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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20 : 잔학한 황제로 이어진 북제北齊(S)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4월30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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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18> 고엄이 대장군이 되다 : 북제와 북주의 화해(AD568)

 

해가 바뀌어 AD568년 2월 동평왕 고엄(황제 고위의 바로 아래 동생)은 녹상서사에다 새로 대장군 자리까지 꿰어 찼다. 두 달 뒤인 4월에는 상황 고담의 부인 호태황후의 오빠 호장인을 좌복야, 화사개를 우복야로 임명했다. 이번 인사는 중서감 화사개가 재상급에 오르기 위해 좌복야 서지재를 강제로 몰아내고 차지한 인사였다. 서지재는 의술이 뛰어나서 고담의 병을 치료해 준 공이 큰 사람이었으나 고담의 병이 낫자 화사개가 졸라대는 바람에 연주자사로 내 보낸 것이다. 화사개만 재상이 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었으므로 태황후의 오빠 호장인을 넣어 좌복야를 시킨 것이다. 그 해 가을 10월에 좌복야 호장인을 상서령으로 올려보내고 화사개는 꿈에 그리던 좌복야로 승진했다. 북주에서도 달해무가 태부, 울지형이 태보, 우문헌이 대사마가 되는 인사이동이 있었다.  

 

이 때 북주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하나는 북주의 수공 양충(수나라 창업자 양견의 아버지)이 죽으면서 양견이 수공의 자리를 세습한 것이다. 북주 실력자가 양견의 능력을 알아보고 자기 심복으로 삼고자 했는데 양충이 이렇게 경고했다.

 

  ” 시어머니가 둘이면 며느리 노릇하기 힘들다. 가지 말거라“ 

 

두 시어머니란 우문호와 북주 황제 우문빈과 우문호를 빗 댄 말이었다. 또 다른 중요한 일은 여러 번 화해하자는 북제의 요청을 마침내 받아들여 북주와 교류를 시작한 일이다.   

 

 

<119> 고담 병사-화사개 실권 장악(AD568)

 

서지재의 처방으로 병이 많이 호전된 줄 알았던 상황의 병이 AD568년 11월 다시 재발했다. 연주자사로 쫓겨 가는 중이던 서지재를 급히 소환했다. 서지재가 업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병세가 급히 악화된 고담은 좌복야 화사개의 손을 붙잡고 부탁했다.

 

  ” 나에게 죄를 짓지 말거라.“

 

그 말을 마친 뒤 고담이 3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다음날 도착한 서지재는다시 연주로 보냈다. 화사개는 일단 고담의 죽음을 비밀로 했다. 황문시랑 풍자종이 왜 그래야만 되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 신무황제(고환)도 그랬고 문양황제(고징)도 그랬소.

    지금 지존(고위)이 어리고 “ 

    왕공들 중에서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오.

    대신들을 대전에 불러서 이 문제를 장차 의논해 볼 것이오.

    그 때까지만 비밀에 부칩시다.”

    

화사개는 평소 태위 조군왕 고예와 영군장군 누정원과 사이가 나빴다. 따라서 황문시랑 풍자종은 화사개가 유조를 위조하여 고예를 내치고 누정원의 금위병을 탈취할 것이 걱정되었다. 풍자종이 화사개를 이렇게 설득했다.

 

  “ 현재 왕공, 대신들은 모두 상황과 황제의 은덕을 입은 사람들이니

    다른 생각을 품을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상황께서 며칠 째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시니

    알 만한 사람들은 변고가 생긴 것을 다 압니다.  

    오히려 알리지 않는 것이 또 다른 변고를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화사개가 그렇게 생각하고 드디어 발상을 공표하였다. 고담이 죽은 지 5일 만이었다. 풍자종은 호태후의 여동생 남편이었으므로 호태후와 같은 편일것으로 생각하여 정부자사로 내쫓았다. 북제 조정의 실권은 화사개, 원문요, 고예 세 사람에게 쥐어졌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고담은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하고 방탕하였다고 평가했다.부역을 번잡하게 일으켰고 부세가 과중하여 백성과 관리들이 몹시 힘들어 했다. 따라서 상황이 죽은 바로 다음 나온 교서에서 다음과 같은 조서가 내려졌다.

 

  “ 진행 중인 모든 공사는 중단한다..

    궁인과 노비 중에서 늙고 병든 사람은 모두 방면한다.

