예를 들면서 소란이 직접 정권을 잡은 것을 변호하였다. 탁발굉은 최경원의 해박한 역사지식과 솔직함과 담대함에 깊은 감명을 받아 술과 고기와 의복을 하사하고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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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굉은 군사를 이끌고 회하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 종리(강소성 봉두)로 갔다. 종리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그대로 두고 대군을 남쪽으로 몰아 제나라 수도 건강을 위협했다. 

 

상주(하남성 업지역)자사 고려가 표문을 올려 간절히 회군하기를 청했다. 이유는 이기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 군사가 열 배 많으면 포위를 하고(十則圍之)

    다섯 배가 많으면 공격을 한다고 했습니다.(五則攻之)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항복해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계략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적군의 본진이 평정되지 않으면(大鎭未平)

    작은 성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不可守小故也) 

    물을 막으려면 그 근원부터 막아야 하고(壅水者塞其原)

    나무를 자르려면 밑둥부터 먼저 자르는 법입니다.(伐木者先斷其本)

    돌아가셔서 덕정을 베푸시면 저절로 귀화해 올 것입니다.“

 

상서령 육예도 전투 환경이 너무 열악하므로 회군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해 올렸다. 탁발굉도 그렇게 생각하고 군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갔다.(AD495년 3월) 낙양으로 돌아 온 탁발굉은 교육을 통한 덕치를 강조하는 육예 등 조정대신들의 건의를 적극 수용하여 국자학, 태학, 4문 소학 등 여러 계층의 학교를 전국적으로 세웠다. 그리고 30세 이하에게는 선비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90> 현군 탁발굉과 그의 핵심 측근 설총(AD495)

 

탁발굉은 책읽기를 매우 좋아해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으며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타면서도 항상 바른 길을 탐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글짓기를 좋아하여 말 위에서 입으로 읊었는데 다 되고 나면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거의 십여 년 조서를 직접 작성해서 내려 보냈다. 현명한 인사를 존중했고 선한 것을 따랐다. 정이 깊었고 사람을 만날 때에도 항상 평민처럼 마음을 가졌는데 특히 이충, 이표, 고려, 왕숙, 곽조, 송변, 유방, 최광, 형만 등과 같이 어울리며 문학과 경학으로 교류하였다.

   

탁발굉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는 치서시어사 설총이 있었다. 치서시어사는 일종의 황제 비밀자문관으로써 황제의 황명을 직접 작성하는 중요한 일을 하는 기관이다. 그는 탄핵을 피하지 않는 강골로써 황제가 관대하게 봐 주려는 사람까지도 세게 다투었다.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했다.

 

  ” 나도 설총을 보면 껄끄러운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여러 차례 옮겨서 직합장군, 산기시랑 및 황문시랑이 되었는데 비록 겉으로는 덕과 예의로 대우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충실한 심복으로 의지하였다. 직접 황제근위병을 지휘하였고 모든 지휘관을 솔선 지도하였으므로 태화(AD4877-AD499)연간 내내 직합장군이라는 칭호를 달고 다녔다. 조정이 파하고 나도 황제의 장막 안에서 모셨으며 주야로 시정의 잘잘못을 아뢰었으며 매번 바로 잡을 방법을 간청해 올렸고 황제는 대부분 그의 제언을 들어주었다. 그는 중후하고 침착하고 입이 매우 무거워 겉으로 보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황제가 그를 높은 지위에 임명하려고 하면 번번이 사양하였다. 황제가 그런 그의 성격을 잘 알았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 경에게 내린 하늘의 작위가 너무 높으니

    사람이 주는 명예가 따라갈 수가 없구려.

    (卿天爵自高 固非人爵之所能榮也)“   

       

<91> 우열과 그의 아들(AD495)

 

AD495년 12월에 탁발굉이 크게 인재를 뽑았는데 광록훈 우열의 아들 우등이 옛 사례를 들어서 자신의 승진을 요구하였다. 우열이 놀라서 조정에 표문을 올려 말했다.

 

  ” 겸손하고 사양해야 할 성스러운 조정에서

    제 아들이 옛 고례를 들어서 승진을 요구하고 있으니

    이는 제가 평소에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탓입니다.

    저를 관직에서 내 쫓아서 똑바른 교훈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탁발굉이 말했다.

 

  ” 이(우등의 승진 요구)는 양식이 있는 말이니

    우열이 판단할 일이 아니오.“

 

탁발굉이 우등을 불러서 말했다.

 

  ” 짐이 장차 천하를 깨우쳐 바른 길로 이끌려고 한다.

    경의 아버지가 겸손의 아름다움과 곧은 신하의 절개를 지녔으니

    내가 경을 태자익군교위로 나아가게하고 

    또 경의 아버지는 산기상시 및 요성현자(작)에 책봉한다.“

 

그리고는 모든 신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라에 한 가지 한탄스러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신하들이 잘한 것이나 잘못한 것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꺼리는 풍토다. 

    군주는 항상 좋은 권고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신하들은 항상 충성스런 충언을 올리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부터 내가 추천하는 한 사람이 불가한 것이라면 

    경들은 그것의 잘못을 똑바로 지적해야 하는 것이고

    만약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등용하지 않으면 

    마땅히 경들이 추천하여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좋은 사람을 얻게 되면 상을 내리는 것이고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얻는 것이니 경들은 그렇게 알라!“

 

이 해에 북위는 처음으로 태화오수(太和五銖)라는 동전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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