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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K)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0월2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17일 14시1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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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51) 모용준과 모용수의 갈등(AD358)

 

모용준의 둘째 동생 모용수는 단말배의 딸과 결혼하여 모용령과 모용보를 낳았다. 모용수의 어머니도 모용준과 같은 단씨였다. 당시 단씨는 선비계통 종족 중에서 모용씨와 거의 동급일 정도로 높은 신분이었다. 그러니 단씨 사람들은 황제 모용준의 처 가족혼씨를 아주 가볍게 보았다. 비록 모용준과 모용수가 피를 나눈 형제로 서로 일곱 살 차이였지만 재능이나 용맹이나 인물 면에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경쟁관계가 있었다.  

 

이런 호기를 알아차린 사람이 중상시 열호였다. 열호는 모용수의처 단씨와 그의 측근 고필을 엮어서 무고죄를 뒤집어 씌웠다. 모용준은 정위에게 즉각 조사를 명령했고 혹독한 심문절차가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했다. 모용수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처 단씨가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 어찌 그렇게 매섭고 독하시오.

  자복하는 것만 못하지 않소?“

 

단씨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 어찌 죽는 것이 무섭거나 애석해서 그랬겠습니까?

  스스로 반역 무고를 인정하게 되면

  위로는 조종으로 

  아래로는 오왕(모용수의 존호)에 누를 끼칠 것이라 

  자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씨는 옥중에서 죽고 모용수는 화를 면하고 평주(지금의 요동땅)자사로 강등되어 요동지역으로 내보냈다. 모용수가 죽은 단씨의 동생을 처로 삼자 모용준의 처 가족혼씨가 쫓아내고 자신의 동생을 처로 맞이하게 했다. 모용수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모용수의 처 가족혼씨를 매우 냉대하자 형수 가족혼씨가 더욱 모용수를 미워했다.  

 

 

(52) 모용준의 슬픔과 황태자 모용위의 모자람(AD359)

 

모용준은 장자 모용엽이 3년 전(AD356)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이 매우 안타깝고 슬펐다. 그런 심경을 잘 헤아린 장사 이적이 모용엽의 여덟 가지 덕을 말했다. 효성스럽고 총명하며 의연하고 아부를 미워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여러 재주를 갖고 있고 또 겸손하며 베푸는 마음씨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용준이 이적에게 이렇게 물었다.

 

“ 과한 칭찬이오만 살아있었다면 내게 여한이 없었을 것이요. 

  경무태자(모용위)는 어떻게 보시오?“

 

이적이 서슴없이 말했다.

 

“ 태자의 팔덕 또한 이미 소문이 나 있습니다만

  사냥을 너무 좋아하고

  음악에 묻혀 사는 것은 좀 고쳐야 할 겁니다.“ 

 

모용준이 그렇게 생각하고 태자를 불러 깊은 교훈으로 삼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용위는 불평을 하면서 가슴속에 그의 말을 깊이 묻어 두었다.(AD359)

 

(53) 전연과 동진의 양곡(동아)전투(AD359)

 

동진의 태산태수 제갈유가 수륙 2만 군사로 하남성 형양으로부터 황하를 타고 내려와 전연을 쳤다. 전연에서는 모용평과 장낙태수 부안이 보기 5만 군사로 동아(산동성 양곡 동북쪽)에서 제갈유와 맞붙었다. 제갈유의 군사가 대패했다.  

 

동진에서는 예주자사 사만과 서주자사 치담이 전연에 대비하고 있었다. 예주자사 사만이 오만하게 시나 읊고 사병들을 돌보지 않자 그의 형 사안이 걱정하면서 말했다.

 

“  너는 한 군대의 원수가 아니냐.

   의당 장수들과 사병들을 접대하면서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할 것인데

   이처럼 오만방자한 행동을 하다니

   어떻게 큰일을 처리할 수가 있겠느냐?“

 

사만이 병졸들을 불러 모은 다음에 말 한마디 없이 뚫어지게 보다가 등 긁기를 쳐들면서 말했다.

