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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밍의 교훈#20 : 잔학한 황제로 이어진 북제北齊(U)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5월14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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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27> 육령훤의 국정 농단(AD572)

 

화사개가 사라지고 또 단소가 죽으면서 북제 조정의 실권은 당연히 조정과 육령훤에게로 귀속되었다. 단소는 장수와 군졸을 통솔하는 데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조정안에서도 신중하고 온화하면서 항상 근신하였기 때문에 재상의 풍채가 뛰어나게 드러난 사람이었다. 겐다가 계모를 모시고 살면서 지극한 효성을 보였기 때문에 북제 조정 훈귀 중에서 단소의 집안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AD572년 2월 정기인사에서 조정은 상서좌복야가 되었다. 상서령에는 조정의 측근 당옹이 임명되었다. 대담한 조정은 육령훤을 태후로 옹립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생모 호태후는 실덕하여 유폐되어있는 데다가 육령훤이 사실상 황제 고위를 길렀기 때문에 어머니와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였다. 육령훤 또한 조정을 향하여 국사라느니 국보라는 칭호로 추켜세웠다. 사실 육령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좌복야가 된 것이었다. 

 

<128> 조정과 곡률광의 갈등(AD572) 

 

조정이 육령훤과 짜고 북제 정권을 흔들자 가장 분개한 사람은 좌승상 함양왕 곡률광이었다. 그는 황제의 장인이기도 했지만 고환때 부터 북제 조정을 도운 최고의 훈구가문이었다. 조정이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곡률광은 소리 질렀다. 

 

  “ 많은 일 가운데 빼앗는 일만 할 줄 아는 소인이 

    무슨 국사를 한다고 설치고 다니는가!” 

 

곡률광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 병마에 관한 의논을 할 때에는 항상 조언심이 같이 참여했었다.

    지금은 눈 먼 사람이 모든 기밀을 틀어막고 관장하고 있으니

    우리들이 알 길이 없어서 장차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칠 것이 우려되오.” 

 

조정이 지나갈 때마다 곡률광이 소리치며 꾸짖자 조정은 곡률광의 노복에게 뇌물을 주며 상황을 물었다. 노복이 몰래 이렇게 말했다.

 

  “ 공(조정)께서 권세를 잡은 후부터 상왕(곡률광)께서는

    밤마다 무릎을 끌어 안고서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 맹인이 들어오니 나라는 반드시 무너지겠구나.’ ”

 

조정은 곡률광을 가만 두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육령훤의 아들 목제파가 곡률광의 서녀를 첩으로 원했다. 곡률광이 그것을 허락할 리가 만무했다. 황제 고위가 목제파에게 진양의 땅을 하사하자 곡률광이 화를 내며 반대했다.

 

  “ 이 전지는 신무제께서 벼를 심고 말을 길러 노략질을 망어하기 위해

    준비하신 땅입니다. 지금 목제파에게 내리신다면

    국토방위 군사업무는 포기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조정과 육령훤과 목제파는 곡률광을 몹시 원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위의본 부인 곡률씨가 아이도 못 나았지만 황제의 총애도 받지 못했다.  조정은 이 사실을 틈타서 이간질을 했다.

 

 

<129> 곡률광의 피살(AD572)

 

곡률광은 귀하기로 북제 최고의 위치에 있었지만 성품은 절약하고 음악과 여색을 멀리했으며 빈객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조정 회의에 나와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바른 말로 간언을 올렸으며 권세를 바라거나 간사하게 아첨하거나 하지 않았다. 군사를 이끌 때에도 아버지 곡률금을 본받아서 군 막사가 정리되지 않았으면 절대로 먼저 숙소에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며 종일 갑옷과 투구를 벗지 않았고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전투에 임해서는 항상 선봉에 섰서 사졸보다 앞서 나갔다. 사졸들이 죄를 범하면 큰 매로 등을 내리칠 뿐 죽이거나 몸을 자르는 일이 없었다. 곡률광의 위엄에 감동을 받은 군사들은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다투어 전쟁터로 나갔다. 일찍이 전쟁에서 져 본적이 없었으므로 적군, 특히 북주가 곡률광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곡률광의 위세를 떨뜨리기 위해 북주의 명장 위효관은 묘한 동요를 만들어 퍼뜨렸다.