    친척의 죄에 연루되어 유배 간 사람들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다.”(AD568)

 


<120> 북제의 팔귀(八貴) : 화사개를 몰아내려는 시도(AD569)

 

고담이 죽고 나서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사람은 역설적이지만 죽은 고담이 가장 아끼는 화사개였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고담의 침실을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고담의 신임을 받던 사람이었다. 뿐 만 아니라 재주가 좋아서 호태후도 즐거워하고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들 고위도 화사개를 따르고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이 때 정주자사로 있던 고담의 동생 박릉왕 고제(고환의 12째 아들)는 형이 죽었으니 실권은 자기에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 그 소식을 들은 화사개는 몰래 자객을 보내 고제를 죽였다.

 

고담이 죽으면서 북제 조정은 화사개를 중심으로 여덟 명의 귀인(귀인)이 실권을 장악했다.누정원, 조언심, 원문요, 당옹, 기련맹, 고아나굉, 호장찬이 그들이다. 그러나 황실 종친 중심으로 화사개에 대한 반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태위 고예(고담의 사촌 형)와 대사마 풍익왕 고윤(고담의 동생)과 안덕왕 고연종(고징의 아들, 고담의 조카)은 원로대신 누정원과 원문요를 설득하여 화사개를 외직으로 내칠 것을 황제에게 주청하였다.    

 

호태후가 조정에서 연회를 벌이는 도중에 고예가 달려와서 화사개의 죄상을 고해바쳤다.

 

 

  “ 화사개는 돌아가신 상황의 농(농)신으로써 

    성 안에 있는 여우이고 사직에 있는 쥐새끼입니다(城狐社鼠). 

    재화를 뇌물로 받고 궁액(황궁)을 더럽히고 어지럽혔습니다.

    신 등은 불의를 눈감고 입 다물 수 없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진술하는 것입니다.” 

 

호태후가 냉정하게 되쏘았다.

 

  “그렇다면 어찌 상황이 살아계실 때 말씀하지 않으셨소.

   오늘 이 고아와 과부를 기만하려는 것입니까?

   내 술을 마셔야 하니 다른 말씀을 하지 마세요.”

 

좌주에 있던 안토근이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말했다.

 

  “ 신은 본래 호족(이란) 상인으로써 

    여러 귀인들의 말석도 차지하기 어려운 신분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마다하고 말씀드리는 것은  

    화사개를 내치니 않는다면 조야가 안정되지 못할 것은 분명합니다.”

 

호태후가 말했다.

 

  “ 다른 날에 다른 기회에 그 문제를 의논할 것이니 

    모두들 해산하십시오.”

 

연회가 파하자 고예는 관모를 땅에 팽개쳤으며 다른 사람들은 옷과소매를 털고 이러나기도 하였다. 다음날 고예와 여러 사람들이 황궁으로 달려와 원문요를 대표로 세 번이나 태후에게 화사개 축출을 주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좌승상 단소가 호장찬을 시켜 태후의 말을 전해 주었다.

 

  “ 아직 재궁이 빈소에 있어서 그 문제를 의논하기 너무 촉박하오.      

    제왕들은 다시 생각해 주시오.”

 

고예 등은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사죄하고 물러섰다. 태후는 이 문제를 우너만히 해결한 것이 오빠 호장찬의 공로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 누이동생과 우리 모자의 가문을 이룬 것은 오빠의 큰 공이었소.”  

 

태후는 고예 등에게 후한 상을 내려 무마하는데 성공했다.

 

 

<121> 화사개의 꾐에 넘어간 호태후(AD569)

 

여러 종친들이 하나같이 화사개를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자 호태후와 황제는 화사개를 불러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화사개가 대답했다.

 

  “ 상황께서 군신으로 계실 때 저를 지극히 후하게 대하셨습니다.

    지금 상황께서 돌아가신 상황에서 대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당치도 않은 못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기유覬覦)입니다.

    지금 저를 내치시면 곧바로 폐하의 날개가 잘리는 것입니다.

    고예 등의 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 원문요는 화사개와 함께 선제의 임용을 같이 받았는데

         어찌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아야 한다는 말인가?

         간다면 둘을 같이 주 자사로 보내야 할 것 아닌가. 

         단 예전과 똑같이 황궁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하라. 

         다만 아직은 상중이니 상이 끝나기를 기다려 그렇게 인사 할 것이다’

     그러면 고예 무리들이 마침내 제가 물러난다고 생각하고 기뻐하며 좋아할 것입니다.”

 

호태후는 그대로 고예에게 말해 주었고 고예는 진심으로 믿고 기뻐하였다. 화사개는 연주자사, 원문요는 서연주자사로 내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장례가 끝나고 100여일이 지나도록 화사개와 원문요가 임지로 떠나지 않았다. 호태후가 그것을 말렸기 때문이었다. 고예가 여러 번 재촉하자 호태후의 측근이 고예에게 말했다.

 

  “ 태후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데 어쩌겠소.