 

“ 보아하니 제장들은 강병 같구먼 ! ”

 

그 소식을 들은 사안은 사만이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신 장졸들을 직접 만나서 후하게 대접하여 앞으로의 전투를 부탁했다. 사만이 군사를 이끌고 회하를 거슬러 낙양을 도우러 갔는데 치담은 병으로 치소가 있던 팽성(강소성 서주)로 돌아왔다. 사만은 치담이 물러난 까닭이 전연군사가 강해서 그런 것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의 군대를 뒤로 물려 후퇴했다. 이 때를 놓치지 않은 전연 군대가 습격하자 동진의 군대는 무너졌다. 동진군대 내에서 반란의 기미가 있었지만 명성 높은 사안을 꺼려 일으키지 못했다. 사만은 폐서인이 되었고 치담은 강등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전연의 영토는 황하 이남의 하남 땅, 즉 영천(하남 우현), 허창, 박주(안휘성 호주) 및 서주(강소성 서주)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54) 모용준의 와병과 후계논의(AD359)

 

AD359년 겨울 모용준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만 40 이었다. 바로 밑의동생 대사마 태원왕 모용각에게 말했다. 

 

“ 내 병은 반드시 나지 못하는 병이다.

  지금 두 방면(동진과 전진)이 평정되지 못했는데

  경무(모용위, 아홉살)는 아직 어리기만 하구나.

  국가의 어려움이 많은 데 

  송나라 선공(동생 목공에게 양위)처럼 

  너에게 양위하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떤가?“

모용각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 태자가 비록 어리기는 하나 

  해로움을 이기고 치세를 이룰 군주이십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끼어들겠습니까?“

 

모용준이 화를 내며 말했다.

 

“ 어떻게 형제 사이에 이런 수식의 말을 한단 말이냐.”

 

모용각이 말했다.

 

“ 신이 천하를 짊어질 자격이 있다면

  어찌 어린 조카 군주를 보필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용준이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말했다.

 

“ 너는 능히 주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니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느냐.

  이적은 청렴하고 방정하며 충성스럽고 밝은 사람이니

  네가 그를 잘 대우해 주어라.“

 

그리고는 서둘러 요동에 가있던 동생 모용수를 업으로 불러 들였다.(AD359년 12월)  

 

 

(55) 모용준의 사망과 모용각의 리더십(AD360)

 

AD360년 정월 20일 모용준이 업에서 동진을 치기 위한 대군을 징집하여 대열병식을 올렸다. 대사마 모용각과 양무가 전군을 지휘하여 동진을 침입하려던 차에 모용준이 위독해졌다. 모용준은 서둘러 모용각, 양부, 모용평, 모여근을 불러들여 유조를 내렸다. 모용준은 그 다음날 죽었다. 모용위가 만 11세의 나이로 전연 2대 황제에 즉위했다.   

 

2월에 모용준의 처 가족혼씨를 태후로 올리고 태원왕 모용각이 태재가 되어 조정 정치를 도맡았으며 상용왕 모용평(모용준의 숙부)을 태부, 양무는 태보, 그리고 모여근이 태사가 되어 조정 정치에 참여하였다.   

 

모여근은 나이가 많아서 모용황 시절부터 공이 컸고 또 강직하고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모용위도 그렇지만 황실의 모용각이나 다른 모용씨들을 존대하는 마음이 엷었다. 그런 모여근이 난을 일으키려 모용각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주상이 어리고 모후가 정치에 간여하니 

  전하께서 당연히 변고를 사전에 막아 스스로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지금 나라를 세운 공은 오로지 전하의 몫인데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 것은 민족 대대로의 전통입니다.

  산릉의 장례작업이 끝나는 대로 

  주상을 폐위시키고 왕으로 강등시킨 후

  전하께서 높은 자리를 밟으시면

  위대한 전연의 무궁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용각이 깜짝 놀라 모여근에게 말했다.

 

“ 공께서는 취하셨습니까?

  어찌 말씀하시는 것이 이렇게 패역합니까.