 

  “ 百升飛上天 : 백승(=곡률광)이 하늘을 날아오르고

    明月照長安 : 밝은 달은 장안을 비추네 

    高山不推自崩 ; 고산(=북제)는 밀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지고 

    槲木不扶自舉 : 느티나무(=곡률광)는 붙잡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서네”

 

또 다른 동요가 있었다. 이것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조정이 퍼뜨린 것이 분명한 동요였다.

 

  “ 盲老公背受大斧 : 늙은 맹인 노인네가 등에 큰 도끼를 수여 받았네,

    饒舌老母不得語 : 요사한 수다쟁이 늙은 어미는 말을 못 하네”

 

조정은 이런 동요가 퍼지고 잇다는 것을 처형 정도개를 통해 황제께 보고하도록 했다. 황제가 조정에게 그런 사실이 있는지 확인차 물었다. 조정이 육령훤과 함께 대답했다.

 

   “  실제로 그렇습니다. 

      백승이란 곡률씨를 말하고 늙은 맹인이란 저를 말함이며 

      요사한 수다쟁이 늙은 어미란 여시중 육씨를 뜻합니다.

      곡률씨는 여러 세대에 걸쳐 대장을 역임했고 

      명성이 관중과 농서에 떨치고 있습니다. 풍악은 돌궐가지 이르렀으며

     여식은 황후, 남자아이들은 공주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퍼지는 동요가 심히 걱정됩니다. ” 

     

황제는 한장란에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으나 곡률광을 처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그만 두었다. 황제가 아무런 조치를 내리지 않자 조정은 급히 황제에게로 달려갔다. 황제가 말했다.

 

  “ 한장란이 별일 아니라고 했소.”

 

황제 곁에 있던 하홍진이 물었다.

 

  “만약 곡률광이 그럴(반역) 생각이 없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 소식이 누설되어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황제가 하홍진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지난 번 곡률광이 의양전투에서 돌아 올 때 군사를 멈추라는 황제의 명령을 곡률광이 여러 번 듣지 않고 진군한 것을 봐도 곡률광의 속 내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했다. 마침 승상부의 봉사양이란 작자가 비밀리에 계문을 올려 바로 그 사실을 지적했다. 곡률광을 소환하기로 했다. 걱정은 만일 곡률광이 소환에 응하지 않을 경우였다. 조정이 말했다.

 

  “ 먼저 좋은 말을 곡률광에게 내려 보내십시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십시오.

     ‘ 내일 동산에서 놀이를 하려고 하니 왕은이 말을 타고 와도 좋소.’

    그러면 곡률광은 반드시 와서 감사할 것인데 그 때 체포하시면 됩니다.”

 

7월 28일 곡률광이 황궁으로 들어왔는데 유도지가 뒤에서 덮쳤지만 곡률광이 쓰러지지 않았다. 곡률광이 외쳤다.

 

   “ 유도지는 항상 이런 짓을 하는구나.  나는 국가에 죄를 짓지 않았다.”

 

힘 센 장수 세 명이 곡률광을 붙들고 나가서 목을 조르고 잘라 죽였다. 피가 땅 바닥에 고였으나  아무리 깎아도 혈흔이 지워지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서 곡률광이 반란을 시도하여 죽였다고 발표하였다. 곡률광의 아들 곡률세웅, 곡률항가도 불러서 함께 죽였다. 바깥에 나가있던 또 다른 아들 곡률무도와 동생 곡률선도 죽였다. 

 

조정은 형조신에게 곡률광의 집을 샅샅히 뒤지라고 시켰는데  그의 집에서는 활 열다섯 자루와 연회용 화살 100개, 칼 일곱 자루와 하사받은 창 두 자루 밖에 없었다. 반역을 일으킬 병기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화가 난 조정은 더 샅샅이 살펴보라고 소리 질렀다.(AD572년 5월) 

 

  “  대추나무로 만든 방망이 20개가 나왔습니다.”   

석 달 뒤인 8월 곡률황후는 폐서인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130> 조정과 고원해의 갈등(AD572)

 

군부 실력자 곡률광을 제거한 조정과 시중 고원해가 북위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고원해는 육령훤의 조카를 부인으로 두고 있었다. 같은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고원해는 육령훤과 나눈 밀담을 종종 조정에게 알려주어 조정의 신임을 얻으려고도 했다. 조정은 황궁의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영군장군이 되기를 바랐다. 황제가 그것을 허락하려고 하자 고원해가 황제에게 은밀히 물었다.

 

  “ 조정은 한족 아닙니까.