    어찌 전하께서 번거롭게 재촉하여 태후심기를 건드리는 것이요?”

    

고예가 대답했다.

 

 “ 나는 국가의 위탁을 받은 사람이라 책임이 가볍지 않소.

   군주가 너무 어리신데 어찌 간사한 무리를 곁에 두시게 할 수 있겠소.

   그를 죽음으로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하늘을 떠받들겠소?” 

   

그대로 태후에게 달려갔다. 태후가 술을 권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 지금 국사를 의논하는 마당에 어찌 술잔을 들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고예는 방을 뛰어 나왔다. 화사개는 미녀와 구슬발을 들고 누정원에게 가서 감사의 뜻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 여러 귀인들이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

    귀하의 힘을 입어서 특별히 제 목숨을 보전해 주시고 

    게다가 등용하여 방백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받들고 하직인사를 올리게 되어 두 여자와 주렴을 바칩니다.”  

 

입이 쩍 벌어지게 기뻐한 누정원이 물었다.

 

  “ 빨리 돌아오고 싶지 않소?”

 

화사개가 말했다.

 

  “ 궁 안에 있으면서 스스로 편안하지 못했는데

   이제 나가게 되어 실제로 제 본 뜻을 이룬 것입니다.

   부디 왕(누정원)께서 저를 오래 보호해 주셔서 

   큰 주의 자사로 삼아주시면 평생 은혜로 알겠습니다.”

 

누정원은 그 말을 액면대로 믿었다. 문 밖까지 전송 나온 누정원에게 화사개가 말했다.

 

  “ 지금 먼 곳으로 가면 언제 다시 뵐지 모르는데

    두 궁(황제와 호태후)을 찾아 뵙고 알현할 기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하직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누정원은 화사개가 알현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화사개가 황제와 호태후에게 말했다.

  

  “ 돌아가신 상황께서 별안간 승하하셨을 때 

    신이 스스로 같이 죽지 못한 것이 너무 원통합니다.

    조정 대신의 생각과 기세를 보니

    장차 폐하를 건명(폐위된 고양의 아들 고은의 연호)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신이 나가면 곧 큰 변란이 있을 것인데

    그리되면 신은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계신 선제를 뵙겠습니까?”

 

  화사개가 울음을 터뜨리자 황제 고위와 호태후 모두 울면서 말했다.

 

  “ 어떻게 해야 그것을 막겠소?”

 

화사개가 말했다.

 

  “ 신이 이미 궁으로 돌아왔으니 문제가 없습니다.

    조서 한 줄로 간단히 해결 됩니다.” 

화사개는 황제에게 시켜서 누정원을 청주자사로 내친다는 것과 고예를 신하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책망한다는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다음날 고예가 궁으로 들어가 따지겠다고 나섰다.

온 가족이 반대하고 말렸지만 이렇게 말하며 뿌리치고 나갔다.

 

  “ 사직의 일이 중요하다.

    내 차라리 죽을지언정 조정이 뒤엎어지는 것을 볼 수는 없다.”

 

전문에 도착했지만 지키는 궁인들 중에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뿌리치고 들어가 태후를 알현하자 태후는 또 다시 화사개를 유임시키자고 설득했다. 고예는 화가 치밀어 궁문을 나섰다. 황궁 군사가 꼳바로 쫓아와 고예를 체포하고 감옥에 가둔 다음 죽였다.

 

고예는 북제 조정에서 찾기 힘든 청렴하고 강직하며 지조를 지킨 황족이나 대신이었다. 당시 조야가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화사개는 시중 상서좌복야가 되었다. 누정원은 뇌물로 받은 것에 덧붙여 더 많은 진기한 보화를 화사개에게 돌려주었다.   

 

 

<122> 고위의 보모 육령훤(AD569)

 

당시 북제 궁노비 중에 육령훤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예쁘기고 영리하며 애교를 잘 떨어서 호태후가 자신의 아들 고위의 보모로 삼았던 여자다. 고위가 황제가 되면서 육령훤은 공로를 인정받아 군급의 작위를 내려받기도 했고 당시 실세 화사개와 고아나굉이 그의 양자가 될 정도였다. 고위는 육령훤을 끌어들여 여시중으로 등용하고 그의 아들 낙제파는 고위의 호위무사로 임명하여 무위대장군이 되었다. 

 

고위는 특별히 목사리라는 여인을 좋아했는데 이 여자는 황후 곡률씨의 몸종이었다. 눈치 빠른 육령훤은 목사리가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것을 보고 그에게 붙기 위해 그의 양어머니가 되었고 그 덕으로 홍덕부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아들 낙제파의 성을 고쳐 목씨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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