  나와 공이 함께 들어가서 황제의 유조를 받은 지가 언젠데

  이렇게 갑자기 이런 의논을 일으킨단 말입니까?“

 

모여근이 얼굴을 붉히며 사과하고 물러났다. 모용각이 동생 모용수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모용수는 즉각 모여근을 죽여야 한다고 권하였다. 모용각이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 지금은 새로 대상을 당했네.

  지금 두 나라(동진과 전진)가 틈새를 엿보고 있는 터에 

  재보들이 서로 죽이면 먼 곳과 가까운 곳 사람들의 

  희망을 어그러뜨리는 일이 아니겠나.

  좀 참아야 할 것일세.“

 

비서감 황보진이 모용각에게 말했다.

 

“ 모여근이 원래 용렬한 사람이었는데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 고명까지 받았습니다.

  소인이 잘 알지는 못하나 국가의 슬픈 일이 있고 부터는  

  더욱 더 교만해지니 장차 화란의근원이 될 것입니다.

  밝으신 공께서 주공의 자리에 계시면서 

  사직을 위해 깊이 도모하시고

  일찍 그를 처단해 주십시오.“

 

그러나 모용각은 또 다시 듣지 않았다. 자신의 위상이 위태롭다고 느낀 모여근은 태후 가족혼씨와 황제 모용위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태재(모용각)과 태부(모용평)가 장차 불궤한 짓을 꾸미고 있습니다.

  청컨대 신이 금병을 이끌고 가서 저들을 죽이게 해 주십시오.“

 

태후 가족혼씨가 그러려고 할 참에 모용위가 (어머니 가족혼에게) 말했다..

 

“ 두 공은 짐과 매우 가깝고 현명하신 분들이요.

  그렇기에 돌아가신 선제께서 특별히 뽑아서 

  고아와 과부를 의탁하신 겁니다.

  반드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인데 

  태사께서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님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마침내 중지하였다. 그러나 모여근은 끈질기게 고향을 그리는 가족혼태후와 모용위를 꼬드겼다.

 

“ 지금 천하는 쓸쓸하고 외부의 침략이 여럿이어서

  나라에 큰 걱정거리가 깊으니

  동쪽으로 돌아감만 못합니다.“

 

모용각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숙부 모용평을 찾아가서 모여근의처리방안에 관하여 의논을 했다. 모용각과 모용평은 우위장군 부안을 보내어 역모를 획책한 모여근과 그의 일족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나라가 대상을 치르는 가운데 황실 핵심 중신의 일족이 피살되면서 어수선하고 흉흉한 분위기가 조정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각은 침착했고 걱정스런 기색을 전혀 띄지 않았으며 호위병도 딱 한 명만 데리고 다녔다. 어떤 사람이 엄하게 경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자 모용각이 말했다.

 

“ 사람의 마음이 바야흐로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는데

  마땅히 평안하고 진중하게 해야지

  어찌 사람들을 놀라게 하겠느냐.“

 

모용각은 비록 조정의 가장 큰 중책을 맡고 있었지만 

항상 예의바르고 조심조심했으며 매사 부지런하게 담당했다.   

마음을 비우고 선비들을 대했으며 훌륭하게 자문해 주었고

재주를 헤아려 임무를 주었으니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이 거의 없었고  

혹 잘못을 범하더라도 조용하게 다른 자리로 옮기게 하였으므로        

원래의 신분을 잃지를 않았을 뿐더러

이를 경계삼아 더욱 온전히 행하도록 은밀하게 격려를 한 셈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 당시 관리들 사이에 가장 부끄러운 욕이 ‘재공으로부터 관직을 옮겨 받은 사람’일 정도였다.     

 

모용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진 조정은 이 때야 말로 전연을 공격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직 환온만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 모용각이 아직 살아있으니

  걱정거리는 더 커진 셈이오.“

 

 

태재 모용각은 동생 오왕 모용수를 사지절, 정남장군, 도독하남제군사, 연주목, 형주자사로 삼아 여대(하남성 상구시)에 진수하게 하고 손희를 병주자사로 고 부안을 호군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군사로 황하 이남의 지역을 순무한 뒤 회하를 거쳐 돌아오게 하였다. 이로써 전연은 확실히 이 지역을 영토로 확보한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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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사이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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