    또 두 눈이 멀었는데 어찌 연군장군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조정이 다른 황족인 고효형(고징의 아들)과 매우 가까우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황제는 조정의 영군장군 임명을 보류했다. 영군장군 건이 취소되자 조정은 고원해를 의심했다. 황제에게 달려와서 물었다.

 

  “ 신은 평소 고원해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분명히 고원해가 신을 헐뜯었을 것입니다.”

 

황제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하자 조정은 고원해의 비리를 모두 들어내어 일러바쳤다. 또 고원해가 자신에게 육령훤과의 밀담을 알려 준 것을 육령훤에게 말하여 육령훤 또한 고원해에게 화를 내었다. 고원해는 정주자사로 쫓겨나갔다. 이제 조정은 국가기밀과 인사전형과 병권을 오로지 독단할 수 있게 되었다.(AD572년 6월)  

 

<131> 좌우황후: 호황후와 목황후(AD572)

 

자신의 추한 행태로 황제에게 실망을 안겨준 호태후는 스스로 만회하기 위하여 오빠 호장인의 딸을 궁으로 데려와 화려하게 단장시키고서 황제의 눈에 들도록 일을 꾸몄다. 황제 고위가 과연 호장인의 딸을 기쁘게 받아들여 소의로 삼았다. 

 

곡률황후가 폐서인 된 뒤 고위는 목부인을 황후로 올리고 싶어 했으므로 호장인의 딸을 지원하는 호태후로써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즉 궁중의 실력자 육령훤과 자매관계를 맺고 그의 도움을 청했다. 육령훤도 황제가 아끼는 호소의가 황후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조정과 함께 호소의를 황후로 추천했다.           

 

그런지 얼마 뒤 육령훤은 목소의를 황후로 만들기 위해 황제에게 다가갔다.

 

  “ 어찌 황태자를 낳은 여자를 비첩으로 둘 수 있습니까?”

 

목부인이 낳은 아들이 황태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때문에라도 목부인은 황후가 될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무당을 불러 호황후를 저주하는 의식을 몰래 치르게 했다. 과연 호황후는 말과 정신이 흐릿해지면서 웃고 우는 것이 일정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호황후가 미쳐간다고 생각하고 점점 멀리했다. 육령훤은 목소의에게 황후의 옷을 입히고 치장을 화려하게 한 다음 휘장 뒤에 앉게 한 다음 황제에게 말했다.

 

  “이제 한 성스러운 여인이 나타나 대가(황제)를 뵐 것입니다.”

 

육령훤이 소의를 불러 세우고는 말했다.

 

  “ 이렇게 예쁜 사람을 황후로 만들지 않으면 어떤 사람을 세우시겠습니까?”

 

마침내 목부인을 황후로 세우기로 했다. 호황후를 좌황후, 목씨를 우황후로 임명했다.(AD572년10월)    

 

 

<132> 육령훤과 아들 목제파

 

호황후가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호태후 때문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육령훤은 호태후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 어떤 놈이 저런 조카딸을 황후로 추천했단 말입니까?”

 

호태후가 왜 그렇게 묻냐고 하자 육령훤이 말했다.

 

  “ 말할 수가 없소.”

 

호태후가 계속해서 고집스럽게 묻자 육령훤이 말했다.

 

  “ 대가께서 말씀하시기를 

    ‘ 태후의 행동이 법도에 맞지 않으니 모범으로 삼을 수가 없다.’

    하셨습니다.“

 

호태후는 호황후 때문에 자신이 욕을 먹는다고 생각하고 호황후를 불러 내 머리를 다 깎은 뒤 집으로 돌려보냈다. 육령훤과 조정은 즉각 호황후를 폐서인 시키는 작업을 완성했다. 황제 고위는 여전히 호황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사가로 많은 선물을 보냈지만 육령훤과 조정의 위세를 뒤엎을 만큼 강단도 없는 사실상의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

 

육령훤은 안으로 호태후를 비롯해 모든 비빈의 생사를 좌우하는 실력을 지니게 되었고 그 아들 시중 목제파는 밖으로 인사와 행정을 아우르는 권력을 손아귀에 쥐었다. (AD572년12월)  

 

<133> 북제의 삼귀三貴(AD573)

 

AD573년 1월 정기인사에서 북제는 병주의 상서령으로 있던 고아나굉을 불러들여 녹상서사로 삼아 상서성과 병사문제를 총괄하게 하였다. 시중 목제파와 영군대장군 한장란이 고아나굉과 함께 북제의 실질적인 국정주도 세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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